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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그 이름의 사람들











나는 독재는 잘 모른다. 내가 태어났던 날은 독재자라 불리던 한 남자가 총탄에 쓰러져 간 추운 겨울이었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난 어머니 품에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우리나라는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굉장히 민주적인 나라였으며, 그 사람이 정말 보통 사람인 줄 알고 자랐다. 그렇기에 내가 알고 있는 독재는 책을 보고 배운 것이 전부이며, 신학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보니 그마저도 굉장히 피상적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엄격한 의미에서 독재에 대한 글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나는 이 글에서 권력이 집중된 개인보다는 그 이름 뒤에서 능동적/수동적으로 독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로마의 후원자/수혜자 체제


고대 로마사회는 사회학에서 ‘후원자-수혜자 관계’라고 부르는 특징이 굉장히 잘 드러나는 사회였다. 로마인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 혹은 타인에게서 빼앗기 위해 돈이나 정치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각주:1] 그리고 그들의 후원(은혜)를 받은 수혜자는 그 대가로 후원자의 명예를 드높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로마인들은 일상에서 만나는 후원자/수혜자의 관계를 통해서 이런 사회구조를 상징적으로 경험했다.[각주:2]그들은 매일 아침 후원자의 집을 방문하는 수혜자들의 아침문안 인사 속에서, 혹은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과 건물, 동상들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면서 끊임없이 이런 사회구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받아들여진 사회구조는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포된 후,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상징되는 세계 속에서 황제는 모든 로마인의 후원자였고 모든 로마인은 황제의 은혜를 받은 수혜자였다. 각 지역에서 열리는 운동경기나 제의 속에서 Pax Romana의 메시지는 끊임없이 선전되었다. 이런 정치적 선전은 개인의 일상적인 관계를 황제가 제공하는 Pax에 기반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게 있어서 후원자/수혜자와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은 최고의 후원자인 로마 황제 혹은 그를 지켜주는 신에 의해 보호받는 세상(Pax)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로마인들에게 있어 황제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Pax Romana의 메시지가 기반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에 대한 태도는 곧 그가 상징하는 세계에 대한 태도로 연결되었다. 이런 로마인들의 이해는 황제의 독재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황제의 행위는 독재가 아니라 신적 질서인 Pax를 유지시키는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신의 아들’로 선포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지엽적으로 일어나는 속주들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것이 폭력이 아닌 평화로 이해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황제를 황제이게 하는 것은 그가 가진 칼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고린도의 사람들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고린도라는 도시의 사람들도 이런 전형적인 로마인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 고린도는 세계적인 무역도시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린도는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서 폐허가 된 땅이었다. 거기에 카이사르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겠다며 해방노예들을 이주시켰다. 그 후 한 세기가 못되어, 고린도는 특유의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무역도시로 성장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이 경험했던 조금은 특별한 환경의 변화들은 로마제국의 밑바닥에 흐르는 사회구조의 의미들을 우리들 앞에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고린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 대부분이 해방노예였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에서 신분상승이나 사회 계층간의 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노예해방은 당시 사회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경험이었다. 그들은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주인의 지배아래 있었던 삶의 환경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삶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노예일 때 타인에 의해서 주어졌던 것들이 자유인이 된 후 책임지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해방된 노예에게 자유라는 것은 선물이기보다는 실존적인 불안과 공포에 가까웠다.

 

이들에게 고린도라는 땅은 낯섦과 애매함으로 가득한, 그들을 지켜주던 방어막이 상실된 세계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새롭게 정의하고 평가하며 분류해야 했다. 사소하게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나 목욕탕을 이용하는 규칙 같은 것들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더 심각하게는 옳고 그름의 문제, 가치들의 혼재와 충돌이 정리되지 않은 채 일어났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모든 것이 애매했다. 계층이나 지위 같은 좀처럼 무시되기 어려운 사회적 규범도 급격한 신분 변화를 경험했던 이들에겐 유동적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사회적 규범의 혼돈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그들의 세계를 지켜준 것은 바로 후원자의 이름이었다.

 

로마인들은 종종 후원자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황제를 후원자로 두고 있는 이들은 황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 가운데 넣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해방노예들은 자신을 해방시켜 준 주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전 주인과의 후원자/수혜자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들에게 있어서 누군가의 이름으로 자신을 규정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환경이 주는 공포감 앞에서 자신의 삶을 우주적인 ‘옮음’의 결과물로 확인시켜주는 상징이었다. 이 관계가 유지되는 한 그의 Pax는 신의 아들인 황제에 의해서 보증된다. 반대로 이 구조를 거부하거나 자신을 규정하는 이름에 대한 배신은 Pax의 상실을 의미했다.


 

바울의 십자가가 가진 의미


고린도인들이 경험했던 사회적 변동과 그 속에서 자기를 정당화했던 방식은 그들이 또 다른 새로운 삶을 맞이했을 때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재연되었다. 초대교회 당시 ‘세례’는 가장 일반적인 입교예식이었기에 새로운 삶으로 들어오는 고린도의 사람들에게는 자신과 후원자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가장 훌륭한 접촉점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각자 자신에게 세례를 주었던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 그리고 그리스도[각주:3]의 이름으로 자신을 규정했다. 그리고 각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과 연결된 또 다른 수혜자들이 이 이름 밑으로 모여들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문제시하는 것은 교회가 서로 싸우면서 분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도들의 이름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그들의 방식이 로마 제국의 사회구조를 그대로 교회 안에 재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들이 내면화한 사회구조가 타인에 대한 폭력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과 다른 집단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소수자였던 연약한 지체를 불필요한 자라며 무시했고, 특별한 형태의 신앙 경험만을 사람들에게 강요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고린도의 신앙문화를 어려워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자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여성들은 여러가지 제한으로 인해 공동체의 중심에서 배척되었다. 이런 모든 배타적 폭력이 사도들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바울에게 이런 현상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터’를 세우는 것 혹은 십자가의 삶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였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례’를 통해서 일어난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자신과 고린도인들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이름으로 분파를 만든 이들 가운데 실제 자신이 세례를 준 사람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의 가족들뿐임을 강조한다. 이 말은 바울이 ‘세례’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자신과 고린도의 관계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세례를 몇 명 주었는지에 대한 재확인이 아니라 세례라는 상징행위를 통해 로마의 사회구조, 즉 Pax를 재연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거부는 바울파와 더불어 아볼로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대답은 그들 중에 누가 옳은지를 가려주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개인의 이름에 의지하는 모든 행위는 복음에 대한 배신을 의미했다. 그 이유는 애초에 그가 전한 것이 지식이 아니라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한 십자가란 무엇인가? 고대 로마 세계에서 십자가란 Pax를 거부하는 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로마는 황제의 통치가 가져오는 Pax를 거부하고 정치적 반란을 꾀하는 이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반로마 항쟁 당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로마 군대는 포로들을 잡아서 하루에 500개씩 십자가에 매달아 도시를 둘렀다. 이처럼 십자가는 로마의 권력이 주는 공포의 상징이며, 로마의 Pax를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도구였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 뒤에서 Pax를 찾는 이들에게 그 Pax로 인해 죽어간 이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이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며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부활을 통해 로마 제국의 Pax를 이기고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바울은 누군가의 이름 뒤에 숨는 이들의 정당성을 거부하면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재편성한다. 그래서 바울의 공동체는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요긴하고, 덜 명예스러운 지체가 더 풍성한 명예를 누리며, 볼품없는 지체가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해야 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해야 한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모든 은사보다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름은 공포가 아니라 선물이며 그들이 만나는 새로운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뿐이다.

 


오늘의 Pax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처음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갈 시간이다. 독재자가 휘두르는 총칼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독재자를 독재자이게 하는 것은 바로 독재자 뒤에서 그가 제공하는 ‘통제된 세계’를 향유하려는 사람들이다. 독재자가 상징하는 세계는 그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이들에 의해서 신에 의해 부여된 것, 당연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정당화된다. 이것은 투표로 권력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에 한정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어떤 권력이든 힘으로 쟁취할 수 있지만 힘만으로 지속될 수는 없다. 권력에는 언제나 정당성이 요구된다. 그것이 과거에는 신탁과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현대에는 선거와 헌법이라는 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물론 51:49로 선거에서 졌다고 해서 49%의 반대의견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Pax는 이것을 마치 모든 이방민족을 무찌르고 ‘신의 아들’로 선포되는 로마황제의 대관식처럼 선전한다. 그렇기에 49%의 존속은 그저 다른 의견이 아니라 신의 질서에 대한 반란이 되고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것이 된다. 이는 애초에 선거를 통해서 얻으려 하는 것이 단순한 정치적 의결권을 넘어 ‘내가 옳다고 믿는 세상’에 대한 공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정치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하지만 이런 선전은 그 선전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선전을 듣는 이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독재자를 만들 수 있다. ‘나의 세계’ 속에 ‘타인의 세계’를 끼워 맞추는 방식은 언제나 쉽고도 달콤하다.

 

폐허가 된 고린도 땅에 첫발을 디뎠던 해방노예들처럼 우리나라도 일제식민지와 민족간의 전쟁을 겪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하지만 비록 자유가 주어졌지만 누가 아군인지 누가 적군인지, 도덕적 정당성과 현실적 실용성, 지역적 관계와 공공적인 개인의 위치 등… 수많은 것들이 판단할 준비도 되지 못한 채 우리 앞에 던져졌다. 그것은 자유의 품으로 나온 우리들에게 또 다른 공포와 혼돈의 경험으로 다가왔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고린도의 그들처럼 다른 이의 이름으로 자신을 규정했다. 어떤 이들은 해방되기 이전에 자기를 다스리던 이들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손잡은 그 세계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누군가의 이름 뒤로 스스로 숨어들어 갔다. 그 후원자가 우리의 삶에 Pax를 지켜줄 것이라 믿으면서…

 

오늘날 복음은 독재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바울은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지켜내려는 고린도 교회의 모든 이름들을 향해 분명한 반대를 말한다. 로마 제국의 Pax는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통용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언가 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질서는 사람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메시지는 Pax라는 질서 앞에 철저히 못박힌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질서의 승리처럼 보였던 사건을 뒤집으셨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 앞에서 보장되지도 않고, 그것을 위해 나와 다른 이를 십자가에 못박지도 않는다. 진정한 ‘신의 아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이시다.



글_신승호(CAIROS 회원)

  1. 당시 사회는 명예를 한정된 재화로 여겼다. 그렇기에 명예는 실추되거나 증진되는 것이기보다는 다른 이로부터 빼앗아오거나 다른 것으로 교환해야 했다. [본문으로]
  2. 피터 버거는 일상 속에서 일반적 타자와의 만남이 사회구조를 개인의 의식 속에 내면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피터 버거는 지하철의 예를 드는데, 개인은 매일 아침 출근 전철에서 만나는 타인들을 통해 자신이 자신이 당연한 세계 속에 소속되어 있음을 거듭 확인 받는 것이다. [본문으로]
  3. 그리스도파가 실존했는지 실존했다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에 따라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도파를 열광적 신비주의자들로 정의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실존하는 분파가 아니라 바울이 다른 분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삽입한 수사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이 이 관계를 세례의 문제로 풀어간다는 측면에서 볼 때, 바울이나 아볼로 혹은 게바가 아니라 다른 사도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소수 집단의 연합파벌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