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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trans-post-christianities

‘속물’의 시대와 한국 기독교 [박치현]


<사랑의 교회> 건축을 두고 논쟁이 한창 일고 있다. 한국 대형교회의 이미지와 한국사회의 양극화라는 현실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고, 강남의 대표 교회는 그러한 간극 속에서 일종의 부의 상징으로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이렇듯 한국 교회와 기독교 신자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양산하는 ‘속물’ 트렌드를 주도하는 문화기관, 문화전파자가 된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는 반성적이지 않다. 오히려 비판자들을 가룟 유다와 비슷하다고 나무란다. 향유옥합 살 돈을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쓰라고 예수를 나무랐던 가룟 유다 말이다. 졸지에 비판자들은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로 낙인찍히고 만다. 일찌기 향유옥합은 '그나마 없는 돈까지 갖다 바치라'는 빈민 압박용 설교로 와전된 지 오래이다. 끝까지 쥐어짜라!

역사적으로 개신교는 ‘내면’의 종교이다. 어떠한 외적인 현실과 형식도 신앙의 정체성을 규정짓지 못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ꡔ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ꡕ에서 일본인들에게 ‘내면’을 가져다준 것이 문학을 경유한 기독교라고 주장한 바 있다. 비록 일본이 한국 같은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당시 근대문학에 내장되어 있던 개인주의의 필수 구성요소인 ‘내면적 인간’에는 기독교의 ‘고백’이라는 장치가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내면적 인간의 특징은 외적 현실과의 불화이고, 그는 외적 현실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내면을 확립하고자 한다. 따라서 외부와 내부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개인과 사회의 불화를 만들고, 그 불화가 근대문학이 성립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했다고 할 수 있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최근에 낸 저서 ꡔ마음의 사회학ꡕ에서 내면적 인간의 외적 현실과의 갈등을 가리키기 위해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근대적 인간은 내적 자아의 일관성을 위해 외적 현실의 모순과 긴장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동력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심적 기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내면의 일관성, 신념과의 합치를 위해, 정의롭지 않은 외적 현실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실천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속물이 된 386세대들은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드러나듯, 죽어간 자들에게 ‘부채의식(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내면적 갈등을 모르고 부채의식을 벗어던진 속물의 시대가 왔다. 속물은 내면이 없다. 따라서 갈등도 없다. ‘부자되세요’가 덕담이 되는 시대. 부자가 될 수 없기에 더욱 그것이 덕담이 되는, 불가능한 희망들의 시대가 왔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내면적 인간, 진정성을 추구하는 인간은 한국 교회에 존재하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에서라도 내면적 갈등은 발생해야 한다. 하지만 4영리라는 간단한 구원공식은, 신과 인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면적 갈등을 소거시켜 버린다. 신앙이 내면적 투쟁이 아니라, 객관식 시험의 정답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인간상은 교회에 보이지 않는다. 교회만 나가고 헌금만 잘하면, 봉사만 좀 하면 만사오케이다. 형식이라는 껍데기만 남는다. 부족한 신자로서의 갈등보다는, 구원받아 우쭐하고 교만한 자로서, 타자에 대한 제국주의적 태도가 지배적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비판과 일부 교회개혁의 목소리에도 태연자약하거나 적반하장인 것이다. 스노비즘의 핵심은 형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내면 없는 외양, 내용 없는 형식만이 그를 지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치부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더 큰 문제는 그 에토스 자체가 대단히 속물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내면적 기독교와 속물적 기독교. 내면적 기독교는 정말 스스로 판단하고 고민하여 답이 나올 때까지 신앙적 추구를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속물적 기독교는 신앙을 도구화하여 자신의 세속적 삶에 도움이 되거나 교회가 요구하는 형식에 맞추기만 하면 된다. 형식에 머무르는 한, 나는 편안하다. 따라서 반성의 필요성이 소멸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후자(속물적 기독교)가 완전히 정복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속물적 기독교가 낳는 악순환은 반복된다. 속물적 기독교를 비판하는 자들마저 이미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규정짓는다. 비판하는 자리는 이미 높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반대-정체성counter-identity’도 강력한 정체성이다. 오히려 반대-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자기반성을 더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386세대의 두 얼굴에서 역사적으로 지켜본 바 있다. 막상 그들은 학생운동 조직 내부의 모순을 성찰하지 못했던 것이다. 뒤늦게 여성과 후배들이 비난하고 나서야 과거의 일상적 파시즘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뒤늦은 반성마저 하지 못하는 듯하다.

따라서 비판자들에게 '반성력'은 필수 덕목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류 교회 질서가 만들어 놓은 틀을 넘기 어렵다. 설사 머리로는 옳은 것을 생각하고 있어도, 한국 교회문화의 정당치 못한 아비투스가 잔존하고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문화와 유사한 남성/여성 문화가 그들에게 잔존할지도 모른다. 입시기도로 드러나는 교회의 학벌주의, 나아가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을는지 모른다.

속물적 기독교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비판자들의 반성은 더욱 철저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의 내면적 갈등의 공간은 언제나 활발하게 작동해야 한다._박치현(CAIROS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