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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trans-post-christianities

윌버포스 신화 벗기기 [마르셀]

1.

아바타라는 영화가 있다. 읽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나는 이 속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성찰을 읽어냈다. 외계인들의 땅에 가서 외계인 마을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그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시도, 이로 인한 피해, 그리고 연대와 저항. 이 영화 속에서 회사의 사장과 전직 군인은 나비족을 강제로 추방하고 자원을 약탈하려 하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다소 불편한 지점도 생긴다. 주인공을 아바타로 바꿔주는 그 박사의 역할 이 그것다. 결과적으로 나비족과 연대하고 싸우긴 했지만, 그 박사는 군인-사장의 공격 결정 이전에는 나비족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이해를 구한 뒤 이주를 시키고 나서 그곳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자,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곳의 자원을 노리고, 폭력적으로 나비족의 땅을 빼앗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토지보상금을 주고, 인간의 언어를 교육시키고, 이주 대책을 마련해주는 등의 조치를 하고 나서 그 땅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폭력이 아닐까? 과연 나비족이 자신의 터전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서 삶을 꾸린다는 것의 의미는 알까? 박사의 작업은 얼핏보면 매우 인간적으로 보이지만 나비족에 대한 기만으로 결말이 날 확률이 높았던 일이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식민주의는 무기나 가시적인 폭력의 수준에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식민지화 100년을 맞는 금년에 이르러서도 계속해서 미완의 식민지 문제가 우리 사회 내외부에서 나오는 것은, 가시적인 폭력이 그치고 사라진 그 순간에도 제국주의-식민주의가 만든 비가시적인 폭력들과 수많은 유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사의 행동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비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고 새로운 삶을 인간들에게 의존하도록 하는 효과를 만들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의도와 관련 없이 제국주의-식민주의적인 행위였다.


2.

윌버포스라는 사람이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사람이 있다. 얼마 전부터 개신교가 사회참여 논의를 하는 데 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명인이기도 하다. 검색해보니,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쓴 오정현 목사의 칼럼 제목도 “윌리엄 윌버포스를 기대하며”이다. 이만열 교수도 비슷한 시기에 칼럼을 통해 윌버포스 같은 국회의원에 대한 기대를 피력했다. (이 무렵 어메이징 그레이스라고 하는 윌버포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한 탓이기도 하다.) 이렇게 윌리엄 윌버포스는 최근 기독교인이 정치나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의 표상이 되는 인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윌리엄 윌버포스는 1759년 8월 24일에 킹스턴 어폰 헐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


윌버포스는 대학 재학 중일 때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1살의 나이에 킹스턴 어폰 헐의 의원후보자로 등록을 하고 탁월한 연설 능력에 힘입어 무소속으로도 당선되었다. 1784년에는 영국에서 크고 중요한 지역인 요크셔의 의원이 되다.


이 해 윌버포스는 복음주의로 개종한다. 그리고 이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2년 가까운 갈등의 시기를 보내면서 그의 삶은 이전과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는데, 당시 상류층 인사들이 모이는 다섯 개의 클럽에서 탈퇴하였으며, 방탕한 분위기로 흘러가던 연극 극장의 출입을 중단하였다. 도박과 춤을 끊었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윌버포스를 당시의 상류사회는 조롱했고, 그는 의원을 계속할 것인가 고민했다. 이때 <Amazing Grace>의 작사자인 존 뉴턴의 조언으로 그는 정치를 계속하기로 한다.


이 때 그는 찰스 미들턴 경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계기가 되어 노예무역의 폐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당시 노예를 실어 나르던 노예선은 내부 높이가 75cm였는데, 이 속에서 노예들은 짐짝처럼 실린 채 먼 거리를 항해해야 했다. 운반 도중의 여자 노예들은 성폭행을 당했다. 도착 후엔 발가벗은 채 거리를 행진해야 했고, 행진 이후에는 경매를 통해 팔려가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나마도 병든 노예들은 버려진 채 죽음을 당해야 했다. 문제는 영국이란 나라가 세계적인 노예무역의 주동자였고, 영국의 선박들이 서아프리카를 통해 세계 노예의 절반 이상을 실어 나르는 현실이었다.


현실이 이러니 쉽게 이뤄질 리가 없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버크, 피트, 폭스 등의 동료들과 함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매년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1807년에 마침내 283대 16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노예무역폐지안이 통과되었다.


1823년 윌버포스는 새로운 투쟁을 시작한다. 이미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이 또한 성공을 거두어 의회가 영국에 있는 모든 노예를 1년 안에 해방하라는 법령을 선포하였다. 1833년 7월 29일 74세로 사망.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윌리엄 윌버포스이다. 그리고 윌버포스의 한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한 측면은 윌버포스의 생애에서 완전히 간과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비기독교 저서에서 그것이 등장한다. 이를 알아보자.


3.

먼저 Robert Fisiman이라는 미국의 사회사가가 지은 <Bourgeois Utopias: 부제 - 교외의 사회사>에 나오는 윌버포스를 한번 보자.


... 노예제 폐지운동에서 윌버포스와 그의 복음주의자 동료들이 행한 역할은 지금도 타당하게 찬양되고 있다. 이에 비해 ‘풍습’에 관해 그들이 행한 역할은 크게 기억되지 않고 있다. G. M. Young이 “복음주의 규율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억압이 ... 매번” 영국의 문화를 “통제하고 살아나게 했다.”고 말해왔지만 말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우리가 지금 빅토리아니즘이라고 부르는 복합적인 태도를 창출함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 ... 복음주의자들은 가장 안전한 구원의 길은 진실한 기독교 가족의 자애로운 영향력이라고 가르쳤다. ... 가족의 주요한 적은 도시 및 도시에서 제공되는 사회적 기회들이었다. 윌버포스의 풍습개혁은 본질적으로 모든 형태의 도시적 쾌락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었다. 극장, 무도회, 음악회, 카드놀이, 거리축제, 술집, 무도장, 유원지 등 도시에서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오락을, 심지어 카드놀이에 대해서도 공격했다. 완전히 문을 닫게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일요일에는 금하도록 했다. ... 윌버포스와 그의 동료 복음주의자 Hannah More는 18세기 부르주아 여성의 교육과 가치들을 새로운 이상에 어울리도록 재정의하는 데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 온화하고 다감하고, 생기 있고 정숙한 여성이며, 교육의 측면에서 우아하고 지적이고 개화된 여성이며, 종교적 측면에서 독실하고 겸손하고 솔직하고 자애로운 여성이다. ...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친 남편의 나른한 신앙심을 회복시키는 헌신적인 아내를 이야기 했을 때, 그는 대부분의 독자들의 가정과 작업장이 여전히 한 지붕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응접실에서 벌어지는 고객과의 거래, 윗 층에 사는 도제의 상스러운 언어, 길모퉁이에 있는 술집의 왁자지껄함. 인접한 점포에서 들려오는 직공의 망치소리, 몇 블록 안에 있는 극장, 무도장, 그리고 그보다 나쁜 것들로 인해 붕괴되었다.


가족에 대한 복음주의 이상과 도시 사이의 이와 같은 모순은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민의 가정을 도시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종적인 동력을 제공했으며, 이것이 교외의 본질이다. 가족과 아이들로 구성되는 여성의 성스러운 세계를 세속적인 대도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가정과 작업장을 분리하더라도 남성은 일상적으로 업무를 볼 수 있어야 했고(열심히 일해 성공하는 것이 또한 복음주의의 미덕이었으므로), 사업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런던이라는 거대한 정보 중심지에 개인적으로 신속하게 접근해야 했다. (Robert Fishman. 1987. Bouregois Utopias : The Rise and Fall of Suburbia. 박영한․구동회 역. 2000. <부르주아 유토피아 : 교외의 사회사>. 한울. pp. 53-57)


4.

다음으로는 E. P. Thompson의 유명한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 나오는 윌버포스를 보자.


1790년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자꼬뱅주의가 영국에 도입되고, 노동자들이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자(당시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가장 대중적 이론인 토마스 페인의 저서이름이기도 하다), 많은 윌버포스의 동료들은 그에게 이러한 잘못된 ‘평등’이라는 사상이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다는 우려 섞인 편지를 보냈다. 이에 윌버포스도 큰 우려를 나타냈다 그리고 E. P. Thompson에 의하면 이 시기 중간계급은 노동자들이 <인간의 권리>를 읽는 것에 대하여 ‘기겁’을 하였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윌버포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노예를 해방하되, <인간의 권리>에는 반대한다? 단순히 개인적인 의견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분위기를 사회적인 영향력으로 확대하였다? 왜 이런 모순이 등장했을까?


앞서 언급된 그의 동료들의 이름을 보면, ‘낮은 자’를 위해 일한 윌버포스라면 같이 어울리기 힘든 이름이 등장한다. 에드먼드 버크이다. 에드먼드 버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다만, 지난 ‘잃어버린 10년’간 보수 신문이 촛불을 든 대중을, 노무현 정부를 비판할 때 그의 이론이 공공연히 활용되었고, 천박하고 무식한 대중의 정치에 대한 참여를 비판하고 엘리트들에 대한 신뢰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고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열기가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전이되어 이들이 ‘자유, 평등, 박애’같은 개념을 주장하자, 이러한 주장들이 “인간의 권리에 대한 그들의 이론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어서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며 반박했다. 그 본성이란 부패한 귀족층의 도덕적 본성이 아니라 민중의, 곧 ‘돼지 같은 떼거리’의 본성이었다. 버크와 윌버포스는 정치적으로도 동지였을 뿐 아니라, 주일학교협회, 빈민상태 개선협회, 악덕퇴치 종교부흥협회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함께하고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니 ‘낮은 자’를 위해 일했다는 기독교적 추상적 용어를 쓰기가 애매해진다. 인권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어려워진다. 노예는 해방하려 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혐오한 윌버포스. 노예는 해방하면서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반대한 윌버포스. 이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5.

의외로 논리는 간단하다. 윌버포스에게는 노예도, 노동자도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이유는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돼지 같은 떼거리’의 본성 때문이다. 그러한 본성을 갖고 있는 한, 극장, 무도회, 음악회, 카드놀이, 거리축제, 술집, 무도장, 유원지 등에 빠져 있는 한,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돼지 같은 떼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돼지 떼’도 인간이 될 수 있다. 방법은 “온화하고 다감하고, 생기있고 정숙한 여성이며, 교육의 측면에서 우아하고 지적이고 개화된 여성이며, 종교적 측면에서 독실하고 겸손하고 솔직하고 자애로운 여성”이 꾸리는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 종교적으로 독실하고 근면하고 겸손하고 지혜롭고 지적인 삶을 살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정의 부를 축적하고 생활수준을 높이면 된다. 그러고 나면 ‘인간’이 된다. 그러기 전에는 ‘인간’이 아니며, 그들에게 주어져야 할 인간으로써의 권리는 없다. 다만 인간이 될 기회는 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되고나면 권리도 갖는 것이다.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 그것은 노예들에게 인간으로써의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노예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될 기회를 주지 않고 방기하는 것이 윌버포스에게 문제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논리이자 선교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전의 청교도주의와 복음주의가 차별화되는 지점은, ‘선교사’들이 나타나 ‘어느 누구나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설교하는 데 있다. 이전에는 어느 누구나 주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 선택받은 자의 문제였고, 선택받은 자라도 층위가 다 달랐다. 이전에는 선교하지 않았다. 지역 사회를 관장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주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 즉 ‘빈곤’과 ‘타락’이라는 두 단어로 정의되거나 ‘노동자’라는 한 단어로 정의되는 그들에게 이제 ‘주의 자녀’가 되는 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주의 자녀가 되는 길은 물론 회개하고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살았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중심은 바뀌지 않은 채, 주변부를 포섭하는 전략이 복음주의의 논리인 것이다.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방법론자(methodist)’들인 것은 ‘주의 자녀 됨’을 행위를 통해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민중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민중주의자가 아니다. 민중들과 함께 있다고 민중친화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사학계가 자주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중요한 것은 중심-주변의 문제설정, 인간-비인간의 문제설정이다.


이것은 또한 제국과 식민의 논리이기도 하다. 제국과 식민의 ‘본질’은 물론 수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인간’, ‘문화’, ‘사회’ 등의 개념이 새롭게 정의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정당화의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개념들이 식민지 인민들에게 적용되었을 때 식민지 인민들은 ‘야만’, ‘미개’, ‘원시’ 등의 언어로 표현된다. 아직 인간이 아닌 것이다. 식민지 조선으로 옮겨와 보자면, 1910년 이후 식민지 조선의 인민들에 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시세와 민도’이다. ‘얼마나 이들이 근대화 되었는지’에 따라 정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식민지 정책이 만드는 수많은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때마다 권력은 ‘시세와 민도’를 앞세웠다. 그들이 본 조선은 ‘야만’, ‘미개’, ‘원시’이었고, 그렇기에 ‘인간’으로써의 대접을 해주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다. 이들이 ‘인간’이 되는 길은 자신들과 동일하게 ‘황국신민’이 되는 길을 통해서이다. 중심을 바꾸지 않고, 주변부를 포섭해 나가는 전략인 것이다. 그래서 창씨개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근로동원, 징용, 징병 등 수많은 ‘황국신민’의 의무를 지운 후에야 조선인들에게 최소의 정치적 권리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자녀’와 ‘인간’(심지어는 황국신민)은 논리적으로 매우 닮아있다. 중심부, 제국, 서구의 주체와 같아지면 ‘인간’이 되고, 복음주의자들이 설정한 이상형과 같아지면 ‘주의 자녀’가 된다. 이러한 논리적 동형성은, 동인도 회사를 중심으로 한 항구무역형 식민지에서 무굴제국의 해체 및 내륙 진출을 통한 개발형 식민지로의 전환과 복음주의의 시작이 역사적으로 함께 이뤄지고, 제국의 최전성기와 선교의 최전성기가 함께 진행되었다는 역사적 동형성으로 드러난다.


<아바타>의 그 박사도 자신이 ‘인간’으로써의 중심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논리적 모순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결국 인간편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을 때, 주인공은 스스로 진짜 나비족이 되는 길을 택해야 했다.


6.

필요한 것은 제국, 식민, 서구의 ‘중심’을 벗어나는 일이다. 중심부를 ‘인간’으로, ‘근대’로, ‘정상’으로 간주 하는 한. 윌버포스가 보여준 모순은 끊이지 않고, 가시적․비가시적 폭력적 규율은 사라지지 않는다. 중심을 버리고 주변부를 향해 나아가거나, 새로운 중심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중심을 일단은 무너뜨리는 일이 필요하다. 지젝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이고, 들뢰즈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탈영토화가 될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식민지적 현실을 읽을 때 여전히 중심의 논리는 작동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식에 드러난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했지만, 이는 현실 앞에서 여전히 무력하다. 제3세계 저발전 국가를 보는 틀은 ‘근대화론’, ‘서구중심주의’, ‘사회진화론’이다. 이는 특히 선교에서 강력하다. ‘복음’을 들고 그들을 ‘주의 자녀’로 만들러 갈 때 선교사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들을 ‘주의 자녀’로 만드는 일이다. 현지인들은 ‘회개’ 하고 ‘새 삶’을 살아야 할 과제를 떠안지만, 선교사들은 ‘열심히’ 선교를 할 과제를 떠안는다. 요새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자본제국주의적 복음주의도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아이티 사태와 같은 절대빈곤의 문제 앞에서도 그러하다. 아이티를 비롯한 제3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은 독립의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시도를 했다. '중심‘의 논리에 접수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인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아보려는 시도들이 1950-60년대 아프리카에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모든 탈식민 국가들에게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국가들의 정치적 탄압이 문제이든, 국내 지도자들의 변질이 문제이든 간에 어떤 문제를 노정하고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안의 부재를 낳았고, 유일한 희망은 서구 국가들의 개발원조, 그리고 서구 국가들을 뒤따라가는 근대화로 보이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구 국가처럼 되기‘, ’서구인처럼 되기‘는 받아들여야 할 숙명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서구’, ‘근대’ 중심주의적 논의의 현실적 힘을 넘어 ‘탈중심화’된 탈식민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과 지적 긴장이 필요하다. 자폐적 복음주의를 한계를 넘어 탈중심화된 선교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과 지적 긴장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아직 그러한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해 아직은 확실한 답을 갖지 못하고 있다. 어렴풋이나마 전태일과 산업선교회의 활동에서 성문 밖 예수를 만나기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_마르셀(CAIROS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