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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종횡書해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방식과 제국의 방식” [오민용]

존 도미니크 크로산, <하나님과제국 >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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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하나님과 제국>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슬로건을 제시한다. 즉 “승리를 통한 평화”, “정의(사랑)를 통한 평화”, “죽음을 통한 평화”이다. 첫 번째 슬로건은 인간의 문명이 제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상주의, 유토피아, 종말론 또는 묵시록 그리고 마지막은 허무주의, 대학살, 전체주의, 테러리즘이 제시하는 슬로건1)이다. 크로산은 나름의 성경 분석을 통해 두 번째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크로산은 이 주장을 펼치기 위한 전제로서 ‘문명’이라는 용어를 신석기 혁명 시대에 형성된 제국적 욕구로 전제한다. 또한 특정한 조건과 기회를 지닌, 특정한 시간에 지역에서 되풀이해서 형성된 ‘문명의 폭력적 정상성’으로 제국을 이해한다.2) 즉 제국이라 함은 비약적 발전의 틈새에서 발현되는 폭력이 상시적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비폭력이라는 급진성이 문명의 폭력이라는 정상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과 문명의 정상성이 일관되게 하나님의 급진성이 부정하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며 나사렛 예수 안에 구현된 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급진성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3) 이 두개의 단이 크로산이 하나님과 제국에서 결론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바이며, 두 번째 단의 후문이 한 마디로 크로산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이 책의 주장이다.

 

2

국가적 차원의 승리, 평화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파병과 내전뿐만이 아니라 너무나도 부드럽게 개인에게 스며들었기에 개인적 차원의 언어인 ‘사랑 없는 경쟁’과 ‘반석 같은 안정’4)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다.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세계경제의 불안전성이 증폭되고 사회 각 분야의 급속한 양분화가 진행되는 시기의 한국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신석기 혁명 때처럼 급격한 발전의 번영하는 문화culture를 꿈꾸며 존재하는 인간을 경작cultivate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경작의 도구는 ‘인간존재의 시장화’와 ‘인간존재의 상품화’가 아닌가? 경작의 주체가 경작의 객체가 되어 버리고 이 객체화는 세분되어지는 계급 아닌 계급화, 소위 정규직과 비정규직화로 양분하는 것을 쟁기로 삼고 있지 않은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더 좋은 쟁기를 쥐어주는 하나님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아니. 정말 정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쟁기로 삼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정의는 그리스도인에게 기다림을 요구한다. 그러나 승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급진성5)을 선물한다. 급진성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수축’이다. 이런 시간의 수축은 인간이 더 많은 것을 향한 욕망에로의 도약을 위한 기본적 발판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서는 당연히 폭력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폭력성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의 단축, 파괴, 훼손, 멸절, 죽임 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 폭력성은 국가 단위 전쟁이나 개인 단위의 경쟁이나 모든 존재하는 것이 ‘시간의 수축’을 시도할 때 항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6) 다만 이러한 폭력성이 폭력성으로 감지되는 않는 것은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때 뿐이다. 그러나 대가가 모든 존재에 대한 억압과 폭력과 지배를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


3

여기서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주어진 언약을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은 그들의 시대에 끝나는 ‘시간의 수축’이 아니었음을 상기하자.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은 그 자손들과 자손들에게 이어진 ‘시간의 팽창’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시간의 팽창’의 끝은 하나님의 시간에서 일치하게 된다. ‘시간의 팽창’ 에서 ‘언약의 지속성’ 때문에 ‘존재의 확장(도약)’이 이루어진다. 이것을 ‘존재의 부활’이라고 칭할 수도 있고, ‘존재의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존재의 부활’은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육신의 부활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그 언약의 계승을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주어진 언약은 그들 자손을 통하여 존재함으로서 아브라함과 모세의 제한된 육체성과 유일성을 뛰어넘은 ‘언약의 진행형’이 되었다. 이 언약이 진행형으로 있을 때 존재는 부활하게 된다. 즉 이 진행형 속에서 처음의 존재인 아브라함과 모세는 폐기되지 아니하고 언약의 당사자로서 현재-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시간의 팽창’에서 이루어진 ‘존재의 확장(도약)’은 유비적 표현으로서 ‘존재의 “부활”’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존재의 구원’은 ‘존재의 부활’이 유일성과 육체성을 벗어나게 됨으로서 ‘시간의 수축’을 벗어나 ‘시간의 팽창’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구원의 본래적 의미가 죄에서 우리를 이끌어 냄이라는 항구성이라면, ‘시간의 팽창’에서 이루어진 ‘존재의 확장(도약)’은 하나님의 시간 안의 언약의 동질성에 살아있는 현재-존재함을 유비적인 표현으로서 ‘존재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7)


그리스도인이 정의(사랑)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완성 되는 시점은 ‘하나님의 시간Kairos (καιρός)’ 이다. 카이로스의 기다림은 ‘시간의 수축’을 본질로 하는 모든 폭력성의 급진성과 대척점에 서 있다. 이 기다림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카이로스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 사이에 있다. 이 믿음과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정의(사랑)을 통한 평화”에 다가갈 수 없다. 그리고 이 믿음과 소망 사이에 사랑이 있다. 즉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요소에 관하여, 믿음으로 소망을 엮고, 사랑으로 풀어내는 그리스도인만이 “승리를 통한 평화”라는 “문명의 폭력적 정상성”으로부터 “정의(사랑)를 통한 평화”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무능력한 정적인 순간이 아니라 ‘존재의 확장(도약)’을 통한 ‘존재의 부활’이며 ‘존재의 구원’의 시간이며 동적인 순간이다._오민용(CAIROS 연구원)




2) 위의 책. p. 62.


3) 위의 책. p. 372.


4) 예수님이 반석이라 고백하며 교육, 직장, 자산 등에서의 승리를 반석 삼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5) 여기서의 급진성은 크로산이 말한 문명의 폭력의 정상성과 대비되는 비폭력적인 하나님의 급진성이 아니다.


6) 우리가 말하는 모든 문명은 발전을 이야기 하며 문명이라 이름 붙이는 모든 발전은 ‘시간의 수축’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7) 그러나 이와 같은 ‘존재의 구원’과 ‘존재의 부활’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시간의 팽창’끝점에서 일치를 갖기 때문에 영원성을 본질로 하는 진정한 구원과 부활은 아니다. 즉 언약 속에서 존재하는 일시적인 것이다. ‘존재의 구원’, ‘존재의 부활’, ‘시간의 수축’, ‘시간의 팽창’은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글에서 만들어낸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