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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종횡書해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 [설희]

관리되는 감정과 그것을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엘리 록셀 혹실드, <감정노동> 서평 
 

 
어느 남자가 하품을 하고 마치 잠자리에 들 준비가 된 것처럼 팔을 쭉 뻗으면서 무대 중앙에 등장한다. 그 남자는 모자를 벗어서 천천히 상상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 나서 가발을 벗는다. 천천히 안경을 벗고 안경에 눌린 콧날을 마사지한다. 그리고 나면 코를 떼어낸다. 그리고 이를 뺀다. 마침내 미소를 풀어버리고 누워서 잠이 든다. 이 남자는 마침내 ‘자신’이 된 것이다.
 
-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브로드웨이 가에서 즉흥적으로 공연된 
<관재인The Committee>이라는 연극에서, 284쪽.
 
 

<<감정노동(원제 The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n Human of feeling)>>은 1983년 초판이 나온 뒤 지금까지 감정노동과 관련된 논의를 이끌어온 책으로, 사회학자인 앨리 러셀 혹실드가 세계 최대 항공사인 델타 항공의 임원과 승무원을 대상으로 인터뷰와 참여관찰을 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감정노동’이라는 것을 최초로 개념화 하며 작성된 보고서이다. 여기에는 노동조합 관계자, 성 문제 치료 전문가, 연수센터 강사 등 여러 부류의 관련자들과 다양한 직업에서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난 결과들 또한 전하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되면서 ‘감정노동자’, ‘감정 관리’, ‘감정 체계’, ‘감정 프롤레타리아트’ 등 여러 신조어가 탄생했으며, 미국사회학회에서는 감정사회학 분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소는 여러분의 자산, 진심으로 활짝 웃으세요!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은 배우가 연기를 하듯 원래 감정을 숨긴 채(내면 행위) 직업상 다른 얼굴 표정과 몸짓을 하는 것(표면 행위)을 말한다. 감정노동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며 고객의 만족(생산물)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한껏 고무시키고 피로감이나 짜증 등은 억제하게 한다. 감정은 잘 관리되어야 하며 심지어 ‘자연스럽게’ 보여저야만 한다. 서비스를 제공할 때의 노동자의 감정상태도 서비스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 관리 기술들 덕에 서비스의 ‘진정성’은 확보된다. 아니다. 진성성의 의미는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노동자의 ‘진심어리고’ 따뜻한 미소는 회사의 자산이 되어간다. 또한 미소와 서비스라는 상품은 소비자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저 사람들은 친절해야 돼, 그게 저 사람들의 직업이니까”. “왜 당신은 웃지 않지요?” 그리고 <고객의 소리>라는 감시체제 말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니까 이야기가 그렇게 된다.


임금을 받고 판매되는 교환가치로서의 감정노동은, 감정을 사용하던 개인적인 방식의 변형, 즉 ‘감정 체계’의 변형을 필연적으로 가져오게 한다. 이것은 감정에 관해 적극적으로 도구적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제는 대기업이 이러한 개인의 거리 두기를 구성하고 조종한다는 말이 된다. 개인적 차원의 감정교환의 요소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고 행위자의 ‘감정 기억’을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우리 모두는 종종 우리가 가진 환상 때문에라도 어떤 감정을 느끼려고 애쓰거나 혹은, 돌발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를 몰라 난감했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우리가 내재적이라고 여기던 감정들은 이렇듯 언제나 ‘사회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맡은 사회적 배역에 따라 감정을 드러내고 사건을 받아들이고 또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제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권위가 시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여성의 ‘서비스’는 누군가의 ‘만족’을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착취당하게 된다.

 
주변 세계를 해석하는 중요한 수단(실마리)으로서의 감정

혹필드는 프로이트가 불안의 감정에서 사용한 ‘신호 기능’을 모든 감정으로 확대하여 적용하였다. 사적 차원의 감정 관리가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임금을 위한 감정노동으로 변형될 때 손상되는 것으로서 이 신호 기능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지점인데, 감정은 현실의 자기타당성self-relevance을 구별해주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인지부조화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감정 부조화는, 인간적 비용의 지불이라는 새로운 딜레마를 남긴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에 거리를 취하는 방식을 혹필드는 책에서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었다.(236) 첫째는, 노동자가 일에 너무 온힘을 다해 몰두하는 경우로 그 결과는 쇠진burnout과 감정적 마비의 위험이 있다. 둘째는 노동자가 일과 자신을 명확하게 구별하면서 쇠진에 따르는 고생을 덜 하는 경우다. 그렇지만 노동자는 이렇게 정확하게 구별을 하는 자신을 원망하거나 ‘진심이 아닌 행위자에 불과하다’고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셋째는 이 노동자가 자신의 행위와 자신을 구별하면서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직업이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요구한다고 인식하는 경우다. 이 노동자의 경우에는 행위 전체에서 소외될 수 있는 위험이 있고, 행위에 관해 냉소할 위험(“우리는 그저 환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일 뿐이다”)이 있다.
 

쇠진의 예방책으로 많은 노동자들은 자아와 맡은 바 배역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건전한’ 소외를 발전시켰다고 파악한다. 연기하는 기술과 감정에 일치하지 않는 고백을 하는 기술은 새로운 기회가 가져다 주는 이득을 취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이다. ‘정직한’ 영혼과 ‘진지함’은 바보로 여겨지게 되고 표면 행위의 기술은 점점 쓸모 있는 도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표현과 감정에서 소외되고 감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서 소외되는 것이 단순히 몇 사람이 경험하는 산업 재해 정도로 해석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한다. 그리고 교활함을 기업적으로 사용하고 유지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감정을 훈련하는 것, 즉 마음이 관리되면 될수록 우리가 관리되지 않은 마음에 더욱 가치를 두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교류분석을 대중화한 두 전문가의 표현을 빌어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느끼고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루소의 ‘고결한 야만인’과 같은 종류의 사람을 “승자”라고 표현하며 되살려야할 가치로서의 자발성과 그들을 연관짓는다. 정확히 말해서는 그들의 감정은 자아를 정의하는 방식에 관한 시장의 개입과 그 개입이 어떻게 확장되고 자기 자신을 조직하는가 하는 문제설정에 대해 귀중한 자원이 된다. 세계와 자아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감정에 붙이는 이름은 작위적이고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은 문화가 어떻게 그것에 영향을 주는지, 세상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때그때 새로이 붙잡게 된 그 현실을 담아 보내는 것이 된다. 우리가 이름붙인 감정의 다양성은 초점 이동의 결과이다. 우리는 같은 사건에 관해 분노를 느낄 수도 있고,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고, 불만스러울 수도 있고, 이런 감정을 모두 느낄 수 있다.


혹필드는 내면화intermalization와는 다른 이러한 감정의 법칙과 감정관리에 미시적 정치의 힘이 개입 혹은 산출될 것 수 있다고 말한다. 혹필드의 작업은 '진정한 자아찾기' 류의 이론들과는 구분되는 것이며, 또한 기존의 연구들이, 감정이라는 주제를 관례적으로 무시하여 다른 범주 아래 포함시키거나, 감정을 논의하는 것을 피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상황에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상호작용론적 전통의 듀이와 게르트, 밀스 그리고 고프만의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감정에 관련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느낌에 관련된 일에 느낌이 파고들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다윈과 유기체론적 전통의 바탕으로, 그는 파고들 수 없는, 행위에 대한 감각, 즉 행위의 지향과 연관되어 있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감각을 상정한다. 그리고 끝으로 프로이트를 통해 감정의 신호기능에 관한 분석을 거쳐 사회적 요인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 따라서 감정이 ‘알려주는’ 것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되짚어 보고 있다.
 

나가며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는 이 책에서 조명되어진 감정노동자 승무원의 처지와 같다. 사람들을 대면해야 하는 직업들이 세분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동성들도 증가되어 가고 있다. 경험적으로는, 좌/우 진영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감정언어들과 표현들, 소위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에서도 기대되는 감정과 그것과 관련된 감정언어들이 보기좋게(?) 갈라지는 것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혹은, 목사이고 전도사이고 사모이고 선교사이고, 교회(청년부) 임원이고 소그룹 리더이고 새가족(새신자)부 리더이고, 찬양인도자이기 때문에 가져야만 했던 미소와 감정과 태도들 속에서도 우리는 혹시 그 소외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감정이 알려주고 있는 신호들에 귀기울여 보자. 아무리 우리 사이에 ‘환상’과 ‘냉소’가 미덕이 되었다 할지라도 말이다._설희(CAIROS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