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콘텐츠/사이-be-評

대학 자퇴. 오늘의 분신. [박치현]

속물의 시대 한복판에 출현한 진정성


고려대 경영대 학생이 자퇴와 함께 남긴 대자보가 화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자퇴야 언제나 있던 일인데 "왜 자퇴라는 사실이 이렇게 주목을 받는가"이다. 단순히 대자보를 썼기 때문에, 그리고 대자보의 내용이 호소력 있어서일까?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나는 이번 자퇴가 한국사회 시스템의 모순에 대한 새로운 저항의 형식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자보의 내용은 현재 많은 대학생들이 느끼는 현실을 적확하게 짚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가 되었다." 하지만 대학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당연히 대자보가 제시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온 것이 사실이다.


다른 글에서 지적했듯이, 이건희가 고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학위수여를 저지했던 대학생들 때문에 대학본부 처장들이 사퇴한답시고 쇼를 한 적이 있었다. 이건 90년대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생들이 기업주에게 항의할 수도 있는거지 하고 넘어갔을 사안이다. (고려대 이건희 철학박사 수여사태를 돌아봄http://blog.daum.net/ursangelus/8484495)


출처: 오마이뉴스


이렇듯 자퇴도 있어왔던 일이고, 대자보에 적시된 내용도 다들 아는 내용이다. 사실 등록금 문제로 자살한 대학생 문제가 훨씬 더 극적이고 충격적이지 않은가? 등록금 문제로 자살했던 수많은 대학생들의 죽음에도 별다른 큰 반응이 없던 한국사회가 이번만큼은 큰 반향을 일으키는 듯하다. 이건희 사태때, 반대하던 학생들은 "대학은 성스러운 상아탑, 진리의 전당"이라는 전제를 갖고 이건희를 막았다. 이후, 대학본부 처장들의 행태는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하청업체"라고 고해성사하는 꼴이었다.(그리고 이 학교 출신 대통령은 위의 명제의 진리를 확증하셨다.)


내가 알기로는 위에서 말한 이건희 박사수여 사태 이후로, 출교된 고대생 문제가 불거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 출교생들은 출교가 부당하다면서 싸웠다. 즉 복교를 위해서.. 왜? 일단은 출교가 부당하기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대학은 상아탑이어야 하며 진리의 전당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깔린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저항을 하려해도 좋은 대학을 나온 명망가가 되어야 하지 않나? 80년대 엄혹한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당한 운동권386들은 이후 많은 이들이 복학해서 학교를 무사히 마쳤다. 나 자신도 대학 다닐 때 대학은 그래도 바깥 세상보다는 때가 덜 묻은, 일종의 '성스러운'장소라고 자연스럽게 믿었던 적이 있다.


그간 모든 대학에 대한 저항이, 과거식의 "대학이 성스러운 곳"이라는 전제 하에 놓여있지 않았는가? 386들의 복학은 진리의 상아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몸짓이었다. 이건희 사태의 경우, 현실이 된 대학의 기업하청업체화라는 현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다들 "대학은 좀 달라야 한다"는 요구를 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자퇴 대자보는 차이가 있다. 대학은 이미 사회의 '속물화'를 가속화시키는 자격증브로커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폭로하면서, 무엇보다 자신에게 '가해'를 했다는데 차이가 있다. "자신의 발등을 도끼로 찍은 것이다." 다시 말해 자살 행위다. 이 학생이 명문대생이기에 그녀의 몸짓은 더욱 호소력을 갖는 듯하다.(물론 지독한 한국의 학벌주의가 결국 이 학생을 '고대'자퇴생으로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학생운동은 하더라도 졸업은 해야하지 않는가, 아니 학생이어야 학생운동을 할 것 아닌가…


속물들로 가득찬, 속물체제로 변해버린 한국사회에서, 이 학생은 속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진정성'을 추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자퇴는 기존의 등록금투쟁과는 차원이 한참이나 다르다. 등록금투쟁이 어쨌든 대학체제를 일정정도 승인한 전제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자퇴는 (돈이 없어서 한 자퇴가 아니라, 신념에 의한 자퇴라면) 대학체제를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저항들이 지배체제에 대해 여러가지 요구들을 하는 히스테리적인 몸짓이라면 자퇴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하는, 즉 '자신을 죽임'으로써 체제를 부정하는 자유로운 선택 행위인 것이다. 지금처럼 청년세대의 고통이 '개인화'되어 있는 상황에선 이렇듯 '개인의 결단'이 더욱 의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다. 이 학생의 자퇴는 독재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80년대 대학생들이 행한 분신자살에 맞먹는 행위라고. 지금 같은 스펙사회에서 명문대 자퇴는 그야말로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보같아 보이는 이런 행위가(전태일의 분신을 떠올리면 된다) 세상을 바꾸어왔다는 것을 우리는 어쨌든 '상식으로' '머리로' 알고 있다.


등록금이 싸져도 우리는 여전히 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대학, 기업보다 더 기업적인 대학에서 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대학의 수많은 문제점이 그저 덮여진다. 하지만 자퇴는 대학의 타락을 근본적으로 지적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분신자살의 충격(사람들은 분신자살을 보면서, 왜 멀쩡한 대학생들이 죽는 걸까, 쟤네들이 미친 게 아니라면 독재정권이 잘못된 것일 텐데라는 질문에 부딪혔다)처럼 우리는 충격을 받는 것이다.(왜 멀쩡한 고대생이 자퇴하는 걸까. 걔가 미친 게 아니라면 대학이 잘못된 것일 텐데...)_박치현(CAIROS 연구원)



고려대학교 학생의 자퇴선언 대자보 내용 전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다리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우리들의 다른 길은 이것 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나는 25년간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큰 배움없는 '大學 없는 대학'에서 우리 20대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자기 손으로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대학을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은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겐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생각한대로 말하고 말한대로 행동하고 행동한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두고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