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십원 헌법~!(응?)
유독 최근들어 20년넘게 남한사회를 지탱해온 현행 헌법체계에 대한 다양한 개정논의들이 봇물터지듯 넘쳐나고 있다. 물론 문제를 제기하는 세력들도 다들 제각각이고 의도들도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결국 이런 논의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는 어쩌면 현행 헌법이 그만큼 불안한 기초위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시점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87년 헌법이 사실상 군부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정권을 한번씩 주거니 받거니 한 상황에서 이런 논의들이 나오는 것은 이런 불안한 동거체제에 균열이 심해지고 그 두 세력을 봉합하기에는 현재의 헌법체계가 현실적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는 시점에 다다랐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권력구조개편이나 지방분권, 통일이후의 국가구조 등 다양한 관점에서 헌법개정이라는 문제에 다들 제각각 접근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리고 제1순위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결국 "국민기본권"의 관점에서 현재의 헌법이 얼마나 시대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느냐일 것이다. 기본권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더 적극적인 기본권의 보장이 가능한 헌법으로 개정되어 가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방향일 것이다.
납세의 의무와 양심적 납세거부?
대한민국헌법만 놓고 보면 그리 문제제기할 만한 부분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나마 성숙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국가들의 헌법과 비교해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헌법도 많은 한계점들을 드러낸 그 중 하나가 소위 "국민의 의무"라는 규정이다. 대한민국헌법은 "국방,납세,교육,근로,환경보전"의 5가지 의무를 논하고 있는데 사실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는 헌법에서 국민의 의무를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기형적인 발상일 수도 있다. 그 보완책으로 교육이나 근로의 경우에는 의무에 대응되는 권리를 규정하고 있지만 나머지 3가지 의무의 경우에는 한 쌍을 이루는 권리규정은 사실상 없다. 최근 들어 상당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국방의 의무에 대한 상대쌍으로서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의무만을 규정하고 여하한의 선택권을 보장하지 않는 폐쇄적인 구조속에서는 "비양심적 병역회피"는 암묵적으로 용인되나 "양심적 병역거부"는 철저하게 처벌받는 기형적 구조를 낳고 있지 않는가. 이 와중에서 언젠가 병역거부권을 반대하는 인사가 무심코 내뱉은 일갈은 오히려 새로운 상상력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어느 좌빨도 함부로 열어보지 못했던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주신 그분에게 조세범처벌법상의 적절한 보상이 없다면 아마 앞으로 이에 대한 논의는 봇물터지듯 터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흐믓한 상상을 해본다.
탈세와 조세회피와 납세거부
납세거부에 대한 문제제기가 사실은 그리 생소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가깝게는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에 의해 군비상당액에 상응하는 납세거부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참여정부시기에는 서울의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종합부동산세를 거부하자는 논의들도 심심찮게 나왔었다. 2 성서에서도 예수와 종교지도자들사이에서 로마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문제로 미묘한 신경전이 오갔던 점 3을 감안한다면, 나름대로 상당히 역사가 깊은 논의라 할 수 있다. 4
납세거부의 문제를 제기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은 결국 과세형평성의 문제이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병역거부자 대 병역이행자의 대결구도로 그 논의를 몰아갈 경우 자칫 논의 자체가 산으로 가버릴 공산이 크듯이 납세거부를 탈세나 조세회피와 같은 수준의 것으로 몰아가버리면 모든 논의는 원천봉쇄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납세거부를 이야기 할 땐 우선 조세부담을 줄이는 다양한 행위들과의 엄격한 구별을 할 필요가 있다. "탈세"는 경제적 목적으로 법에서 규정하는 경제행위에 대응하는 납세의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똑같은 경제행위를 하면서 납세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다른 납세자와의 세부담의 차이를 가져오는 행위를 말한다. 반면 "조세회피"는 세금을 줄이려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결과로서 납세의무를 가져오는 특정한 경제행위를 원천적으로 회피하고 세금부담을 낳지 않거나 줄이는 다른 경제행위로 옮겨타는 합법적 행위이다. 반면 "납세거부"는 특정한 정치적,정책적,사회적 목적때문에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납세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행위이다. 사실 이런 목적들은 경제적 행위에 비해 상당히 주관적인 성격을 띈다. 그래서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대한 대중적 선전이 필요하며, 거부하는 납세부분과 정치적 목적간의 연관관계를 입증하는 것도 필요하다. 납세거부는 엄연히 양심에 기반한 행위이므로 기본권의 논의에 함께 되어야 하지만 다른 납세자다수의 반대 등을 감안할 때 쉽지 않은 문제임은 사실이다. 납세거부가 제도화 되려면 납세거부가 탈세와 명백하게 구분되는 객관적인 요건들을 입증해야 하고 또한 탈세가 필연적으로 낳게 되는 다른 '선의의 납세자'와의 과세형평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공공정책에 대한 화폐적 압박이 필요
납세거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공공재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공공재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일반 재화나 용역과는 달리 가격부담여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사회적 서비스이므로 공공재의 소비와 그에 상응하는 대가의 지불은 그 연결고리가 다소 모호하다. 물론 내가 세금을 부담하지 않아도 공공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내가 아무리 세금을 많이 부담해도 공공재의 수준은 그와는 무관하게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결정될 뿐이다. 즉 내가 낸 세금이 내가 원하지 않는 공공재에 쓰인다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공공재결정의 일방성에도 불구하고 납세거부를 통해 이를 제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세입과 세출이 완전히 분리되어 의사결정이 되므로 공공재를 제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문제는 이 정치적 과정이라는 것이 상당히 경직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5년에 딱 하루만 보장되는 투표권, 그것도 가장 많은 득표수만 인정되고 나머지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려 5년간의 침묵을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현재의 민주적 투표제도는 상당히 비민주적 특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렇게 결정된 최다득표자의 의사결정은 이 후에는 위에서부터 조직적으로 구체화되어 일방적으로 관철되기 쉽고 다수의 국민들은 그 정책을 일일히 반대하는데 드는 개별적 비용부담을 꺼려 결국 5년간 일방적인 공공정책에 끌려다니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결국 납세거부는 "공공재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느냐"의 문제가 논점이 아니라 "어떤 공공재를 공급할 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중심주제가 된다. 예를 들어 필수불가결한 국토방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재라면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그 국방력이 공공재라는 허울을 쓰고 타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거나 경제적 영향력을 가하려는 목적으로 악용된다면, 의회에서 더 나아가 거리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는 압력행사가 불충분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납세거부는 근본적으로 공공재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의사결정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일방적으로 규정된 공공정책에 화폐적 압박을 가하고자 하는 고민이다.
정치자금 세액공제를 통한 납세거부권
바로 이 제도!
이 방법이 효과적인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던 일본의 사례에서 맞닥뜨렸던 두가지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첫째는 내가 내는 세금이 고스란히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정치자금으로 쓰임으로써 세입과 세출이 일치된다는 점이고 둘째로 단순히 지금의 공공정책을 반대하는 소극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대안적 공공정책을 입안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이 제안도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10만원이상의 소득세를 부담하는 사람이야 납세거부권이 10만원으로 제한되지만 문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10만원이하의 소득세를 부담하고 있다는 점이다. 면세점에 있는 상당수의 빈곤층들은 납세거부권을 전혀 행사할 수 없게 되고 결국 10만원이하에 있어서는 정책적 참여에 있어서 소득수준에 따라 일종의 지분권을 행사하는 효과를 낳고 만다. 결국 표에 의한 투표가 아닌 소득에 의한 투표가 되어버릴 가능성마저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소득세가 10만원이하인 사람들에게 소득세와 10만원과의 차액에 대한 일종의 정책결정쿠폰을 발급하는 방안도 고려해보면 어떨까 싶다. 즉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 10만원의 납세거부권은 행사할 수 있도록 금액을 보장하는 것이다. 정당에게 이 쿠폰을 기부하면 이 정당은 이 쿠폰에 상당하는 비율의 정부보조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국민들은 1년에 한번 정기적으로 납세선택권의 투표를 한다. 그리고 이 투표기간에 홍보해야 할 것은 정당에 대한 홍보이면서 동시에 그 정당이 내걸고 있는 정책적 이슈에 대한 홍보이다. 이렇게 투표권을 행사한 경우 해당 유권자가 어느 정당을 지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투표여부는 알수 있다. 투표권을 행사한 납세자는 그 투표권을 행사한 과세기간에 대한 종합소득세납부시 10만원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만일 투표권을 행사한 유권자로서 동시에 종합소득세납부금액이 7만원인 납세자라면 이사람은 7만원의 세액공제를 받고도 3만원의 납세선택쿠폰이 남게된다. 이 쿠폰은 차후에 발생할 세액에 대해 공제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하거나 아니면 특정한 기초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상품권으로 교환해준다. 결국 세금을 전혀 낼 것이 없는 사람들은 최소한 매년 10만원의 기본소득을 정책결정참여의 대가로 수령하게 된다. 선관위는 각 정당별로 이렇게 집계된 득표율에 비례하여 매년 각 정당에 보조금을 전달한다. 결과적으로 이 투표에서 "유권자=납세자=정당기부금기부자"가 된다.
논쟁의 여지도 있고 검증도 필요
사실 이 생각이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건 사실이다. 10만원이라는 한도가 적정한지, 적정하지 않다면 얼마정도가 좋을지, 그리고 공제세액을 곧바로 정당보조금으로 대응시킬지 아니면 투표율에 비례해서 대응시킬지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정당들이 쿠폰을 쟁탈하기 위한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점도 그렇고, 쿠폰을 두고 음성적으로 투표불참여를 대가로 거래하는 일도 비일비재해질 수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그런 쿠폰 거래를 양성화시키는 것이 예상치못했던 효율적 시장균형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공공재를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점도 의문의 여지가 있을수도 있다. 지금의 공공재생산수준보다 이 제도를 시행한 후의 공공재생산수준이 더 최적일지도 검증해보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민주주의가 의사결정의 "정책적 측면"과 조세납부의 "경제적 측면"을 너무 이원화시켜서 운영해온 측면이 있지는 않은가 라는 문제의식하에서, 이제는 이를 조화시킬 현실적 제도를 고민해봄직하지 않을까 싶었고 어쩌면 이런 식의 제도 운영이 이 둘의 한계를 메꿀 수 있지 않을까 싶다._남식(세무사, CAIROS 회원)
- 대체복무제에 대한 토론회에서 제성호 교수의 발언(한겨레21 2005.03.25) [본문으로]
- 1991년 걸프전 당시 다국적국지원을 위해 일본은 PKO(Peace Keeping Operation)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자위대 예산을 대상으로 한 납세자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김승국, “양심적인 군시비 납세거부운동사례”, 평화만들기 2002.11.12) 하지만 세금납부금액중에서 어느 정도의 금액이 자위대개편예산으로 쓰이는지를 논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 세입과 세출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관리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심지어는 강남구청은 공식 소식지를 통해 종부세를 납부하면 이의신청,행정소송 등의 정상적인 구제절차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처럼 알려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2005.12.05) [본문으로]
- 마르코의 복음서 12:13-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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