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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둘러싼 현대정치철학의 고민들-아감벤, 랑시에르, 발리바르의 인권론을 중심으로 -4


불화로서의 정치와 데모스의 권리로서 인권에 대한 랑시에르의 논의는 정치를 매우 좁은 영역으로 몰고 가고 광범위한 배제를 생산하는 신자유주의 권력과 투쟁을 촉발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정치는 근본적으로 적대의 정치라는 전통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맑스주의가 대표하는 적대의 정치에서 적대의 선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 그어졌다면,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적대의 선은 몫이 있는 자들과 몫이 없는 자들 사이에 그어진다. 이는 배제에 맞서는 봉기의 정치를 사유하는데 유효한 틀을 제공하나 동시에 봉기적 주체의 동맹논리와 봉기를 통해서 어떤 정치체를 구성할 것인가라는 구성의 기획에서는 별다른 참조점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랑시에르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불화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몫이 있는 자들의 합의의 밖에 있는 자들, 즉 불화/적대의 주체들인 데모스들(몫이 없는 자들의 총체)은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 정치가 본질적으로 불화에 의해서 규정된다면 데모스들 간의 정치는 어떤 것인가? 그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집단적인 정치주체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권리를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배제된 자들인 데모스는 서로 호혜적인 자들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불화로 정의된 정치의 주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 데모스를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이 아니라 집단적인 정치주체로 엮어내는가? 랑시에르에게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 없다. 다시 말해 그에게 구성의 정치에 대한 사유는 보이지 않는다.


배제에 저항하며 봉기하는 인민들을 집단적 정치주체로 결집시키는 원리를 해명하는 작업에 발리바르는 많은 참조점을 던져준다. 발리바르 역시 랑시에르와 유사하게 권리는 인민들 혹은 대중들이 봉기를 통하여 명목적인 것을 자신들에게 실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획득해 가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때 획득되는 권리는 인민/대중들을 구성하는 각 개인들 간의 상호 호혜성을 전제할 때 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인간의 권리는 인간들 서로 간의 상호적 권리인정이 있을 때에 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관개체적(trans-individual) 존재인 것이다.[각주:1] 이 관개체성이 권리를 구축하기 위해 봉기한 대중들 사이에서 상호 호혜성으로 작동될 수 있을 때 에만 그들은 권리의 집단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어떤 여자)도 외적인, 일방적 결정에 의해, 또는 시혜에 의해 자유롭거나 평등하게 될 수 없고-즉 해방될 수 없고- 오직 호혜적으로만, 상호 인정에 의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각주:2]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관개체성은 상호 호혜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발리바르는 이러한 상호 호혜성의 가능성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하 '권리선언')에서 제기된 '보편적 진리'에서 찾는다.[각주:3] 이 보편성은 '권리선언'에 나타난 두 가지 동일성 위에 구축되어 있다. 첫 번째 동일성은 인간과 시민의 즉각적 동일성이다. 발리바르에 의하면 권리선언의 내용은 인간과 시민을 결코 구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권리선언에 언표된 모든 권리는 시민들의 권리이자 모든 인간들의 권리라는 것이다. "「선언」을 다시 읽어보면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사이에 현실적으로 내용상의 어떤 편차도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즉 그 둘은 정확히 동일한 것들이다. 그 결과 적어도 그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리의 성격과 외연에 의해서 실천적으로 '정의되는'한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선언」의 목적이다-인간시민 사이에도 편차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각주:4] '권리선언'에 명시된 권리의 항목들은 인간들이 그 권리의 집단적 실천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권리이며, '권리선언' 자체가 그것을 목적으로 함으로, 모든 인간들은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시민-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생각이다.


두 번째 동일성은 평등과 자유의 동일성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평등자유'(égaliberté)라고 명명한다. "전적으로 실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역사적 발견은 그것들(평등과 자유-역자주) 외연들이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그것들의 양자가 현존하거나 부재하는 상황들은 필연적으로 같은 것들이라는 사실 말이다.[각주:5] 또는 자유의 (사실상의) 역사적 조건들은 평등의 (사실상의) 역사적 조건들과 정확히 같은 것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즉 자유 없는 평등은 불가능하고, 평등 없는 자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평등자유 테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한쪽을 정립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정립하고 강화해야하는 상호 전제적이며 상호 강화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평등자유는 따라서 무제약적이다."[각주:6]


이 두 가지 보편적 권리는 최종적으로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이 평등자유의 권리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획득은 상호 간의 권리승인에 의해, 즉 인민의 상호 해방의 행동을 필연적 조건으로 하여 가능하게 된다. 발리바르는 보편적 권리에 입각하여 그 권리를 무한히 확장해가는 정치를 '인권의 정치'라고 부른다. 인권의 정치는 불평등과 부자유에 대항하여 인민이 자기 해방을 위해 일으키는 집단적 봉기를 말한다.[각주:7] 그런데 이러한 봉기는 영속적이다. 왜냐하면 평등자유의 권리를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집단들, 아직 현실적인 시민이 되지 못한 대중들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들, 노동자들, 유색인종들, 성적 소수자들....이러한 목록은 끝이 없으며 이들이 시민으로서 평등자유를 누리기 위한 봉기는 영속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평등자유의 구체적인 내용이 영속적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비결정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권의 정치 역시 끝나지 않는 영속적 반복의 정치이다.[각주:8]_정정훈(CAIROS 연구원)


  1.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스피노자와 정치』, EJ Books, 2007 참조 [본문으로]
  2.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서관모, 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2007, p.33 ;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3.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윤소영 옮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에티엔 발리바르 외 지음, 윤소영 옮김,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 p.9-37 [본문으로]
  4. 같은 글, p.17 ; 강조는 원저자 [본문으로]
  5. 같은 글, p.21-22 [본문으로]
  6. 에티엔 발리바르, 서관모, 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p.32 [본문으로]
  7.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윤소영 옮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p.185 [본문으로]
  8.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윤소영 옮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에티엔 발리바르 외 지음, 윤소영 옮김,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 p.2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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