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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민중신학, 스피노자를 만나다

IV-1. <윤리학>: 공통-되기와 능동성으로의 이행

(1) 공통 개념

III장 1절에서 우리는 <윤리학>에 나타난 인간의 수동적 정념과 그에 따란 부적합한 관념, 즉 1종 인식의 문제를 다루었다. 인간은 자신이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참된 원인을 따라 고찰하지 못하며, 따라서 정념에 휘둘려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스피노자는 2종 인식, 즉 “공통개념”을 인간에게 열린 가능성으로 사유한다. 공통개념이란 무엇일까? <윤리학> 2부의 정리 37에서 40에서 스피노자는 공통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리 37. 모든 사물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에도 전체에도 공통적인 것은 어떤 개체의 본질도 형성하지 않는다.

정리38. 모든 것에 공통적이고 부분에도 그리고 전체에도 똑같이 있는 것은 적합하게 파악될 수밖에 없다.

정리 39. 인간 신체와 어떤 외부 신체에 공통적인 것, 이들에게 고유한 것, 이 물체의 전체에도 부분에도 똑같이 있는 것, 이것에 대한 관념은 정신 속에서 적합할 것이다.

정리 40. 정신 안에, 정신 안에 있는 적합한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모든 관념은 또한 적합하다.


즉, 공통개념이란 일차적으로는 어떤 하나의 개체에 귀속되지 않으며, 모든 개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말하며, 이차적으로는 각 개체들의 마주침 속에서 그 개체들 사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말한다. “모든 개체에 공통적인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II장의 「자연학 소론」(윤리학 2부 정리 13이하)에 대한 분석에서 살펴본 “운동과 정지의 관계”이다. 즉 모든 개체에 공통된 것이란, 그 개체들이 운동과 정지의 동역학적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사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차적인 공통개념들, 즉 각 개체들의 마주침 속에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개념 역시 개체들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속에서의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신체의 변용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공통개념은 상이한 개체를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수준에서 묶어주는 ‘추상 개념’이나 ‘보편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변용하며/되며 존재하고 있는 사태에 대한 인식이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하나 들어보자. 4거리의 횡단보도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있다.(각각 A와 B로 불러보자.)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면 A와 B는 은 멈추어 서고, 파란 불이 켜져 있으면 A와 B는 길을 건넌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사실은 신호등 앞에서 전혀 다른 인식을 갖고 서 있을 수 있다. A는 “빨간 불은 길을 건너지 말아야 하는 신호이고, 파란 불은 길을 건너야 하는 신호다.”라는 것만을 알고 있고, 거기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데 B는 교차로의 신호와 교통의 흐름을 관찰한다. 교차로는 고유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갖고 있다. 횡단보도를 지나는 차의 흐름이 중단되고, 횡단보도와 평행한 차도에서 차가 다니기 시작할 때, 횡단보도의 파란 불이 켜진다. 그는 언제 빨간 불이 켜지고, 파란 불이 켜지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A가 갖고 있는 관념이 1종 인식, 혹은 추상개념이라면, B가 갖고 있는 관념이 하나의 공통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신호등이 제대로 기능하는 한 두 사람은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고장났다면? 그래서 여전히 횡단보도를 지나는 차가 다니고 있는데 파란불이 켜진다면? B는 차량의 흐름을 보고 자신의 신체를 보존할 것이지만, 교차로에서 사람과 차가 움직이는 원인을 알지 못하는 A는 사고를 당하여 신체의 활동능력이 저해될 것이다.


비보호 우회전을 하고 있는 일본의 교차로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2종 인식이 혼동되고 부적합한 1종 인식을 넘어서는 적합한 관념이라고 말한다.(정리 39) 그리고 적합한 관념은 또 다른 적합한 관념을 낳으면서, 지속적인 적합한 관념들의 계열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정리 40) 이러한 공통 개념 속에서 우리는 무능력한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 능동성으로 이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2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러한 공통 개념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논리적 적용의 질서에 그치고 있다.1) 우리는 아직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공통개념을 가질 수 있는 지,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는 1종 인식에서 2종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놀랍게도, 인간의 무능력이 전개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능력의 전개의 가능성 역시 찾고 있다. 즉, 여전히 ‘정념’과 ‘코나투스’가 관건이다.


(2) 정서모방과 사회적 관계의 형성

스피노자는 인식이 곧 해방의 전략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서로 고찰되는 한에서 수동적 정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선과 악의 참다운 인식은 그것이 참인 한에서라도 어떠한 정서를 억제할 수는 없고, 그것을 정서로 고려하는 한에서만 정서를 억제할 수 있다. (<윤리학> 4부 정리 14)


인식은 어떻게 정서와 연관되는가?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관념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은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관념이므로(신체와 정신의 평행론, III장 1절 참조), 우리가 소유하는 관념의 대상은 우리 신체의 변용과 같다.2) 그리고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 곧 정서이므로 모든 인간 신체의 변용에는 필연적으로 정서가 뒤따른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표상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 동반되는 정서 역시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이란 단지 규범적이고 인식론적인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한 개체의 정서의 방향 - 능력의 증대에 의한 기쁨, 능력의 감소에 의한 슬픔 - 과 그것이 낳는 변용의 능동과 수동의 차원에서 우리는 적합함과 부적합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것은 개인만을 고려한 일반론에 불과하다.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혹은 사회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서로와 마주치며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오리라고 우리들이 상상하는 모든 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며, […] 슬픔을 가져오리라고 상상하는 모든 것은 멀리하거나 파괴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가?3) 스피노자는 이것의 근거를 “정서들의 모방”에서 찾고 있다.4)


 인간 상호관계의 궁극적 토대인 이 정서모방 기제는 3부의 정리 27에서 처음 등장한다. 정리 27 이전까지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개체’와 ‘외부의 대상’이라는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전개 된다. 즉 개체는 일단 독립된 개체로 간주되고, 그가 겪는 슬픔과 기쁨의 여러 정서들 - 사랑, 미움, 희망, 공포 등 - 이 정리 26까지의 내용을 채운다. 그런데 정리 27에 이르러서 상황은 달라진다. 


만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그리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것이 어떤 정서에 자극되는 것을 우리들이 상상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유사한 정서에 자극된다.

 

여기에서는 정서와 대상이 주체와 대상,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정서와 대상의 직접적인 관계는 해체된다.5) 우리가 직접 어떤 대상에 대한 정서를 겪지 않고서도, 우리와 비슷한 어떤 것이 이 대상에 대한 정서들을 겪게 되거나 그것이 그러한 정서들을 겪는다고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그 것과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되는 메커니즘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정서들의 일차적 생산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실재들과 맺는 모방적 관계”6)가 된다. 이것은 정서적 관계에서 탈주체적이고 탈자아적인 효과를 산출한다. 정서모방은 의식 이전의 것이며, 오히려 여기에서 인간의 인식들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론>의 “인간의 자연권이 단지 개개인만의 것으로, 그리고 개개인의 힘으로 결정되는 동안은 없는 것과 같고,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공상 속에 존재한다.”7)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사회성의 기초를 각 개인의 독립성에서 찾는 홉스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인간은 사회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주체와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상호관계는 인간들의 관계망이라는 공통적인 것(혹은 관개체성)과 정서의 모방에 먼저 기초한다. 우리가 다른 인간의 감정을 상상할 때 우리의 신체는 그 감정에 상응하는 운동으로 자극되어 곧 그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조건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서들의 연관 속에서 우리 자신의 개체를 지키며 실존하려 한다. 이러한 정서들의 모방 속에서 나타나는 합치의 힘은 암비시오ambitio8)라는 정서를 통해 설명된다. 암비시오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을 피하려는 노력”9)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나의 이익이나 명예를 추구하려는 노력과는 다른 것이다. 정서의 모방 관계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기쁘게 하는 함으로써 잘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암비시오는 객관적인 정서이며, 코나투스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암비시오만으로는 다중의 합력을 통한 능력의 상승이라는 귀결이 도출되어 나오진 않는다. 우리가 III장에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을 통해 살펴본 수동적 정념에 의한 사회상태들 역시 이 암비시오로부터 나온 것이다. 3부 정리 31과 그 보충은 암비시오가 오히려 갈등과 미움을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리 31. 만일 우리 자신이 사랑하거나 욕구하거나 증오하는 것을 어떤 사람이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증오하는 것을 표상한다면, 그로 인하여 우리는 그것을 한층 더 지속적으로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증오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혐오하는 것을 또는 그 반대를 표상한다면, 우리는 심정의 동요를 받을 것이다.

보충. […] 모든 사람은 본성상 타인을 자기들의 의향에 따라서 살기를 욕구한다는 것을 안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똑같이 열망함으로, 모든 사람은 서로에 대해 똑같이 장애물이 되며,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거나 사랑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정서모방을 통한 인간관계의 모습 속에서 기쁨의 정서와 능동적 변용이 곧장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능력들의 합치를 통한 기쁨과 능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3) 기쁨의 정서와 능동적 변용

코나투스와 암비시오 개념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처해 있는 이중적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전하려고 한다.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III장 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외부의 것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우리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을 주로 갖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암비시오를 통한 사회적 관계의 형성은 능력의 합치로 나아가지 못하고 종종 미움과 증오의 변용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기쁨에서 생겨난 욕망이 슬픔에서 생겨난 욕망보다 강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의 힘은 인간의 능력과 동시에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해 정의되지만,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의 힘은 오직 (개별)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이다.”10) 쉽게 말하면 인간이 다른 신체와 만나서 능력을 확장함으로써 기쁨의 정서가 생겨나고, 이것은 당연히 다른 신체와의 합체에 실패하고 능력이 감소당하는 데서 생긴 슬픔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다른 신체와 합력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다른 신체와 갈등하는 데서 오는 슬픔보다 강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한 정서는 그것과 반대되는 더 강한 정서에 의해서 억제되거나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11)  


물론 이러한 기쁨도 1차적으로는 능동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수동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를테면 운에 의해 주어지는 대상과의 조화를 생각해보자. 분명히 우리는 우리 신체의 변용의 증대를 체험한다. 그러나 그 기쁨을 주는 대상에 대해 적합한 인식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 기쁨은 우리 자신의 행위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수동적인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슬픔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실존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계속 실존하는 능력이 감소하여 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코나투스는 계속 존재하려 하는 우리의 본질이기에 인간은 기쁨의 정서를 느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기쁨을 경험할 수도 있다.


수동적인 기쁨과 욕망 이외에 우리가 작용하는 한에서 우리에게 관계하는 기쁨과 욕망의 다른 정서가 존재한다. (<윤리학> 3부 정리 58)


여기서 말하고 있는 기쁨은 수동적인 기쁨이 아니라 능동적인 기쁨이다. 그것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관계를 조직하는데서 생겨나는 기쁨이다. 물론 우리들은 우리가 다른 것이 없이 자신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없는 자연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한 능동이란 불가능하다.12) 그러나 타인과의 합치 속에서 느끼는 기쁨의 정서는 우리로 하여금 타인과 나에게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것이 공통개념이 가능해지는 메커니즘이다.


어떤 사물도 우리의 본성과 공통적으로 갖는 것에 의해서는 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물이 우리에게 악이 되는 한에서, 그 사물은 우리와 대립한다. (<윤리학> 4부 정리 30)

어떤 사물이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한에서, 그 사물은 필연적으로 선이다. […]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따라 나온다. 어떤 사물이 우리의 본성과 많이 합치할수록 우리에게 더 유익하고 더 선이다. 또한 역으로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유익하면 할수록 우리들의 본성과 더욱 합치한다. (<윤리학> 4부 정리 31, 정리 31 보충)


정리 31에서 스피노자는 개체들의 합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본성은 유지된다. 그런데 그것은 정리 30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와 다른 사물에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즉, 나와 외부 사물을 구분하여 바라보는 시각에서 두 개체의 마주침은 그것이 기쁨을 낳는다 할지라도 수동이지만, 그 기쁨을 통해 나와 외부 사물에 대해 공통적인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능동적인 기쁨이 된다. 둘 사이에 공통적인 것 -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두 개체가 함께 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말한다. - 이 없다면, 능력의 합치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합치한 후에야 유익한 결과를 통하여 서로 얼마만큼 공통적인 것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앞서 살펴본 2종 인식으로서의 공통개념이 생겨난다. 우리가 공통개념을 형성하게 되면 이제 변용은 더 이상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 되며, 단지 수동적인 정념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으로서의 기쁨의 정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암비시오 역시 단순한 단계를 넘어, 능동의 단계로, 즉 스피노자가 덕virtus과 경건함pietas으로 부르는 이성적인 정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욕구한다. 그러나 이 충동은 이성에 따라 인도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수동이고, 이것은 암비시오로 불리어지며, 오만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하여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그것은 능동이나 덕이며 경건함으로 일컬어진다. (<윤리학> 5부 정리 4 주석)


(4) 공통-되기

따라서 인간의 해방은 언제나 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공동체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런 단독자의 자유란 이 자연 안에서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며,13) 그런 자유가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낳는다. 따라서 자유와 능동을 위한 인간의 관건은 어떻게 타자와 공통의 관계를 맺는가, 즉 공통-되기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와 본성이 같은 다른 인간이다.

 

어떤 사물이 우리의 본성과 많이 일치할수록 우리에게 더욱 유리하거나 선이며,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유익할수록 우리의 본성과 더욱 일치한다.(<윤리학> 4부 정리31 주석)

[…] 전적으로 본성이 똑같은 두 개체가 서로 결합한다면, 단독의 개체보다 두 배의 능력을 가진 개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인간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 모든 사람의 정신과 신체가 하나가 되어 마치 하나의 정신과 신체를 구성하여 모든 사람이 동시에 존재의 유지에 노력하고 […]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어떤 것도 바랄 수 없다.(<윤리학> 4부 정리18 주석)

인간에게 그의 존재의 유지와 이성적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성에 따라 인도되는 인간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윤리학> 4부 부록 9항) 


그러나 여기서 “본성이 같다.”는 말은 결코 어떤 종적이거나 유적인 본성(이를테면 우리가 통속적으로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 잘 지적했다시피,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규범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변용되기/하기에서 출발하는 행동학éthologie이다.14) 노역을 하는 말과 경주마, 그리고 노역을 하는 소를 예로 들어보자. 들뢰즈는 노역을 하는 말과 경주마 사이에는, 노역을 하는 소와 말 사이보다 더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경주마와 역마는 동일한 변용들과 변용 능력들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역마는 오히려 소와 공통적인 변용들을 가지며, 이것이 “본성의 일치”라는 말의 의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다른 인간인 이유는 그가 어떤 ‘인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많이 관계를 맺으며, 같은 변용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 공동체의 구성은 언제나 함께 하는 변용의 ‘활동’으로서 정의되지, 추상적인 ‘본성’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때문에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성에 따라 인도되는 인간” 역시, 활동의 구성을 통해 정의된다.15) 그런 점에서 신체 능력의 완전성과 적합성이 정신 능력의 완전성과 적합성 또한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매우 많은 것을 지각하는 데 적합하며, 인간의 신체가 한층 더 많은 방식으로 영향 받으면 받을수록 그러한 적합성은 더욱 커진다. (<윤리학> 2부 정리 14)

인간의 신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 또는 인간의 신체로 하여금 외부의 물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하는 데 알맞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그것은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받는 것과 다른 물체를 자극하는 데 더 알맞으면 알맞을수록 그만큼 더 유익하다. 이와 반대로 신체를 이것에 덜 적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만큼 해롭다. (<윤리학> 4부 정리 38)


정리하자면, 인간은 코나투스를 따라 존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하기 마련이며,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바로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다. 게다가 ‘이성을 따르는 인간’은 그가 지닌 이성의 힘이 클수록 타인을 위해서도 선을 추구하게 되고16), 각자의 코나투스 추구는 이성의 지도에 따른 생활능력의 증대 곧 능동적인 능력과 자유의 증대로 드러나게 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모습을 “사랑”과 “우정”이라는 정서로 포착한다.


정신은 무기가 아니라 사랑과 관용에 의하여 정복된다.(<윤리학> 4부 부록 11항)

인간에게는 […] 그들 전체를 하나로 만들기에 가장 알맞은 유대를 결속하는 것, 일반적으로 말해 우정의 강화에 도움되는 행위가 무엇보다도 유익하다.(<윤리학> 4부 부록 12항) 


그러나 이러한 사랑과 우정에 의한 공통-되기는 곧 난점에 부딪힌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이성에 따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없고, 대부분의 다중들은 수동적인 정념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국가 이론은 좀 더 복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선, 모든 인간은 개인이 아니라 이미 사회 속에서 태어난다. 이것은 존재론(관개체성)에 의해서, 정서들의 모방 기제에 의해서, 그리고 공통개념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때문에 “인간의 공동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 또는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여 살게 하는 것은 유익하다. 이와 반대로 국가에 불화를 가져오는 것은 악하다.”17) 때문에 스피노자의 국가 이론은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4부 정리 37의 주석 2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와 일견 맞지 않는 듯한 스피노자의 주장을 만난다.


인간들은 정서에 예속되어 있으며(4부 정리 4 보충에 의하여), 이 정서는 인간의 능력이나 덕을 훨씬 더 능가하기 때문에(4부 정리 6에 의하여) 그들은 흔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며(4부 정리33에 의하여),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4부 정리 35 주석에 의하여) 서로 대립적으로 된다.(4부 정리 34에 의하여). […] 따라서 사회는 공통적 생활 양식을 규정하며 법을 제정하는 실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법은 정서를 억제할 수 없는 이성이 아니라(4부 정리 17) 형벌의 위협에 의하여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에 의해, 그리고 자기 보존의 힘에 의해 확립된 이 사회를 “국가”라고 하며,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보호되는 자는 “국민”이라고 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두 책에서 어떻게 다중의 정념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정치제도를 세울 수 있는지를 매우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 속에서 스피노자는 마치 비관적인 현실주의자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것은 스피노자의 이상이 아니다. 그는 <신학정치론>에서도, <정치론>에서도 이러한 비관적 현실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국가의 진정한 목적은 ‘자유’에 있으며(신학정치론), 마치 맹종하는 양과 같이 신민들을 다루는 국가는, 국가라기보다는 황무지나 다를 바 없다(<정치론>). 따라서 “완전히 절대적인 국가” 즉 민주정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다중의 정념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고유한 정치적 제도로서 서술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메커니즘을 완전히 극복하는, ‘도래해야 할 정치체’로 그려진다. 2절과 3절에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구체적 가능성을 탐구하여 볼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신에 대한 사랑’과 ‘영원하게-되기’라는 개념을 통해 그러한 정치체가 결정적으로 가능해지는 존재론적 토대를 살펴보는 것이 먼저이다.


(5) 신에 대한 사랑

<윤리학> 5부에서 스피노자는 다시금 ‘신’을 중심주제로 올려놓는다. 1종 인식에서 2종 인식으로 이행한 인간은 이제 신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 즉 3종 인식으로 이행한다. <윤리학> 5부에 나타난 스피노자의 모습은 사뭇 종교적이다. “3종 인식에서 생기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영원하다.”18)와 같은 언급이나 지복, 사랑, 덕, 경건, 영광 등의 종교적 용어들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시킨다. 지금까지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왔던 <윤리학>의 논증이 신비주의적 신학으로 후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19)


그러나 그러한 용어들이 스피노자의 체계가 종교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스피노자는 <윤리학> 5부 뿐 아니라 그의 철학 전체에서 기존의 철학과 신학의 용어들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다. 대표적인 것이 “신”이며, 이것은 이미 <윤리학> 1부에서 기존의 신학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정의된 바 있다.(우리는 이것을 II장에서 다루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우리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종교적인 단어들이 획득한 새로운 개념들에 주목해서 그의 사유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앞선 논의와 연결하여 <윤리학>의 5부를 읽을 때 가장 먼저 고찰해야 할 개념은 ‘3종 인식’이다. 스피노자는 3종 인식을 정신의 최고의 노력(코나투스)과 동일시한다. “정신의 최고의 노력과 최고의 덕은 3종의 인식에 따라 실재들을 인식하는 것이다.”20) 이 3종 인식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2종 인식, 즉 공통개념과는 어떻게 연결되며, 또 어떻게 다를까?


우선 3종 인식은 2종 인식의 토대 위에서 고찰된다. “3종 인식에 따라 실재를 인식하려는 노력 내지 욕망은 1종 인식에서는 생길 수 없지만, 2종 인식에서는 생길 수 있다.”21) 2종 인식과 3종 인식은 모두 1종 인식과는 달리 사물에 대한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연속성을 갖는다. 또한 이 두 종류의 인식은 정신이 수동적 정념의 작용을 덜 받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22) “정신은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에 따라 더 많은 것을 파악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쁜 정서의 작용을 덜 겪게 되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 갖게 된다.”23)


그러나 3종 인식은 2종 인식과 구별되는 고유성과 우월성을 갖는다. “정신의 최고의 노력과 덕”인 3종 인식, 그것은 단지 양태들 간의 공통된 것을 인식함에서 성립하는 2종 인식을 넘어선, 양태들의 내재적 원인인 신에 대한 인식이다. 3종 인식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을 밝히기 위해 스피노자는 우선 <윤리학> 5부의 정리 20에 이르기까지 공통 개념에서 생겨나는 ‘신에 대한 사랑’을 다룬다. 사물의 공통적인 원인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체의 상에 새겨진 외부의 이미지에 따른 정서인 수동적 정념을 극복하도록 한다. 그런데 정서는 함께 작용하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환기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커지므로24), 우리가 더 많은 공통 개념을 형성함으로써 느끼는 능동과 기쁨의 정서는 수동의 정서를 더 많이 이길 수 있도록 한다.25) 그리고 이러한 정념을 넘어설 때 우리는 더 적합한 신체의 운동을 조직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정신의 더 큰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26) ‘신에 대한 사랑’은 여기에서 등장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에 공통적이고 적합한 원인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가장 최고의 기쁨과 능동의 정서를 가짐으로써 모든 부정적인 정념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27) 강렬한 공통-되기의 체험 속에서 느껴지는 기쁨의 정서, 그것이 곧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6) 영원하게-되기

3종 인식은 이 신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하여 나오며 그것은 또한 ‘신의 지적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을 낳는다. ‘지적intellectual’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이것을 단지 머리로 하는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이미 정신과 신체가 다르지 않음을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28) 스피노자가 ‘지적’이라는 말을 통해 하려는 것은 ‘지속’을 넘어서는 ‘영원성’의 시간을 사유하기 위해서이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신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지속’ 속에 존재하며 정신이 신체의 관념인 이상, 우리의 정신은 신체의 지속 안에서, 즉 ‘시간’이라는 범주를 통해서만 신체와 사물들을 인식29)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어떤 부분”은 ‘영원함’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곧 신의 본질 때문이다. 우리가 II장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신은 무한히 많은 방식을 통해 무한히 많은 양태들로 표현되며 존재한다. 신은 태어남(시작)도 사멸됨(끝)도 없는, 즉, 지속이 아닌 ‘영원’의 존재이다.30)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신이 한편으로 양태들 사이의 인과연쇄와 다른 것이 아님을 밝혔다. 3종 인식, 즉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은 양태들 사이의 인과연쇄가 신이 곧 무한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즉 우리를 포함한 모든 양태가 곧 영원하게 존재하는 ‘신’을 원인으로 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 안에는 모든 인간의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31)하며, 따라서 인간의 정신은 신체의 지속 여부와 상관없이 신체를 영원의 지평에서 파악할 수 있다.32) 반면 1종 인식과 2종 인식은 양태들 사이의 인과연쇄만을 통해서 양태를 고찰한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도 아직은 공통개념에 의해서 생겨난 정서일 뿐이다. 그러나 신에 대한 사랑을 느끼며 우리가 공통개념을 형성하여 능동적 변용으로 나아갈 때 거기에서 3종의 인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 정신과 신체는 신의 영원성 속에서 고찰된다. 신이 자연세계 바깥의 신비적 존재가 아니기에, 영원성의 인식인 3종 인식 역시 신비적인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맺는 공통-되기의 변용들이 한편으로 영원한 신의 변용이라는 인식이며, 그런 점에서 영원하게-되기라는 인식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가 더 많은 것에 적합한 신체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영원한 정신을 갖게 된다.33) 그리고 우리들은 그러한 영원한 정신 속에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즐기며 기뻐한다.34) 이 기쁨이 곧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며, 그것은 신이 자신의 존재를 즐기는 “무한한 지적 사랑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35)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러한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의 기쁨을 “자기의 관념에 수반되는 기쁨”이며, 동시에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에도 수반되는 기쁨”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바로 이 신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진정한 능동을 경험하며, 최상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이런 게 아님!


물론 자연계의 모든 변용은 신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므로, 신의 영원하게-되기의 일부이다. 신의 관점에서는 능동과 수동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에 항상적인 수동 속에서 살아가며, 그럼에도 자신이 마치 자유인인 것처럼 착각 속에 살아간다. 그 결과 인간에게 닥치는 상황은 끊임없는 타인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지배의 질서이다. 때문에 다중은 ‘독립된 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는 결코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없다. 다중은 공통-되기 속에서만 사랑과 유대를 통한 능동적 구성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리고 그 공통-되기를 신에 대한 인식을 통해 영원하게-되기로 사유함으로써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3종 인식이 갖는 정치적 의미에 특히 주목하고 있는 이는 네그리이다. 그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완전히 절대적인 통치”, 즉 다중에 의한 민주주의를 이 3종 인식의 영원성의 지평에서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어떠한 매개 없이 다중이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민주주의는 지속의 시간으로 환원할 수 없는 영원성의 시간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단지 지속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하는 어떠한 체제나 통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비-통치”이며, 다중의 끊임없는 변혁과 구성의 실천이라는 것이다.36) (우리는 이것을 <정치론>의 분석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_김강기명(CAIROS 연구원)


에티카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스피노자 (서광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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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정치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스피노자 (동서문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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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서울: 민음사, 2001 신장판), 142쪽


2) E II정리7, “관념의 질서와 관계는 사물의 질서와 관계와 동일하다.”


3) E III 정리28


4) 이 개념에 대한 상세한 주석으로는 단연코 알렉상드르 마트롱,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217 이하를 들 수 있다. 정서들의 모방 기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관계 전체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서 단지 능동과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폭정과 내란, 미신에 의한 사회관계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즉 스피노자는 인간의 사회화 경향과 반사회화 경향을 단일한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정서들의 모방이 능동과 기쁨으로 나아가는 면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여 볼 것이다. 


5) 진태원, “대중들의 역량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I”, 「트랜스토리아」 5호(2005년 상반기), 3절


6) 진태원, 앞의 글


7) TP 2장15절


8) 통상 야망, 야심 등의 의미를 갖는 단어이지만, 스피노자의 논의에서 ambitio는 국역한 단어들이 주는 부정적인 가치판단의 이미지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욕망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9) E III정리29주석


10) E IV정리18


11) E IV정리7


12) E IV정리2


13) TP 2장15절, “인간의 자연권이 단지 개개인만의 것으로, 그리고 개개인의 힘으로 결정되는 동안은 없는 것과 같고,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공상 속에 존재한다.”


14)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45쪽


15) 그런 점에서 ‘이성’은 ‘공통개념’과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16) E IV부정리37


17) E IV정리40


18) E V정리33


19) <윤리학> 5부에 대한 연구자들의 당혹스러움과 비판에 대해서는 Jonathan Bennett, A Study of Ethics(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Edwin Curley, Behind the Geometrical Method: A Reading of Spinoza's Ethics(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참조.


20) E V정리25


21) E V정리28


22)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의 관계론적 해석", 398쪽


23) E V정리38


24) E V정리8


25) E V정리9


26) E V정리10, 주석


27)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사랑은 “사랑받는 실재와 결합하려는 사랑하는 이의 의지”가 아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실재의 현존 때문에 사랑하는 이 안에 존재하는 만족”이다. 즉 사랑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의지가 아니라 공통-되기 속에서 생겨나는 기쁨과 만족의 정서라 할 수 있다.(E III정서의정의6해명 참조) 따라서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신이 우리를 (의지에 따라) 사랑하게 할 수는 없다.(E V정리19) 또한 신에 대한 사랑은 질투와 시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랑이다. 그것은 공통 개념 속에서 생기는 감정이므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사랑의 유대로 신과 결합하는 것을 우리들이 표상하면 할수록 사랑은 그만큼 더 커진다.(E V정리20)


28) E II정리7 및 본 논문의 II장 1절 참조


29) E V정리21, 정리23주석


30) E I정리19,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영원하다; [증명] 왜냐하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31) E V정리22


32) E V정리23,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함께 완전히 파괴될 수 없고, 그 가운데 영원한 어떤 것이 남는다.”


33) E V정리39


34) E V정리32, “우리들은 우리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즐기며,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한다.”


35) E V정리35, “신은 무한한 지적 사랑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증명]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따라서 신의 본성은 무한한 완전성을 즐긴다. 신의 본성은 자신의 관념을, 즉 원인으로서의 자신의 관념을 동반한다. 우리들은 5부 정리32의 보충에서 이것을 지적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야말로 존재에 대한 순수한 긍정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질서와 무질서라는 분별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가상에 불과한 것이다.


36)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202-2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