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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상력의 전복적 활용

우리는 <윤리학>의 분석을 통해서 수동적인 정념과 1종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다중이 공통-되기를 통하여서 공통 개념과 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여 능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고찰하였다. 그러나 공통 개념은 다중의 무능력의 자리와 구분되는 어떤 초월적 개입이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중의 무능력의 자리가 곧 다중의 능력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력과 정서들의 모방기제에서 찾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그리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것이 어떤 정서에 자극되는 것을 우리들이 상상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유사한 정서에 자극된다.(<윤리학> 3부 정리 27)


물론 이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정서모방기제를 낳는 상상은 아직 어떠한 공통 개념으로도 나아가지 못하였다. <신학정치론>은 이 상상과 정서의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상상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조직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다중을 미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향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스피노자가 이 책을 기록한 이유였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무엇보다 ‘미신’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그가 <신학정치론>에서 택한 방법은 미신을 파(破)하는 철학과 이성을 위로부터 주입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미신으로 향하는 다중의 ‘상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종교’라는, 다중의 공통-되기를 위한 강력한 상상의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과제를 위해 스피노자가 몰두한 것은 자유로운 양심과 이성에 입각한 성서연구였다. 왜냐하면 특히 17세기의 ‘기독교 네덜란드’에서 미신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다중을 항구적인 예속 상태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성서를 통해 정당화하는 성직자들의 여론몰이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인류에게 참된 행복, 즉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고 말하는 것을 사방에서 듣는다. 하지만 […]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관념들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떠벌리지만, 그들의 주요한 목적은 종교를 구실로 삼아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생각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대체로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고안한 관념들(그들은 이것들에 대해 신이 부여한 권위를 주장한다)을 성서에 갖다 붙이는 것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신학정치론> 7장)


스피노자는 성서 해석의 원리가 자연을 해석하는 원리와 달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학정치론>에서 우리는 성서의 고등비평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은 자연을 해석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으며, 사실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왜냐하면 자연을 해석하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자연을 상세하게 연구하는 데 있으며, 우리는 확실한 자료의 원천인 이것으로부터 자연물들의 정의들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성서 해석의 임무는 우리에게 성서에 대해 연구하고,, 우리의 고정된 자료와 원리들의 원천인 이것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에 의해서 성서 저자들의 의미를 도출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즉 성서 해석과 그 맥락들의 연구에 있어서 오로지 성서 자체와 역사적인 성서 연구로부터 수집될 수 있는 것들 이외의 다른 어떤 원리들이나 자료들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오류의 위험도 없이 확고한 진행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자연적인 이성의 빛에 의해 알려지는 문제들만큼 확신을 가지고 다룰 수 있다.(<신학정치론> 7장)


 그는 성서가 누구에 의해 어떠한 상황에서 기록되었으며 어떤 의도로 쓰여졌는, 그리고 얼마다 다양한 판본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어떤 방식에 의해 정경으로 결정되었는지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성서는 자연계 바깥의 어떤 초월적인 글이 아니며, 성서의 저자들(특히 예언자들)이 서술하는 하느님 상은 그들 각자의 역사적 환경과 기질 속에서 상상된 하느님 상이라고 말한다.1) 성서 구절들의 불일치나, 각 권 사이의 차이점이나 서로 충돌하기까지 하는 내용들은 성서가 일관된 신학적 관점을 가진 한 권의 책이 아니며, 성서의 이야기들로부터 어떤 과학적이거나 자연적인 진리를 도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성서를 폐기해야 한다고, 공화국을 위하여 성서를 없애고 모든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의 저술 목적이 “철학할 자유는 경건함과 국가의 평화를 해치지 않으면서 승인된다.”2)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고 말한다. 즉, 스피노자는 상상력을 통해 구성된 종교가 다중과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통해 ‘경건’의 제자리를 찾아주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제자리’는 결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칸트) 따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상상과 정서에서 출발하지 않고서 이성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피노자는 성서가 인간 상상의 구성물이라 할지라도 대중의 공통-되기를 위해 매우 강력한 도구로 선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성서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윤리적 원칙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윤리학>에 대한 분석에서 살펴보았듯이 공통-되기가 낳는, 또 공통-되기를 낳는 정서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성서의 저자들 - 예언자들과 사도들 - 이 어떤 신에 대한 관념적 사변이나 형이상학을 전개하기 위해 성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대중으로 하여금 신에 대한 복종3)을 촉구하며, 신의 말씀을 참된 삶의 방식으로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했다고 말한다.4)


오로지 다중의 이해력, 그리고 그들 생각의 결함에 대한 양보로써만 신은 입법자나 통치자로 묘사되고 정의롭고 자비롭다 등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실제의 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본성과 완전함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행동하고 만물을 지배하며, 그의 뜻과 과욕은 영원한 진리들이며 언제나 필연성을 포함한다.(<신학정치론> 4장)


따라서 성서와 이성은 모두 신에 대한 참된 인식과 공통-되기를 낳는 서로 다른 방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성서는 다중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상상력을 활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미움과 다툼,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유대로 나아가도록 만들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성서의 ‘참된 메시지’를 어떤 구체적인 신 표상과 이야기들로부터 도출하는지는 성서 저자들만큼이나 성서 독자들 - 일반 민중들 - 역시 다양하다.5) 따라서 스피노자는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는 그것이 공통-되기를 훼손하고 누군가를 지배하는 담론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절대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6)


(2) 보편종교

이러한 원칙에 입각한 종교를 스피노자는 ‘보편종교universal faith’라고 부른다. 아마도 그는 실제로 네덜란드의 기독교와 유대교를 보편종교의 원칙하에 둘 것을 제안하려 했던 듯하다. 그가 말하는 “보편종교의 교의”는 기본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종교적 상상체제로부터 많은 개념을 빌려온다.


1. 최고로 정의롭고 자비로우며, 참된 삶의 모범인 신이 존재한다.

2. 신은 오직 하나이다. 이러한 신념이 신에 대한 온전한 헌신, 존경, 사랑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3. 신은 어디에나 있으며, 만물은 그에게 공개되어 있다.

4. 신은 만물에 대해 최고의 권리와 통치권을 가진다.

5. 신의 숭배와 신에 대한 복종은 오로지 정의와 자비, 즉 이웃에 대한 사랑에만 있다.

6. 이러한 삶의 방식을 따름으로써 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사람들만 구원된다.

7. 신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한다. 그것을 믿으며, 그의 마음이 그로 인해 더욱 신에 대한 사랑으로 고무되는 자는, 그리스도를 성령에 의해 진정으로 알며,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있다. (<신학정치론> 14장)


이러한 ‘보편종교의 교의’는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특히 6번과 7번 항목은 그가 미신으로 비판하는 종교의 교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신은 마치 인격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보편종교’는 다중의 상상을 공통-되기를 위해 조직하는 수단이지, <윤리학>에나오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 그 자체는 아니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이 교의들을 해석하면서 여기에 사용된 개념들이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신이 실제로 무엇인가, 즉 그는 불인가, 성령인가, 빛인가, 생각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신앙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신이 참된 삶의 모범인 이유가 무엇인가, 즉 신이 정의롭고 자비로운 기질을 가져서 그런가, 아니면 만물이 신을 통해 존재하고 활동하며 따라서 우리 역시 신을 통해 인식하고, 신을 통해 참되고, 정의롭고, 선한 것을 보기 때문에 그런가라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 어떤 신념을 가지든 상관없다. […] 신이 본질에 있어서 편재한다고 믿든지, 아니면 힘에 있어서 편재한다고 믿든지, 신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만물을 지도한다고 믿든지, 신이 통치자로서 법을 정한다고 믿든지 아니면 그것들을 영원한 진리들이라고 가르친다고 믿든지, 사람들이 자유 의지에 의해서 신에게 복종한다고 믿든지 아니면 신의 뜻의 필연성에 의해서 신에게 복종한다고 믿든지, 선인의 보상과 악인의 처벌이 자연적이라고 믿든지 아니면 초자연적이라고 믿든지. 이와 비슷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취하는가는, 그러한 신념으로 인해 더욱 방자하게 죄를 짓게 되거나 신에 대한 복종이 방해를 받게 되지 않는다면,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적 교의들을 자기 자신의 이해에 맞추고, 그것들을 충분한 자신과 확신을 갖고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면 그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을 스스로 해석할 의무를 가진다. […] 신앙은 진리가 아니라 경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오로지 그것이 고무하는 경건 때문에 경건하고 인간을 구제하며, […] 따라서 최선의 신앙은 반드시 최선의 논증을 보여주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의 최선의 행위를 보여주는 사람들에 의해 나타난다.(<신학정치론> 14장, 강조는 필자)


중요한 것은 각각의 자유에 따라 성서를 읽고, 교리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을 인정하는 이 보편종교를 통해 사람들이 공통-되기로 나아가는가에 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보편종교는 자유로운 삶을 함께 누리는 종교,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에 의해 움직이는 종교, 공통 개념과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보편종교의 논의는 민중신학의 성서해석학과 매우 여러 가지 점에서 공명한다. 민중신학 역시 ‘성서’ 앞에 ‘교리’를 전제하는 보수신학의 성서해석을 비판한다. 안병무의 다음의 말은 흡사 스피노자의 말을 듣는 듯하다.


그래서 놀라울 정도로, 교리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절대 군림하고 성서마저도 거기에 종속돼 버렸어요. […] “성서만”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성서의 권위를 빌어 어떤 특정한 교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한갓 편리한 도구로 이용하는 거지요. 그리고 여기에 여러 종파가 난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해 있구나 […] 어떤 교리체계에 승복하면 거기에 맞도록 성서를 얼마든지 이리저리 뜯어 맞출 수 있으니까요. […] 성서지상주의를 내세울수록 성서는 버림받고 멸시당합니다.(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62쪽)


따라서 안병무의 사회사적 성서연구나 서남동의 “두 이야기의 합류”의 방법론 등은 모두 성서를 교리적 전제가 아닌 오늘의 민중해방의 관점에서 연구할 것을 주장한다. 민중신학자들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 성서를 교권으로부터 빼앗아, 민중이 자신의 해방을 위한(스피노자의 용어로는 공통 개념의 구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안병무는 “사람이 이웃과 더불어 희비애락 속에서, 그 사건 속에서만 하느님을 볼 수 있다”7)고 주장한다. 그는 민중의 해방적 삶과 하느님을 구분하지 않고 한 지평에서 사유함으로써 스피노자의 보편종교 이해에 근접하고 있다. (우리는 V장에서 스피노자와 민중신학이 공명하고 있는 지점들을 좀 더 자세히 탐구해 볼 것이다.) 


(3) 민주주의의 가능성

종교가 객관적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변이 아니라 다중의 복종과 공통-되기를 위한 상상적 체제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이러한 종교를 활용한 정치체의 구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이중적인 논의를 전개한다. 하나는 ‘복종’의 주제를 강조한 이스라엘 신정에 대한 논의이며, 다른 하나는 공통-되기를 강조한 절대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III장에서 다룬 바 있다. 이스라엘 신정은 절대적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나 내란과 폭정이 끊임없이 악순환하는 형편없는 국가 상태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다중의 정념을 통제하기 위해 신에 대한 상상을 동원하여 강력한 법을 세운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다중이 공포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본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는 하느님에 대한 상상과 법을 따를 때 얻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상상이 강조되었으며, 이것을 위한 각종 의식과, 부의 분배, 지도권의 분립 등의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신정은 모세의 죽음 이후 몇 가지의 제도적 허점에 의해 쉽게 붕괴되고 만다. 신정에서 다중은 정념에 의한 일치를 체험하긴 하지만, 그것을 자유로운 다중의 결합에 의한 공통 개념의 구성으로 끌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다른 방식의 정치체의 구성에 대해 언급한다. “가능하다면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단일체로서 정권을 잡아서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요구되며 어느 누구도 그와 대등한 사람에게 복종하도록 요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8)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동체의 원리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며, 이러한 국가의 목적은 “자유”에 있다고 말한다.9) 여기에서 종교는 이제 ‘복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공통-되기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더 이상 ‘규범’이 아니라 공통-되기가 낳는 기쁨의 정서로 체험될 것이다. 그러나 <신학정치론>의 민주주의는 아직 영원성의 차원10)에서 고찰되고 있지는 않다. 여전히 그것은 하나의 정치 ‘체제’이다. 다만 최고 권력(정권)이 모든 다중에게 속하는, 다중이 갖고 있는 자연권의 지평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정치체일 뿐이다.11)


(4) 스피노자의 그리스도 이해

<신학정치론>의 분석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스피노자의 ‘그리스도론’이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신학정치론>의 성서연구 역시 주로 구약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12)를 구약의 예언자들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로 묘사한다. 예언자들이 신과 신에 대한 상상을 통해 계시를 받고, 그것을 대중에게 법으로서 선포했다면, 그리스도는 법이 아니라 “신의 정신”에 입각해서 살았고, 따라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시를 전한 사람이다.13) 그런데 스피노자는 ‘신의 정신’은 곧 사물을 말이나 이미지 없이 순수 사고에 의해 참되게 이해했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는 대중의 이해력에 맞추어 법이나 비유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민족적 정체성이나 신화적 상상력이 아닌 보편적인 도덕율로 이루어져 있다.14)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다른 예언자들과 재능과 소명에 있어 구분된다. 하지만 그가 어떤 초월적인 신적 존재인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그리스도는 <윤리학>에서 설명하는 3종의 인식에 도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신학정치론>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고 서술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는 기독교의 통상적인 그리스도 담론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다. 또한 그의 그리스도론이 어떤 정치적 함의로 갖는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는 3종 인식에 도달한 한 모범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민중신학의 그리스도론, 혹은 예수론에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오히려 민중신학의 예수론이 스피노자의 그리스도론보다 스피노자 자신의 사유에 더 합치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통개념’과 관련된다. 안병무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을 연구하면서, 그가 결코 혼자서 존재하며 사역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한다. 예수는 언제나 “민중 속에서 예수”, “민중과 더불어 예수”였다는 것이다.


복음서는 처음부터 ‘홀로’의 예수를 소개하지 않고 ‘더불어’의 예수를 서술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를 유아독존적 존재로 착각한 듯이 그와 더불어 있던 사람들을 배제하고 그만 ‘홀로’ 부각시켰다. 그와 더불어 있는 존재들을 인식했어도 한 초상화의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배경 정도로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했을 따름이다. […] 우리는 역사의 예수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와 ‘더불어’ 있던 사람들을 주목할 것이다. 단순히 그와 더불어 있기만 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동시에 ‘그가’ 더불어 산 이들이다. 그들이 누군가?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128쪽)


즉, 안병무에 따르면 예수는 결코 홀로 독자적인 구원자로서, 초월적인 신적 존재로서 이 땅에 있지 않았다. 그는 민중 속에 있었으며, 그와 민중은 주체와 객체로 나뉠 수 없는 공통의 관계였다. 안병무는 이러한 통찰을 밀고나가, “예수가 민중을 인도한 면이 있다면, 예수는 민중에게 포위되어 저들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운명까지도 (그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15)고 말한다. 결국 어떤 점에서는 예수가 민중을 구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예수를 구원한 것이다. 민중신학의 그리스도론은 민중의 자기 초월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와 민중이 함께 구원을 빚어나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스피노자에게서 그저 재능과 사명 이상의 설명이 없는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더욱 스피노자의 사유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지배를 넘어서는 다중의 공통-되기 속에서 민중이 그리스도[신에 대한 지적 사랑에 도달한 자]가 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것이다._김강기명(CAIROS 연구원)



1) TTP 2장, “예언자가 쾌활한 기질의 사람인 경우에는, 승리, 평화 그리고 여타의 즐거운 사건들이 그에게 계시되었다. 예언자가 우울한 기질의 사람인 경우에는 전쟁, 학살,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재난들이 그에게 계시되었다. […] 계시는 ‘상상의 유형’에 따라 달라졌다. 예언자가 교양 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교양 있는 방식으로 신의 정신을 인식했다. 정연한 정신을 결여한 경우에는 무질서한 방식으로 신의 정신을 인식했다. […] 점성학을 믿었던 동방의 박사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은 동쪽에서 떠오른 별 하나를 상상함을 통해 계시되었다.”


2) TTP 서문


3) 여기서 “신에 대한 복종”은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계명(윤리적 원칙)에 대한 복종”이라 할 수 있다.


4) TTP 13장, “성서는 오로지 아주 단순한 교의들만을 가르치고 오직 복종만을 고취시킨다 […] 그리고 신의 본성과 관련해서는 오로지 사람들이 일정한 행위 규범으로 모방할 수 있는 것들만을 가르친다. […] 하지만 보통의 신학자들은 그것들이 신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들의 자연적 빛에 의해 확신할 수 있는 구절들은 은유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들은 그 무엇이든지 글자 뜻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성서는 일반 민중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배운 사람들만을 위해 쓰였음에 틀림없다.”


5) 이런 주장은 단지 기독교와 유대교 뿐 아니라 타종교에 대해서도 다원주의적 시각을 열어준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각자의 방식으로 신, 혹은 존재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통해 성립하며, 그것이 다중으로 하여금 공통-되기로 나아가게 하는 한에서 모두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종교와 사상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6) TTP 20장,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정부는 전제적이라고 간주되며, 무엇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틀린 것으로 거부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신에 대한 그의 헌신을 불어넣을 믿음인가를 모든 사람에 대해 규정하고자 할 때, 주권자는 그의 신민들에게 부당한 짓을 하며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모든 것들은 개인적 권리에 속하는 문제들이며, 어느 누구도, 설령 그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 개인적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7) 안병무<민중신학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153-154쪽


8) TTP 5장


9) TTP 20장, “국가의 목적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에서 야수나 꼭두각시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 신체적 능력들을 안전하게 발전시키고, 자신들의 이성을 제한없이 사용하며, 증오, 분노 혹은 기만에 의해 촉발된 투쟁과 상호비방을 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다.”


10) 본장 2절의 <윤리학> 5부에 대한 분석 참조


11) TTP 16장, “만약 정직이 아첨보다 높이 평가되고자 한다면 그리고 주권자들이 완전한 지배권을 보유하고 선동자들에게 굴복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판단의 자유를 부여하고, 그들의 견해가 아무리 상이하고 상충하더라도 서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통치해야만 한다. 이 정치체제가 최선이며 그것의 불이익이 가장 적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본성과 가장 근접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자연상태에 가장 가까운) 민주정에서 모든 시민들은 공동으로 이루어진 결정에 따라 행동할 의무를 지지만, 그에 따라 생각하거나 판단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밝혔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들은 다수결에 의해서 지지된 제안이 법령의 힘을 갖게 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더 나은 대안을 알게 되는 경우에는 그것을 폐지할 권위를 보유한다. 따라서 판단의 자유가 사람들에게 적게 부여되면 될수록, 그들은 가장 자연적인 상태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며, 따라서 정권은 더욱 더 억압적으로 된다.”


12)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예수” 대신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일관되게 사용한다.


13) TTP 4장


14) TTP 7장


15)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143쪽, 괄호 안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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