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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종횡書해

공감과 엔트로피를 통해 본 인류 문명사 [박성훈]

제러미 리프킨, <공감의 시대> 서평

인간의 문명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새로운 세기의 여정은 어떤 곳을 향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큰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사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 책 전체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리프킨의 이번 저술은 실제로 이러한 인류 전체의(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 문명의, 그러나 이미 서구적 문명의 과정이 지구 전체에 퍼져 있다는 의미에서 다시 인류 전체 문명의) 명멸의 과정을 개괄하는 하나의 문명사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틀어 리프킨은 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열역학 개념인 엔트로피라는 개념적 도구와 공감이라는 또 다른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성서의 창세기에는, 비록 신화/우화적인 형태이기는 하나, 문명의 구성의 어떤 형식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창세기 11장, 표준새번역 성서 발췌 인용) 이 신화/우화에서조차도 우리는 공감('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과 엔트로피('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의 문제를 대하게 된다.


어쨌든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원래 물리학이나 열역학의 개념이기 이전에 생리학에서 도입된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도구틀을 통해 살펴본 문명은 하나의 생물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생물은 외부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내부의 질서도 및 엔트로피를 낮추는 작업을 끊임없이 진행한다는 의미에서). 물론 굳이 이런 안경을 통해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문명을 하나의 여정으로, 살아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가진 생물로 보는 시각은 가능할 것이다. 지난 세기를 거친 현대 문명은 인류 역사(혹은 문명사)를 놓고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큰 인류의 지식 및 부의 발전을 맞게 되었고, 마치 영원한 활력을 가진 '짐승(the beast)'과 같이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집중화된 문명, 경제 및 자본주의 발전으로 대변되는 이 영원할 것만 같은 활기찬 '짐승'의 움직임은  지구적으로 축적된 형태의 에너지(화석 에너지 및 다수의 광물 자원)의 한계 및 에너지 사용의 집중화 및 비약적인 증가로 인한 엔트로피 증가의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리프킨이 서술하는 문명사의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들을 대하게 된다. 우선 메소포타미아의 신석기 농업혁명. 농업혁명은 비약적인 생산력 증가로 이어졌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그에 따라 구축되었으나, 토양 염분 증가로 인해 농업 생산력이 떨어졌고 문명의 붕괴로 이어진 사례. 두 번째로 로마 제국의 사례. 제국이 정복전쟁을 멈추고 노예 노동력 유입에 따른 에너지의 유입이 줄어들었고 이와 함께 유럽의 토양염분 증가로 인해 로마 사회 전체의 엔트로피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세번째로 중세 후기의 수력 및 풍력을 사용한 새로운 에너지원의 확보로부터, 외연 기관 사용으로 시작된 1차 산업혁명, 그리고 그 이후 내연 기관의 사용에 이어진 2차 산업혁명으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이라는 '짐승'의 여정은 엔트로피 또는 사용불가능한 에너지의 증가만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리프킨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공감이라는 또 다른 축을 도입한다. 분명 문자의 발명은 인간 상호간의 소통 증가 및 공감의 증가 그리고 이에 따른 인구 집약으로 인한 노동력(에너지) 집약을 가능하게 했다. 로마 사회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사한 효과를 감지할 수 있다. 기독교는 로마의 변방에서 시작된 미약한 컬트였지만 로마가 성장발전을 멈추고 사양길로 접어들 시기에 하나의 새로운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응집시키는 기능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기의 인쇄술은 지식의 유통과 공감의 증가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고 이후의 1,2차 산업혁명을 촉발시키게 된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듯 공감이라는 또 다른 축은 인류의 문명사를 다룸에 있어 엔트로피라는 다른 축과 함께 보다 완전한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현대의 정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위치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의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것도 이 공감이라는 키워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 선거의 과정이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인터넷 사용의 증가와 관련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하여 볼 만 하다. 리프킨은 1,2차 산업 혁명까지의 과정을 서술한 이후에는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 인류 문명이 향하고 있는/향해야 할 문명사의 방향을 그의 저술에서 3차 산업혁명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분산형 에너지 사용 구조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인류의 현재/미래의 문제인 과거 어느 때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는 문제(과거의 지역적인 형태의 오염과는 달리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가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 토양 및 해양 오염 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바로 인터넷을 이용한 과거 시대와는 다른 형태의 공감의 증가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원제: 공감의 문명The Empathic Civilization)'는 엔트로피와 공감이라는 두 축을 사용한 인류 문명사의 서술로 훌륭한 설명력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현재 인류 문명이 봉착한 문제 및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위한 문제제기의 차원에서 일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진 몇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먼저 문명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바로 직전에 제시되는 심리학적 연구들에 대한 서술 부분. 물론 인간의 본성을 보다 정확히 서술하기 위해서는 심리학 분야의 연구 성과들에서 어느 정도의 도움을 얻는 것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리프킨이 서술하고 있는 심리학의 연구 성과들을 그렇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가면서 서술할 필요가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먼저 이 책은 심리학 책이 아니다. 공감이라는 이 책의 한 중요 축에 대해 이 특정 학술분야의 연구 성과를 통해 어떤 근거를 제시하기 원했다면 이런 방식의 서술은 그리 필요치 않았다고 본다. 실제로 그 부분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자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으나 그 이후에 이어지는 문명사 서술 부분과 연결하여 보자면 가독성의 측면에서나, 전체적인 글의 통일성 및 정합성의 측면에서 흐름을 헤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분산적 에너지 사용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부분에서 리프킨이 제시하는 새로운 공감을 위한 토대는 생물권 인식 또는 가이아 이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의 문제는 이것이 일종의 유사종교적 성향을 띄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사람들이 공감을 할 것인가. 당연히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러한 형태의 유사종교적 이데올로기만이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여럿이 있다. 아무리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한 인류 문명의 당면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소통의 길이 열려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문제 인식의 방식이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받아들이게 되는 또는 공감하게 되는 이데올로기는 생물권에 대한 인식 이외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이 책이 단순한 문명사 서술의 차원을 넘어서려 했다면, 그리고 리프킨이 책의 3부에서 이런 목적으로 서술을 했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 보다 정치한 기술을 했어야만 한다고 본다(인간 발달의 문제나 뇌 구조에 관한 심리학 혹은 뇌과학계 내에서의 내부적인 문제들에 대한 서술을 과도하게 진행하기 보다는 말이다).


셋째로, 리프킨이 인류 문명사 내에서 서술하고 있는 공감이라는 축은 계속 인류 문명을 지탱하고 부를 늘리는(다시 말해 에너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방향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분산적 에너지 사용을 말하는 3차 산업혁명 또는 분산적 에너지 체제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전과 방향을 달리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리프킨은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정확히 기술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것은 약간은 책 외부적인 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한데, 리프킨은 인류 문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제시했을 지언정, 이러한 생물권인식에 대한 공감이 현재 인류가 누리고 있는 부의 수준 또는 에너지 사용의 수준을 상당한 수준 이상으로 줄여야 될 것이고, 사람들이 이에 대해 공감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이 문제를 단순히 지면 상의 문제로 누락한 것인지(심리학의 문제를 자세히 다루는 것 보다는 이러한 작업이 더 중요하다), 아니면 고의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리프킨의 인류 현재/미래에 대한 문제제기는 상당히 나이브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족으로 리프킨은 책의 서두에서 엔트로피와 공감이 인류 문명사 내에서 일종의 변증법적 과정의 두 항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나 변증법은 단순히 두 항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도 지적해야겠다. 스스로 변증법적 운동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제 3항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밝혀주어야 한다. 물론 제 3항을 책의 행간에서 찾을 수도 있겠으나 저자가 그런 사유를 구성하겠다고 했다면 분명히 해 주는 편이 좋지 않았나 생각한다.


총평을 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아마도 책 자체가 주는 무게감이 한 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적어도 인류 문명사를 엔트로피와 공감이라는 두 축을 사용하여 일정 이상의 설명력으로 개괄하는 과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과정을 따라가면서 상당 부분 리프킨의 서술 방식에 공감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듯이 심리학 서술이 과도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문명사로 넘어가는 연결고리가 약했던 측면, 그에 따라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 인류의 현재/미래의 문제에 대한 너무나 나이브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불만이었다. 차라리 전체적인 구성적 통일성을 헤치고 있는 심리학 서술 부분을 줄이거나 혹은 제거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보다 치열한 방식으로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_박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