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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그 율법교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신6:5; 레19:8)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은전)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율법교사가 대답하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1890)


 

들어가며

 

저는 얼마 전에 어떤 일로 인해 누군가와 대화하는 중에 굉장히 심한 모욕감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제게 모욕감을 준 사람은 저가 겪은 모욕감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만, 저는 그때 당한 모욕감 때문에 몇날 며칠 동안 심정적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물론 그 고통을 삭히고 이겨내는 과정이, 저의 내면세계와 또한 일상적인 행동방식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모욕이라는 주제 일반에 대해, 그리고 그 모욕에 대한 저항의 문제와 신앙적 실천 간의 연관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모욕과 품위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모욕을 당하고, 또 때론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기도 합니다. 모욕이라고 하는 것이 다분히 심리적인 차원의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일단 규범적인 의미에서 정의하자면, 자존감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할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는 행동이나 조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모욕을 당했거나,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즉각적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규범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모욕의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상황인데도, 정작 당사자(가해자든 피해자든)는 그것을 모욕으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나는 전혀 그런 인식이 없는데 상대방은 나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인식할 수 있고, 반대로 상대방이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에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을(혹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 조금 이상한 논리이긴 하지만, 모욕감을 준 사람이 없는 모욕이 존재할 수 있고, 반대로 모욕감을 느낀 사람이 없는 모욕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철학자는 『품위 있는 사회』라는 저작에서, 개인의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누구에게도 모욕을 주지 않고자 애쓰는 것, 바로 그것이 ‘품위 있음’(be decent)이라는 정의를 내립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폭력적으로 점령한 지역에서 봉기한 팔레스타인인이나 무너진 공산권 국가에서 이스라엘로 옮겨온 이민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차츰 사람들의 삶에서 명예와 모욕이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정치적 사유에서도 명예와 모욕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연구와 성찰 끝에, 모욕하지 않는 사회가 곧 품위 있는 사회라고 하는 명제를 정치철학계에 새롭게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마갈릿이 “품위 있는 사회는 그 사회의 ‘제도’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욕’(humiliate)하지 않는 사회다.”라고 좀 더 구체적인 정의를 내릴 때, 제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제도’라고 하는 맥락을 그가 특권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품위 있는 사회(the decent society)와 문명화된 사회(the civilized society)를 먼저 구분하는데요. 문명화된 사회가 구성원들이 서로를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면, 품위 있는 사회는 특별히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양자의 차이에 관해서는, 문명화된 사회의 이념은 개인 간의 관계와 관련된 미시 윤리적 개념인 반면, 품위 있는 사회의 이념은 전체 사회구조와 관련된 거시 윤리적 개념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가 ‘제도’를 이해하고 있는 방식이 잘 드러나는 셈인데요. 그는 제도라고 하는 것을 단순히 전체적인 사회구조와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학의 논의에 따르면, 제도란 구조와 단순하게 동일시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앤써니 기든스(Anthony Giddens) 같은 사회학자만 해도 구조를 이중적인 의미―구조란 행위자들의 행동의 매개이자 결과라고 하는―에서 파악하고 있고, 나아가 제도를 사회적 행위의 재구성 및 반복과 관계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제도란 단순히 행위자들의 무의미한 행동도 아니고, 동시에 그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 그 자체도 아닌 것으로서, 엄밀히 말하자면 한 사회에서 사회성원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하고 그에 따라 활동하는 게임의 규칙 및 관습 일반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구조와 행위를 매개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제도는 구조의 속성을 담지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행위자들이 현실에서 구조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제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갈릿이 정의하는 대로, 품위 있는 사회가 제도적으로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 즉 제도적 차원에서 품위가 유지되는 사회라고 한다면, 이는 개개인의 품위 있는 행동의 결과로서만 달성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것입니다.

 

앞서 제도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하고 또 그에 따라 활동하는 게임의 규칙 및 관습 일반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제도가 관행적인 의식과 관례화된 행동의 산물임을 시사합니다. 관행적 혹은 관례적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습관적인 것, 친숙한 것과 당연시되는 것, 그 모두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품위 있는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품위 있는 인간이란 ‘관행적으로’, 즉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암묵적인 원칙 가운데서 타인을 결코 모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대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품위의 제도적 차원을 마갈릿보다도 더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논의하는 까닭은 모욕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자행될 때, 그것이 명백하고도 의도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은밀하고도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 자행되기도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국가와 같은 거대한 구조에 의해 가시적이고도 명확한 형태로 주어지는 모욕, 그런 것은 그냥 억압이나 처벌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세계 안에서 나타나는 암묵적이면서도 관례화된 모욕의 행태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쉽사리 분간되지도 않을뿐더러, 의도가 개입된 것인지 아닌지도 판단이 불분명한 까닭에, 도덕적인 차원에서 비판을 가하기도 애매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예들이 있을까요? 우선, 학교에서부터 기업, 관공서, 공장, 공공기관, 상점 등등,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확인할 수 있듯,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진 한 사업장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가 있겠지요.

 

그리고 국가와 개발업자들이 쇠퇴한 도시내부를 물리적으로 복구하고 그 기능을 개선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증산층의 전입에 따른 기존 저소득층의 강제 퇴거 현상, 이른바 ‘도심신사화’(gentrification)로 인해 철거민들이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가진 자들의 못 가진 자에 대한 모욕과 배제의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용산참사의 원인과 그 이후의 사태들에서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어김없이 반복/심화되고 있는 공교육 붕괴와 맞물려 일어나고 있는 사교육시장의 과열, 바로 거기서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부모의 경제력 차이가 아이들의 성적 순위를 결정짓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덧붙여 천정부지로 치솟는 대학 등록금과 그로 인해 취업 후 빚쟁이가 되어버리는 청년들의 현실까지.

 

흔히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 내지는 불평등의 체제를 말할 때 위의 세 가지, 즉 노동, 주거, 교육 문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진정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 단순히 시스템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기만 할까요? 이 문제적인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데는 단순히 국가와 정치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한 사회의 구조는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의 행위자와 순환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행위자들은 구조 속에서 단순히 파편화된 삶을 수동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구조에 맞서 자신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가치나 관행을 끊임없이 창출해갑니다. 그것이 바로 제도입니다. 제도는 구조의 결과인 동시에 구조를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제도는 문화(culture)와 크게 다른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욕은 달리 부르자면 모욕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모욕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제도로써나 관행으로써나 타인을 모욕하지 않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 그것은 품위의 문화적 제도화를 실천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태도와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신앙은 서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요?

 

 

2. 모욕의 문화를 넘어 이웃이 되는 길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은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로지 누가복음에만 발견되기 때문에(특수성), 동시에 앞뒤의 문맥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인해(비유사성),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행한 몇 안 되는 진정한 비유로 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대략적인 본문의 구조를 보자면, 25절에서 율법교사가 먼저 예수께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가 반문합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었더냐?” 율법교사의 대답,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에 예수가 그 대답을 긍정하고, 그대로 행하라고 지시합니다(28절). 여기까지가 첫 번째 대화입니다.

 

한편, 학자들은 29절에서부터 37절까지 이루어지는 대화가 그 앞부분과 서로 다른 주제, 즉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와 이웃이 누구인가로 구별되기 때문에 두 이야기는 원래 전혀 다른 맥락에 있었는데, 누가가 이것들을 하나로 편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25~28절의 대화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설명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29절의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질문은 28절의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얘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저는 굳이 두 부분을 따로 떼서 살펴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런 본문의 맥락에서 본다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으로 제시된, 다시 말해 이웃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기 위한 예시적 비유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과 자기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된다는 것인데, 얼핏 보니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강도만난 자와 같이 불행하고 위급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이웃 사랑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웃을 잘 도와줌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얘기로 별 어려움 없이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강단에서 바로 이와 같은 식으로 이 본문이 오늘날까지 해석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신약학자들만 이런 해석에 동의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조금만 신중하게 본문을 읽어 본다면, 뭔가 이상함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29절에서 분명 율법교사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대상, 다시 말해 자신에게 영생을 안겨줄 사랑의 실천 대상으로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예수는 37절에서 갑자기 강도 만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한 주체로서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문맥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자 했다면, 응당 예수의 마지막 질문은 “이제 니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누구인지 알겠는가?”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은 채, 사랑을 베푼 주체로서 이웃이 누군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맥상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학자들 중의 일부는 25~28절의 영생에 관한 대화나 29절과 36~37절의 이웃에 관한 대화를 10장 30~35절과 완전히 분리시켜 비유 자체의 독립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비유의 원래 주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든가 아니면,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로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의 마지막 질문이 앞서 율법교사가 던진 질문과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비유만 떼어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의 갑작스러운 질문 전환이야말로 이 이야기(10:25~37)를 하나의 유기적인 결합체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키워드가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일단 예수의 비유는 지극히 일상적인 차원의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맨 먼저 신원이 불분명한, 즉 단지 ‘어떤 사람’이라고만 알려진 인물을 등장시킨 뒤에, 그를 중심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고 하는 다분히 정상적이고 대표성이 뚜렷한 유대적 주체성과 그 반대편에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역시나 타자성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날 수 있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우연성과 필연성이 교차하는 일상적 삶의 바탕을 리얼하게 재현한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인 예수는 당시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왕래하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 빠르게 갈 수 있음에도 굳이 여리고로 돌아서 가던 당시의 문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유대세계, 즉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마리아 가운데 존재하는 서로 간에 일상화된 모욕의 문화를 염두에 두고 예수는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서 이웃사랑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준 것입니다. 즉, 예수가 ‘이웃-되기’가 실천되어야 할 상황적 조건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설정했다는 사실부터 이미 그가 의도한 담화의 목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 특히나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이 정결법을 지키는 데 철두철미한 이들에게 시체로 보일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람을 피해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레위기 21:1절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지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강령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여전히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던 그 어떤 사람에게는 이 순간 버림 받음 즉 ‘모욕 당함’을 정당화해주는 폭력의 제도에 다름 아닌 것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강도를 당한 어떤 사람과 같이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웃이란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관행화된 모욕의 제도로 인해 도움 한 번 못 받고 그대로 죽게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함과 동시에, 유대인의 입장에서 모욕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되던 사마리아인이야말로 모욕을 철회하고 대신에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할 대상으로서 이웃이라는 사실을 중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웃 사랑을 실천할 주체로서 유대인 율법교사는 예수의 비유 가운데서 위기에 처한 어떤 사람이 됨으로써 자신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사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임과 동시에, 자신들이 결코 동일시할 수 없던 타자 중의 타자인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위기에 빠진 이웃을 사랑으로 구원해야 할 이중적 상황 속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황을 통해 그들이 일상적으로 반복해온 모욕의 문화를 진지하게 문제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모욕의 문화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영생은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쪽에 서나 모욕당하는 자와 스스로를 동일시해야만 하는 이 역설적 상황 속으로 유대인 율법교사를 끌고 감으로써, 타자를 나의 영생을 위해 동원되는 사랑의 대상 곧 이웃으로 객체화하고, 그에 대해 스스로를 사랑의 실천자로 주체화하던, 그런 관계설정의 방식까지도 논리적으로 해체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궁극적인 목표는 율법교사로 하여금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위기에 처한 강도만난 자가 되라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차라리 율법교사가 이웃사랑의 주체인 동시에 누군가에게 이웃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기묘한 상황 속으로 데려감으로써, 모든 이들이 하느님 앞에서 그저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잘 알려진 철학적인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이른바 ‘이웃-되기’의 지평을 예수께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를 제도적으로 모욕하지 않는 사회, 곧 품위 있는 사회는 결국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 그런 사회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관행과 무의식과 습속과 제도와 의례들 가운데 끊임없이 틈입하는 모욕의 문화를 경계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에 도전해나갔으면 합니다.

 

끝으로 최근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글 한 도막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가 사용한 ‘진보’란 단어를 ‘그리스도교(신앙)’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어 그대로 가져와 봤습니다.

 

"이 땅의 진보는 아직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잘못된 거울을 바꾸는 길밖에 없다고 믿는 경우도 많다. …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진보가 정당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이 참을 수 없는 세상에 저항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진보정치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재구성해야 한다.”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中)


_정용택(CAIROS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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