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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다시 보는 성서, 새로 찾는 신앙

“삶과 앎의 유혹들, 그리고 빈틈” - 신26:1-11, 롬10:8-13, 눅4:1-13 [ironist]

시편 91:1-2, 9-16
주님은 나의 피난처 /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 네게는 어떤 불행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네 장막에는 / 어떤 재앙도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천사들에게 명하셔서 / 네가 가는 길마다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니, 너의 발이 돌부리에 부딪히지 않게 / 천사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가 나를 간절히 사랑하니, 내가 그를 건져 주겠다. 그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 내가 그를 높여 주겠다. 그가 나를 부를 때에 /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내가 그를 건져 주고 /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 내가 그를 만족할 만큼 오래 살도록 하고 /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겠다."

 
제1독서 신명기 26:1-11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시는 그 땅에 너희가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고 살 때에, 2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서 거둔 모든 농산물의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거라. 3 거기에서 너희는 직무를 맡고 있는 제사장에게 가서 '주께서 우리 조상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제사장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 오늘 아룁니다' 하고 보고를 하여라. 4 제사장이 너희의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 주 너희 하나님의 제단 앞에 놓으면, 5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어라.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므로, 7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8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주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0 주님, 주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그리고 너희는 그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 놓고, 주 너희의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11레위 사람과 너희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와 너희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려라. 
 

서신서 로마서 10:8b-13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복음서 누가복음 4:1-13
1.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해서,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3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4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하였다."(신 8:3) 5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6 그런 다음에,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것은 내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것이니, 7 내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신 6:13) 9 또 다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10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시 91:11, 12) 11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12 예수께서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4)'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신 6:16) 13 악마는 모든 시험을 다 한 뒤에, 잠시 동안 예수에게서 떠나갔다.
 

1. 설교하기의 어려움

근 20년이 넘게 목회의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난감함중에 하나는 설교하기의 어려움입니다.(아, 벌서 20년이 넘게 목회의 길을 걷고 있군요.) 아마 목회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곤란함중에 하나가 설교하기일 것입니다. 아마 한국에 있는 목회자들의 99.99%가 이 곤란함을 이야기할 것이고, 10명중에 8, 9명은 다른 유명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도용하거나 직간접적으로 인용하지 않았을까하는 것이 제 깜냥입니다. 아니면 비싼 돈을 들여서 모모한 설교연구소에서 보내는 자료들을 가지고 적당히 편집하거나 가필해서 자신의 설교를 만들거나, 부목사들이 써주는 원고로 설교하곤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께서는 평신도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서재에 이러한 설교연구소에서 보내준 설교 예화와 자료들이 서류 캐비넷 10개 분량으로 주제와 색인별로 분류되어 있는 것을 보았고, 또 주기적으로 이런 자료들을 계속해서 보충해서 보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 정도의 분량이라면 평생 설교를 해도 자료들이 남아돌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설교자료들이 있어도, 늘 설교자들은 설교자료의 부족함을 느끼곤 합니다. 주일날해야하는 대예배 설교는 물론이고, 매일같이 해야하는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 금요철야기도회에 심방설교를 포함한다면 일주일에 적어도 10편 이상의 설교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금란 신전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이를 공룡의 멸망원인과 관련시켜 표현하기도 합니다. 중생대 지상의 패권을 잡았던 공룡의 멸망원인으로는 6~7가지 정도의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 이론중에 한 가지가 먹이부족에 대한 것입니다. 중생대의 거대파충류들은 지상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엄청나게 큰 덩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대파충류들은 깨어있는 시간을 끊임없이 음식물을 섭취해야만 했고, 결국 자신의 덩치를 유지하기 위한 음식물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되자 거대 파충류들은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공룡멸망의 원인이 단지 먹이부족이라는 이론만으로 일매지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론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현대 한국 교회의 목회자의 양태와 미래적 가능성의 한 단면을 예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더불어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덩치를 불리는 메가처치라 불리우는 거대교회들의 향배들도 점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설교와 관련해서는 개신교와 다른 종교의 종교적 의례를 비교해서 주목해 볼 시사점들이 있습니다. 개신교의 설교보다는 상징적인 함축을 많이 담고 있으며, 비교적 미학적으로도 잘 정련된 예전과 의례의 반복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의 미사나, 일년에 몇 차례의 설법만으로도 유지가 가능한 불교를 대비해서 성찰해본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권력을 구조화시키는 관계와 짧게는 몇 백년에서 길게는 몇 천년이라는 종교의 지속시기와 더불어 상징의 전파와 교육은 어떤 중요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오늘 설교를 짧게 하고, 예전과 의례를 길게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 것입니다. 사실,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는 것에는 어떤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게 됩니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매주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가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데 상수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이 담임을 하고 있지 않는 교회에 부흥회나 혹은 특별강사로 초청받아가게 되면 자신이 평상시에 전공처럼 떠드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편하게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부흥사들이 3박4일간 부흥회할 설교 레파토리 6개내지 7개를 가지고 있다면 몇 년동안 다른 준비가 전혀 필요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또 계속해서 다른 관계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의 설교는 미묘한 난감함을 갖게 합니다. 낯설음과 낯익음의 중간과정 혹은 문학적으로 말한다면 ‘개와 늑대사이의 시간’이라는 모호함속에서 설교가 진행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성서일과와 교회력

지금은 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제가 소속된 감리교에서는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3년이라는 기간을 단독 목회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목사가 없는 교회에 담임자가 되어서 목회에 관한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있습니다. 목회에 관한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하고 진행하고, 또한 해마다 보는 시험과 논문을 제출해야했고 3년동안 통과해야했고,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있는지를 검증받아야만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감리교 목회자들은 보통 이 기간에 자신이 하게 되는 설교의 밑절미가 잡히게 됩니다. 이때 자신의 설교 방식에 대한 좋은 역할모델이 있다면 좋은 설교자로 자랄 가능성이 생기게 되지만, 대부분 목회자는 그런 모델을 갖지 못하고 너무나 많은 설교에 치여 나쁜 습벽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의 도용과 편향된 설교, 편향된 성서 본문의 사용 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은퇴를 하시면서 자신이 그동안 했던 설교의 본문등을 살펴보니 평생동안 요한 계시록 본문을 가지고는 단 한차례도 설교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의 탄생 초기에 이미 구약을 폐기하려던 마르시온같은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를 기억한다면 어떤 편향들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인식의 틀과 삶의 정향들이 어떤 특정한 방향을 지니고 있고, 또 그 방향만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고집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신에게 친숙한 어떤 방향에 대한 고집은 성장의 과정과 생존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생후 2년 이하의 아기들이 거울단계를 통과하면서 자기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이러한 이미지가 제공하는 외형적 게스탈트를 통해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일성과 통제력을 갖게되고, 자아의 원형과 윤곽을 구성하게 된다고 라깡은 말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도 1914년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리비도의 내향성 개념을 설명하면서 기본적으로 대상성애 이전에 우선적으로 자아를 향한 리비도 투여, 즉 1차적 나르시시즘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얼마전에 이와 관련된 심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대의 여자와 남자 열 사람씩을 뽑아서 어떤 방으로 들여보냅니다. 이 방에서는 여러 장의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을 자세히 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하나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선택한 사진이 어떤 사진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여남 공히 선택한 1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이 누구의 사진일까요? 사람들이 선택한 사진은 자신의 눈, 코, 입을 그대로 따다가 이성으로 보이게끔 만든 자신의 사진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호감을 느끼는 이성의 사진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점은,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1차적 나르시시즘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생존에 대한 필요조건을 형성해주는 것인지 모릅니다.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친밀감을 느끼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우월감을 획득 형성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능력을 성장시켜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울단계가 보여주는 모방효과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하게 정면으로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상대방을 피해서 길을 걸어가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길을 비껴가려고 하면서도 번번이 자기 앞으로 가로막는 상대방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무익한 시도가 지나고 난 후에 어떤 한 사람이 지나가려는 시도를 멈추고 가만히 있거나, 혹은 한 숨을 고른 이후에 상대방이 선택한 방향과는 다른 쪽을 선택해서 지나갔던 경험들을 한 두 차례씩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를 해석하면, 바로 유아들이 생존을 위해서 가장 탁월하고, 평이한 전략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며, 이것이 생존조건으로 우리 몸에 여전히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 생존의 조건이 바로 인간의 성숙을 위해서는 한계로 작용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생존과 성장과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타자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가 성숙과정의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타자와의 대면과정을 결론적으로 미리 선취해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철학자 김영민의 말대로 ‘대화적인 긴장의 과정과 이를 견디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적 긴장과 시숙(時熟)의 과정과 결과’ 이것이 성숙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좀처럼 성숙해지기 어려운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성장과정을 통해서 일정한 패턴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서양적인 공부방식, 앎의 방식도 이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방식을 잘 터득해서 교과서 몇권를 읽으면서 그 내용을 파악하고, 인식이 끝나면 답안이 나오는 것으로 앎의 과정은 끝나게 됩니다. 우리가 대부분 겪게 되는 제도화된 학문의 과정은 이를 확대해서 반복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시작해서 박사과정과 박사후 과정까지 아마 대부분의 책 읽기와 글 쓰기가 이런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가 아는 과정을 조금씩 확대해 나가는 과정, 그래서 타자와를 직면하거나 대면하지도 않고, 자기화된 타자로서의 타인, 아니 거울상에 비친 자기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설교에서 본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인식패턴, 혹은 자기가 선호하는 본문을 선택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의 결과 중에 하나가 오늘 제가 선택하게 된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성서일과는 성서일과를 만드는 교단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3년을 주기로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를 중심으로 1년의 일과를 만들고, 요한복음은 세 주기에 골고루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1독서로 구약 성서를, 제2독서로 서신서를, 그리고 시편의 교독과 복음서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3년을 이 일과에 따라 설교를 준비하게 되면 비교적 성서 전체를 골고루 설교의 본문으로 사용하게 되고, 균형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때로는 낯선 성서 말씀을 깊이 만나게 되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교회력은 성탄절 4주전인 대림절을 시작으로 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이나 오순절, 창조절 혹은 왕국절로 한 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한 해의 절반이 지나는 시기에 맥추감사절이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추수감사절 등이 들어가게 되고, 때로는 다른 기념일이 참조되기도 합니다. 교단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를 상징하는 창조절이나, 예수님의 재림후의 왕국을 의미하는 왕국절이 성령감링절이후 13번째주일에 지키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세계의 창조와 완성을 미리 맛보며, 이 과정을 통해 시간을 통한 성숙을 도모할 수 있기도 합니다.
 

3. 본문 말씀

시간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이야기는 대가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어거스틴이 이야기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론에서 ‘기억된 현재’로서의 과거와 ‘직관된 현재’로서의 현재와 ‘기대된 현재’로서의 미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억과 직관과 기대로서 과거와 미래를 현재 안에 숨쉬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신명기 말씀은 바로 어거스틴이 말하는 기억된 현재와 직관된 현재가 만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이 자기 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그곳에서 일해서 첫 소산을 얻게 될 때, 바로 그 때에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면서 학대받고 괴롭던 기억들을 상기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매해 첫 열매의 기쁨과 첫 소산의 기쁨을 지금 현재의 기쁨으로만, 우리가 거하고 있는 공간만의 시간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습니다. 배고픔이나, 허기를 메우고 난 이후의 풍족함에만 매달리게 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나 뜻이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기가 배고파 울고, 젖을 먹고나면 트림 한 번 한 이후에 다시 잠이 드는 것과 비슷하게 자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고, 보지도 않는 젖비리내나는 유아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참새새끼의 주둥아리 옆에 붙어있는 노란색과 같은 지표일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것은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는 참새 주둥아리의 노란색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사가는 첫 열매의 기쁨을 ‘기억된 현재’로서 과거와 연결시키며, 지금 우리가 풍족하기 때문에 잊어버리거나, 도외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상처의 기억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현재의 첫 열매의 기쁨이라는 ‘직관된 현재’는 학대받고 괴로던 이집트라는 ‘기억된 현재’와 만나면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 소산을 첫 열매를 자기의 것으로 삼지않고,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 정착할 땅을 받지 않았던 레위 사람들과 너희 가운데 있는 외국 사람, 즉 타자들을 위해 나누는 열매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첫 열매를 현재의 자기와는 다른 조건과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상기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었던 종교적 의례는 그들의 일상속에 숨어있거나, 은폐되거나, 망각된 것들을 나타내거나, 들추어내거나, 직면하도록 만든 반복적 사건이었습니다. 늘상 자주 만나 반듯하고, 매끈하고, 틈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은 시공간에 어떤 비어버린 틈이 있음을 보여주거나, 만들어내면서, 자신과 이웃들을 변화시키는 어떤 실천을 감행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통해서 타자를 만나는 사건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과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일상 속에 타자를 만나는 사건의 핵심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를 만나는 사건과 연관시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는 사건을 잘 표현해주는 말씀이 오늘 서신서의 말슴입니다.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 이야기는 핵심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영과 육, 말씀과 행위, 피안과 차안 등등의 이분법적인 사고와는 다른 그 둘이 서로 관련을 긴밀하게 맺고 있는 통전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행위의 중요성이 기독교인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행위를 지지하는 성경 본문 말씀이라고 받아들였고, 또 그렇게 해석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영영죽어 지옥에 떨어질 죄인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마법의 주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아직도 그 일부에서 사영리를 들고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복음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나가도록 만드는 그 핵심적인 근거가 바로 이 말씀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사영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특정하게 이해하는 방식, 그래서 어떤 형태의 ‘고백’이 기독교인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 말씀은 립 서비스(lip-service)나 문자화된 시기에 책을 읽고 발음을 하듯이 하는 말씀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행위는 어쩌면 우리가 공부하는 방식처럼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소유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이를 ‘희랍적 사유’와 관련시키고 있으며, ‘명사적 사유방식’, 혹은 ‘시각적 인식행위’와 관련시켜 이야기할 수도 있고, 이런 사유방식에서 나오는 공부방법을 <페다고지: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을 쓴 파울로 프레이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은행저축식 공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유함으로써, 보는 것으로, 무엇을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조금 긴 이야기가 필요한 이야기이지만, 쉽게 예를 들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과 그에 따른 대답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물의 형태는 있지만 물이 없는 것을 우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명사적 사유방식, ‘시각적 인식행위’는 아마도 물이 없어도 형태만으로 우물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사적 사유, 희랍적 사고, 시각적 인식행위, 은행저축식 공부방법과 대별되는 동사적 사유, 히브리적 사고, 청각적 인식행위, 문제제기식 공부방법은 아마도 거기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 물을 사용할 수 없다면 우물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말은 곧 힘을 의미하고,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존재의 비밀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본질인 이름은 비밀스러운 것이었고, 알려지면 안되는 것이었고, 함부로 부르면 안되는 것이었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신비사상속에서 로봇처럼 등장하는 골렘을 만들 때는 진흙으로 만든 형상속에 존재의 이름을 써넣기만 하면 살아서 움직인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존재의 비밀을 의미하며,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단지 기존에 내가 알던 사고방식이나 행위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행위는 나의 삶의 패턴, 삶의 양식, 가치관, 버릇 등등을 이제는 전혀 다른 가치로 전환시키겠다는 행위이며, 다르게 살아가도록 만든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에 내가 살아왔던 삶의 패턴과 앎의 양식과는 다른 삶과 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내가 알아왔던 삶과 앎을 극대화시키는 욕망을 죽이고 비우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방법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삶과 앎의 양식과 패턴, 버릇과 습관을 지우고 비우는 여백을 마련하는 지속적인 노력, 그래서 우리 삶의 광야로 나가는 성령의 인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행위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삶의 패턴, 양식, 가치 기준을 확고하게 뒷받침해는 주는 방식,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그 행복을 저 세상에 까지 가지고 가려고 하는 욕망의 극대화로 이해해서는 곤란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역전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유아였을 때 생존하기 위해서, 또는 성장하기 위해서 습득하거나, 채택할 수 밖에 없었던 전략을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한다는 것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재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이 말씀은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을 위해 나의 삶과 앎에 어떤 틈을 마련하고 있는가, 그 분의 뜻이 움직이고 작동할 틈을 나는 마련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한 의례입니다. 나의 일상에 그 분의 뜻이 숨쉴 시공간을 마련하는 것. 하지만 이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행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신약성서 시대에도 아주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본문이 존재가 그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의 누군가는 ‘주여, 주여’라고 하면 입으로 외친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알거나 인식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유아의 생존전략과 성인의 성숙한 삶을 보여주는 좋은 대비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미성숙한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생존전략은 먹을 것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과 눈에 보이는 이적을 통한 명예(혹은 인정)입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초기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의 극대화가 삶의 최종적인 목표는 아닌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간 예수는 성장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채택했었던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의 방식과의 싸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빵과 막강한 권력, 그리고 이적을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 이와 대립하여 보이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눈에 보이는 힘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이적보다는 그런 시험으로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삶의 방식이 대립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왔던, 생존해왔던 삶의 방식을 극대화시켜라. 그것이 나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을 지속하도록, 안전하도록, 영원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유혹은 나의 삶과 앎의 양식에서 나오는 자기 자신의 유혹이며 그래서 악마의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삶이 안전하다는 확실성을 요구하고, 보장받고 싶어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생존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의 생명이 아니며, 더구나 그것의 극대화는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생명이라고 하는 앎 또는 생각을 넘어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님을 생존의 극대화를 상징하는 궁전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삶과 앎이 아닌 새로운 삶과 앎, 다른 삶과 앎으로 초대합니다. 광야의 빈 틈으로...._ironist(CAIROS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