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I 호랑이는 살아있다. 2000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ego/I)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개역개정판)
한때 열정적으로 소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그런 신앙생활을 이끌어간 성서본문을 하나쯤 갖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그런 본문이 있습니다. 소위 회심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10대 후반부터 가히 미친 듯이 신앙생활에 매달렸던 20대 초반까지 대략 6-7년 동안 저의 모든 생각을 지배했던 본문이 바로 오늘 읽은 로마서 7장, 특히 14절부터 25절의 본문입니다. 로마서 7장부터 8장에 이르는 성서의 본문을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이 결국 저를 신학공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대체 로마서 7장에 무엇이 있기에 저는 그토록 그 본문의 해석에 매달렸던 것일까요? 저는 로마서 7장 7절부터 25절까지, 특히 14-25절에서는 현재시제로 나타나고 있는 ‘나’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4-15년 정도에 이르는 저의 신앙여정을 특징짓는 중요한 분기점은 로마서 7장 7절부터 25절의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바울의 ‘나’(ego)를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의 변화에 그대로 대응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비록 민중신학도를 자처하고, 성서학도로서 주된 연구주제를 역사의 예수와 복음서로 잡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제게 바울의 로마서, 특히 로마서 7장과 8장의 본문은 (제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그리스도교적 현실관/세계관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전망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제 자신 안에서 해석 및 정리가 일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지난 며칠 간 로마서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 나가면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학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현대인문학 전반의 견지에서 보건대, 바울은 정말 위대한 사상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왜 요즘 인문학의 핫이슈인지를 알기 위해선 역시 로마서 7장을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라캉(Jacques Lacan)보다 1900년 전에 이미 “주체의 분열”을 말했고, 프로이트(Sigmund Freud)보다 1800년 전에 이미 무의식적 욕망에 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헤겔(G. W. Friedrich Hegel)보다 1700년 전에 이미 변증법적 사유를 했던 인물입니다.
다시 7장의 ‘나’에 관한 논의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저는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되고나서 성서를 정말 열심히 탐독했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서 7장의 본문 앞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마치 저를 대신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본문을 접했을 때, 저는 당연히 바울이 말하는 ‘나’가 자기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감동과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조차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처음 읽은 어느 보수적인 성서학자의 로마서 주석에서는 바울이 거듭 말하는 ‘나’가 로마서를 쓰고 있을 당시의 사도 바울 자신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 바리새파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회심 이전의 불신자를 대변하는 전형으로서의 ‘나’(paradigmatic ‘I’)인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분분하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 본문의 해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학자들은 이 본문의 해석을 두고 논란을 벌여 온 것일까요? 본문을 읽어봐서 아시겠지만, 이 본문 안에서 묘사되고 있는 ‘나’는 자신 안에 들어온 (율법의) 계명을 통해 죄가 틈입한 탐욕적인 존재이고(8), 급기야 죄가 살아나서 죽음으로 이끌린 존재였습니다(10-12).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려고, 죄가 그 선한 율법을 방편으로 ‘나’에게 죽음을 일으켰습니다.”(13). 일단 여기까지만 보면, 바울의 진술은 율법과 ‘나’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율법은 선한 것인데, ‘나’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율법이 선한 이유는 바로 ‘나’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는 의지가 있음에도 이를 행하지 않는 모순된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13-16).
문제는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라는 사실이며(17, 21), 더 나아가 이 ‘죄’와 ‘나’가 분리될 수 없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즉,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으며,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으며,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지킬과 하이드처럼, 혹은 <파이트클럽>의 잭과 타일러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로 인해 고통스러운(곤고한) 사람. 과연 바울이 말하는 이 ‘나’는 누구일까요? 바울 자신이라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도인 그가, 이런 이중적인 혹은 분열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나’가 일차적으로 저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당시 접했던 많은 책들과 설교들은 한결같이 이 ‘나’는 바울 자신이 아니며, 그렇다고 신자 일반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해석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인가? 내가 경험한 감격스러운 회심과 성령의 감동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하나님 체험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반대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째서 나는 여전히 로마서 7장에서와 같이 내 안에 꿈틀거리는 ‘죄’의 힘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그리스도이기는 한 것인가? 이러한 실존적인 물음을 해결하고자 수많은 시간을 기도와 독서 가운데서 보냈습니다. 시기마다 제가 접했던 책들이 제시하는 해석에 입각하여 그에 맞는 실천들을 강구해 보았으나, 여전히 저는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비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모순적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학문적으로 별로 가치 없는 책들이긴 하지만, 그때는 그나마 제가 구해서 읽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신학서적들이었던, 소위 로마서 강해설교들을 하나씩 하나씩 섭렵해 나가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예컨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저는 군대에서 근본주의(분리주의적 배타주의) 기독교의 대변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의 『로마서 강해』(전16권)를 다 읽었습니다.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로마서 7장의 ‘나’는 “정죄함은 경험하였으나 회심은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중생하지 않은 것도 중생한 것도 아닌”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이 ‘나’는 부흥 혹은 영적대각성이라고 하는 특별한 상황 가운데서, “성령에 의해 죄의 자각 하에 놓여” 스스로가 “완전히 정죄되었다”고 느끼며, 그들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아직 복음을 깨닫지는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을 따라,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기 위해 날마다 성령세례를 갈구하며, 저 혼자만의 부흥회(?)를 대성산 정상에서 벌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아도 여전히 저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저는 절망했고, 저의 상황과 정체성을 적절히 설명해줄 수 있는 이 본문에 대한 다른 해석을 찾아다녔습니다.
물론 그렇게 이 책 저 책 열심히 읽었지만, 여전히 그 모든 책과 설교들은 로마서 7장 7-25절의 ‘나’는 현재의 사도 바울 자신도, 그렇다고 그리스도인 ‘나’도 아니라는 주장만을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의 더글라스 무(Douglas Moo)처럼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 즉 바울이 ‘기독교적인 이해를 갖고서 자기 자신 및 자신과 같이 모세의 율법 아래 사는 다른 유대인들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라고 보거나, 아주 단순화시켜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아담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을 지칭한다고 보는 전통적인 견해까지. 저는 그 어떤 해석에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해석대로라면, 저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경험한 그 모든 하나님경험과 구원체험은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민 많은 군생활을 보내고 제대를 해서, 어느 날 기독교 서점에 들렀는데 마침 IVP에서 나온 복음주의 설교자 존 스토트(John R. W. Stott)의 『로마서 강해』(1996/2002)가 눈에 띠었습니다. 저는 스토트의 다른 책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기독교의 기본 진리』,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등 그의 모든 저작을 이미 감동적으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로마서 강해』에는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의 로마서 7장 해석이 여전히 제 고민을 해결해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는 분명 이전의 어떤 학자나 설교자들보다도 이 본문에 나타나는 긴장을 균형 있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 선한 것을 열렬하게 행하고 싶어하는 것이나, 중생한 사람이 그것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이상하긴 마찬가지이다(15-19절). 어떻게 죄로부터 해방된 중생한 사람이(6:18, 22; 8:2) 자신을 여전히 죄의 종이며 그 안에 사로잡혀 있다고(7:14, 23-25) 묘사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원수가 되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8:7) 어떻게 그 법 안에서 기뻐한다고(7:22)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두 극단적인 입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본질적인 모순이 있다. [존 스토트, 『로마서 강해』(2002), 269]
스토트는 본문이 모순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모순적인 본문이 제 안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 자신의 경험 역시 모순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의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모순을 점점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트는 이 모순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기발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본문에 나오는 저와 같은 ‘곤고한 사람’이 바울이 살던 시대의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 곧 중생(거듭남)하긴 했지만 자유롭게 되지는 않았고 율법 아래 있지만 아직 성령 아래 있지는 않은 사람들의 전형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구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는 이 모순된 표현을 통해 그들이 비정상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사랑한다는 면에서는 거듭난 표식을 보여 주지만, 그들의 종교는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며 성령이 아니라 육신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들을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에 비유하기까지 합니다. 살아 있기는 하지만 아직 손과 발이 묶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그의 해석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구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왜 스토트는 나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이 본문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개념에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실망 가운데 그 책을 결국 덮어버리려던 찰나에 우연히 스토트가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의 『로마서 주석』(2003)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번역되어 출간된 그 책을 구입하여 읽으면서, 저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만났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온 문제에 대한 답변을 던을 통해 얻을 수 있었고, 종래의 제가 만났던 그 모든 개혁주의/복음주의적 해석과 결별을 단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의 모든 개혁주의/복음주의적 해석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하나의 통일된 주체성을 가진 존재의 실체를 전제하고서 이 본문에 접근하고 있었지만, 던은 과감하게도 그리스도인이란 애초부터 분열적인 주체라는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더 이상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던에 따른다면,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나’는 ‘아담의 시대와 그리스도의 시대 사이에 끼여 있는 종말론적 긴장 상태’를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칭합니다. 그는 율법이 분열되어 있는 것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인 역시 분열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4-25절의 ‘나’에 관한 바울의 현재적 묘사 중 어떤 것도 바울에게 완전히 지나간 과거의 어떤 상태나 경험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현재 상황을 일차적으로 전제한,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나’라는 것입니다.
던은 로마서 6-8장 전체에서 하나의 “변증법적 구조”를 보며, 이 구조 속에서 바울이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니’라는 종말론적 긴장의 실재와 심각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존 스토트는 이것은 ‘긴장’이 아니라 ‘모순’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던의 주장에 관한 가장 정확한 지적 같아 보였습니다.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무릇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어떤 일관된 정체성―이를테면 율법이 금지한 죄를 욕망하지 않는―을 가진 존재여야 하겠지만, 오히려 던에게 있어서 바울의 ‘나’라고 하는 수사학적 인물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의 절대성, 완결성, 객관성, 보편성의 틈새와 균열을 드러내는 무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던이 해석하는 바울의 그리스도인이란, 종말론적 모순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로서 이미 분열된 주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던은 7장을 넘어 6-8장 전체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이러한 종말론적 모순의 현실을 변증법적으로 구조화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보수적 학자들이 8장에서 묘사되는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7장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던이 7장과 8장을 동일선상, 즉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적 긴장의 구조에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던은 8장에서 강렬한 직설법으로 서술되고 있는 미래의 구원에 대한 확신 자체가, 7장에서 묘사된 대로 신자가 현재 사로잡혀 있는 종말론적 모순을 해소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저는 던의 주장과 그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적인 견해를 최대한 꼼꼼히 따라 읽으면서, 던이 해석하는 바울이 복음주의자들이 그리고 있는 그 바울보다 신학적으로 훨씬 심도 있고, 주석학적으로 정교하며, 인식론적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경험한 실존적 현실과 로마서 본문을 가장 잘 연결시켜주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의 바울은 신자가 여전히 처해 있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 즉 제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이 육신과 사망의 세상에 속한 일부라는 현실적 상황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바울의 가르침이 끊임없는 도덕적, 윤리적 패배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오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신자들이 죄에 대한 굴종을 정당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리라고는 추호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크 라캉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정신분석 이론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이 말은 사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뒤집은 말입니다. 라캉은 근대 철학의 대전제인 주체의 투명성, 주체가 “주어졌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주체의 밑에는 ‘그것’(id)이, 즉 무의식이 존재하며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의식입니다. 저는 이러한 라캉의 탈중심적이고, 탈장소적인 무의식적 주체론을 이미 바울이 오래 전에 선취했다고 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이 말하는 죄, 그것을 우리는 무의식적 욕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의식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무의식까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무의식적 욕망을 얼마만큼 인정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 본문을 이해하고, 또한 그와 관련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①말해진 주체(담론 속에서 설정되는 주체)와 ②말하는 행위(행위 자체에서 설정되는 주체)의 주체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4-25절의 본문으로 이 논의를 가져와 보면, 말해진(언표된) 주체 즉 담론 속에서 설정되는 주체로서 ‘나’, 곧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행위(언표 행위), 즉 행위 자체에서 설정되는 주체로서 ‘나’는 여전히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7:25). 후자의 ‘나’, 즉 욕망하는 무의식적 자아의 탄생으로 인한 주체의 분열은 이미 율법 자체의 분열에서부터 예고된 것입니다. 바울에 따른다면, 율법 자체가 이미 그 본질과 기능에 있어 각기 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율법은 선한 것이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 그 기능상 율법을 통해 죄가 살아나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던이 해석하는 바울에 따르자면, 율법의 분열이 곧 율법을 소유한 인간의 분열이기도 합니다. 분열 혹은 모순적인 것이 이미 율법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율법을 모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모순과 분열이 피할 수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순은 그 자체로 틀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실상 모순적인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것입니다. 이 모순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 쉽게 빠져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신자의 정체성의 일관된 본질에 집착하는 복음주의적 신앙담론과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진보적 신앙담론들이라 해서 그런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복음주의 신앙담론에서처럼 자기현전적이고 단일한 주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주체, 대상인식의 가능조건으로서 기능하는 자기의식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근대적 담론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주의적 신앙의 코기토는 그들이 꿈꾸는 상상적 자아의 허위의식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서 7장,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8장은 어떤 특별한 본질적 상(象)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주체의 특징이 언어를 통해 대상화할 수 있는 주체와 그렇지 못한 주체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후자의 주체를 보다 윤리적으로 말하기 위해 이제 바울이 성령(의 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모순의 현실을 체현한 분열적 주체로 로마서 7장의 ‘나’를 이해할 때 그 의의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분열이 가능하기 위해선 어떻게 되었든 율법의 존재를 알아야하고, 그래서 그 율법으로 인해 자신의 무력함과 자신 안에서 활동하는 죄 즉, 무의식적 욕망을 인지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그 무의식적 자아에 관한 의식적 인지 없이는 주체의 분열 자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믿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과정은 이러한 의식적 인지를 통해 무의식적 자아의 욕망을 깨닫고, 자신 안에서 의식적 신앙과 무의식적 욕망 사이의 분열을, 그 모순적인 존재의 현실을 대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한편, 주체의 모순을 인식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세계의 모순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주체의 모순을 인식하는 자만이 자신의 욕망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 욕망을 뛰어넘어 보려고 하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주체가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의 모순(7장)을 타인과 세계로 확장시켜 세계의 모순(8장)을 인식할 수 있는 자만이 세계 안에서 투쟁을 실천하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모순과 갈등에 관한 첨예한 인식 없이는 운동도 투쟁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모순을 인식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주체만이 진정 깨어있는 주체입니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타자성이든 자기 밖에 존재하는 타자성이든 그 어떤 타자성과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정립하는 ‘투쟁적인’ 주체만이 고통이나 불행의 변증법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번 제 설교 때는 로마서 8장을 살펴보면서, 바로 그런 세계 차원으로 확대된 맥락에서 종말론적 모순과 투쟁적 현실의 의미에 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_정용택(CAIROS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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