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콘텐츠/다시 보는 성서, 새로 찾는 신앙

“신앙적인 것, 모순적인 것, 현실적인 것” (2) - 로마서 8장 1-17절 [정용택]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혹은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느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느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느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느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느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느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개역개정판)
 
 
 
1. 냉정과 열정 사이
 
지난 번 설교에서 저는 로마서 7장 7-25절, 특히 14절부터 25절에 걸쳐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바울의 내면의 절규를 중심으로 바울이 말하는 그 ‘나’가 마음으로는 율법을 즐거워하되, 육체에 속한 이유로 그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며 좌절하는 ‘나’로서, 마치 주체가 생각하는 주체와 존재의 주체로 나뉘어 있다는 것, 즉 사유의 주체가 존재결여를 겪고 있다는 것, 주체는 분열된 주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분열된 주체의 모습이 곧 그리스도인의 전형 그 자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7장 25b절(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이 7장 24절의 고뇌어린 절규에 표현된 좌절감(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에 대한 해법을 알아낸 것에 대한 승리의 외침을 표현한 7:25a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다음에’ 나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지난번에도 소개한 제임스 던에 따른다면, 분열된 주체의 지속적인 상태를 보여준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되기 힘든 것입니다.
 

흔히 일반적인 신앙담론에서 말해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주체는 단지 담론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언표의 주체일 뿐이지만, 바울은 이미 오래 전에 담론 공간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적 주체의 존재를 말했으며, 주체가 율법을 인식함과 더불어 이제 율법을 거역하고 의식적 주체가 원하지 않던 악을 행하는 나, 곧 무의식적 욕망의 주체가 살아나는 경험을 고백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진정한 주체의 진실은 율법에 의해 억압되고 사라지면서도 그 사라짐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던 그 욕망의 주체, 곧 무의식적 주체 혹은 실재계의 주체에게 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주체의 모순을 인식하는 자만이 자신의 욕망과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고, 또 그렇기에 그 욕망을 뛰어넘으려고, 그 욕망의 끝까지 가보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로마서 8장 1-17절까지의 본문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앞 장인 7장에서와 같이 8장의 전반부(1-17절)에서도 역시 주체의 분열의 상징하는 종말론적 메타포들, 즉 영(pneuma, 프뉴마)/육신(sarx, 샤르크스)의 대조가 4-9절, 12-13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7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죄와 사망을 이기는 힘의 요소들, 즉 하느님의 영(9, 14), 그리스도의 영(9), 양자의 영(15) 역시 주기적으로 나타나면서 원칙적으로 우리에게 긍정적인 현실의 전망을 제시합니다. 무엇보다도 7장 24-25절에서 드러나는 ‘아직 아니’의 냉정한 현실을 일순간에 압도적으로 극복하는 8장 1-2절의 열정적인 현실 선언이 우리를 흥분시킵니다. 많은 이들이 로마서 7장의 어두침침한 골짜기를 넘어 8장 1절에 도달하면 이제 모든 절망이 끝나고 행복한 현실을 맞이한다고 해석합니다. 얼핏 보면 정말 그런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6-8장의 전체적인 구조에서 볼 때, ‘이미 일어난 구원의 현실’에 관한 원칙적인 진술이 6:1-11, 7:1-6, 8:1-9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6:12-23, 7:7-25, 8:10-30에서는 여전히 ‘아직 아니’의 냉정한 현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극단의 양측면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싶어 하는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의 종말론적 ‘긴장’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로마서의 문학적 구조라고 봅니다. 이 모순적인 현실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어 분열된 주체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긴장이 생겨난 이유는 우리가 두 시대, 즉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의(義)가 나타난 시대와 그것이 아직 완전히 보편화되진 않은 시대가 서로 겹치는 시기에 살고 있고 두 시대에 ‘동시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말이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만, 바울이 포착한 이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인 현실 인식만큼 비평적으로 탁월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단적으로 7장 23절의 여전히 우리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는 것(현재시제)과 8장 2절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과거시제), 이 극단적인 모순들의 양측면이 모두 그리스도의 경험의 일부라는 것이 바울의 진술의 요지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8장 17, 18, 22절에서 현재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난(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8장 1-2절의 해방이 과거적 차원에서 일어난 원칙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7장 25절의 진술과, 8장 12-13절의 권고를 미루어 보건대, 현실은 여전히 투쟁을 요구하는 치열한 전쟁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6장 12-23절에서 보다 자세하게 제시된 것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오늘 읽은 8장 1-9절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특히 4-6절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들과 영을 따르는 자를 대별시킨 후, 9절에서 “너희 속에 하느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그리스도인은 이제 육신에 속해 있는 자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별개의 존재를 묘사하고 있는 듯 해보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해석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해석이 정당할까요? 그렇다면 왜 바울은 10절에서 주체의 몸은 죄로 인해 죽었고, 영은 의로 인해 살아 있다는 형용모순의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죽음과 삶의 대비, 몸과 영의 대비, 죄와 의의 대비 역시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분열된 주체의 실존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 주체 안에서 ‘살아 있는 영’과 공존하고 있는 ‘죄로 인해 죽은 몸’이란 것은 이미 앞서 7장 9-11절에서, “율법 앞에서 사망 선고가 내려질 수밖에 없었던”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8장 11절은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은 오직 몸의 부활 때에야 비로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1-9절이 그리스도인 주체에게 완전히 성취된 과거지사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없는 이유는 12-13절에 나타나는 “우리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바울의 엄중한 권고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권고가 주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1-9절에 나타난 그 열정적인 직설법의 진술들이 단지 ‘그래야만 할’ 당위적인 이상에 관한 진술일 뿐, 그리스도인 주체가 처한 현재적 묘사는 아니며, 외려 현실은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2. 영(靈)을 따르는 이의 삶이란?
 
14절에서 17절까지의 본문은 18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될 종말론적 긴장의 우주적 차원을 말하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이 단락에서는 더 이상 영 대 육신의 대비가 나타나지 않으며, 대신에 주체 안에서 활동하는 특별한 영, 즉 ‘성령’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진술됩니다. 성령은 주체의 삶을 인도하고, 하느님 아버지를 아빠라고 친밀하게 부를 수 있게 해주며, 무엇보다 인간의 영과 더불어 주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성령의 활동의 목적은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그렇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성령이 확인시켜주었던 것입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17절의 “고난을 함께 받는다”(sumpascw, 쉽파스코)가 현재능동태시제 직설법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직설법은 통상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진행 중인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됩니다. 즉, ‘현재 직설법’에서 ‘현재’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행동의 종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진행 중’이거나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낸다는 뜻에서 ‘현재’라는 것입니다. 18절부터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주체의 고난이 어떤 것인지가 확대된 맥락에서 나오고 있지만, 17절까지만 생각해본다면 결국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의 수신자들에게 당시의 시점에서 역사적 예수의 고난의 삶에 반복적 ․ 지속적으로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열된 주체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그 분열을 현실적으론 불가능하지만, 잠재적으로나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성령의 도우심 덕분이겠지만, 그 성령이 그리스도인 주체를 결국 이끌고 데려가는 곳이 그리스도 예수가 고난당한 현장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역사적 예수는 이미 로마서 당시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현실에 부재하지만 그리스도로 현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전에 제가 견지하는 그리스도론을 다른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 그리스도는 모든 고난당하는 자들의 표상이자 그들과 더불어 고난당하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자 사건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적 고난의 사건에 동참하는 것만이 분열된 주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윤리학이자 구원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의 그리스도론이 기독교를 믿는 그런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한정된 교리적 담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미 그리스도인이란 분열된 주체를 일컫는 사도 바울의 은유적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스도란 사회적 고난의 담지자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은유로 보아야 하며, 그리스도인이 처한 종말론적 긴장의 현실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학적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로마서 7-8장의 본문에서 추출할 수 있는 분열된 주체, 사회적 고통, 현실과 실재의 대립, 법과 주체의 갈등, 율법 및 욕망의 이중성, 개인적 모순과 사회적 적대, 이데올로기적 판타지 같은 것들은 굳이 바울을 읽지 않아도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인문학적 테마들이자, 논쟁적인 윤리적 · 정치적 의제들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윤리적, 정치적 의제들이 신학과 무관한 인문사회과학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말해 그러한 의제들이야말로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핵심적인 신학적 사안들이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저에게 있어 신학과 일반 비판담론이 다룰 수 있는 주제 상의 구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주제나 영역에 대해서 오로지 접근하는 방식과 진술하는 어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예컨대, 자본주의에 관해서 사회과학이 말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면, 그에 관해서 정신분석이 말할 수 있고, 또 철학이나 문학이 그 나름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듯이, 신학 역시 그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신학은 자본주의를 다룰 수 없다는 그런 편견 따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설교를 통해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궁극적인 얘기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는 성서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성서를 갖고 여러분들과 우리 시대의 중요한 윤리적 · 정치적 의제들을 토론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제들이 결코 신학이 일차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구원론의 영역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3. 지금 가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길
 
이를테면 이런 것이지요. 바울이 말하는 그 분열된 주체로서 그리스도인을 매개로 하여, 오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민사회의 모순적인 행태를 성찰해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MB정권과 한나라당의 이념적 노선에 동의하여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과연 한국 시민들 가운데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정부가 선전하는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제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천안함 침몰이 북한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인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안 보입니다. 정부의 발표를 하나같이 다들 의심하고 있지만, 딱히 부정할만한 근거도 없기에, 그저 여기저기서 돌아다니고 있는 가설들을 짜 맞춰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들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4대강 사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도무지 MB정권이 하는 일 가운데 어떤 것도 신뢰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대다수의 시민들이 인정하고 있지만, 지난 지방선거에서 보듯이 이 정권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 대중들은 그렇게도 자신들이 비판하며 조롱하고 있는 정권을 선거나 여론조사 때가 되면 다시 지지하는 것일까요? 20대 보수화론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렇다면 20대들은 왜 이처럼 정치적으로 보수화된 것일까요? 2-30대와 4-50대의 정치적 보수화 요인이 구체적인 맥락에선 각기 다르겠지만, 결국 두 세대 다 취업과 부동산으로 대변되는 욕망의 경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는 결코 지지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이데올로기 및 정치세력이 현실을 지배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자신들이 믿는 가치 혹은 이념을 스스로 배반하면서, 모순을 견디는 그런 정치적 선택을 하는 동기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가상화된 욕망의 경제라고 봅니다.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적 문화에서는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책임지던 문제의 해결이 개인에게로 치환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질병, 실업, 그리고 빈곤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책임이 공유되어야 할 문제가 개인의 자기관리 능력의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효율성과 기업적 타산만을 기준으로 볼 때, 지금과 같은 격변기에 불확실한 위험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사회에서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자유는 지금까지 근대적 사회구조에서 향유하던 자유보다 더욱 협소합니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위험을 잘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위험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 즉 시민사회의 정치적 연대가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정치적 선택마저도 개개인의 난관을 해결하는 손쉬운 출구인 욕망의 경제에 스스로를 위탁해버리는 사람들의 사회가 되어버렸고, 그 결과 정치적 선택에서 있어서도 계급을 배반하는 몰가치적일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강남3구만을 제외하고).
 

바울이 말하는 분열적 주체는 그래도 자신 안에 존재하는 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주체였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는 자신의 모순에 대한 슬픔과 탄식의 정서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자신의 욕망의 ‘끝’에까지 가본 후, 그것이 사망의 길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욕망과 깊이 씨름하며 그것을 문제화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사회는 욕망의 정체와 기원에 대한 고민마저도 쓸 데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그저 욕망의 충족만을 권장하는 대놓고 속물적인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수치도 모른 채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 가장 솔직하고 바람직한 삶이라는 어이없는 이데올로기가 자유와 자기계발이란 이름으로 열렬히 소비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로마서가 여전히 우리에게 읽을 가치가 있다면, 이런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지점과 나아가 대안적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하는 삶, 그것을 선택할지 말지는 우리들 각자의 몫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영과 육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 수 밖에 없는 모순적인 조건에 처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열적인 주체의 현실을 초극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도 현재로선 그것밖에 없어 보입니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그 길은 오로지 지금 가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_정용택(CAIROS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