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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카이로스를 살아가기

무례하지도, 허무하지도 않게 [정원희]

 

 

지난 몇 주간 '문화사회학이론'이라는 대주제 아래 이름만 들어도 막강한 포스가 느껴지는 여러 이론가들과 만났다. 행위자의 자율성과 구조간의 관계 설정에 대해 뚜렷한 지향점을 지닌 스윈지우드의 균형 잡힌 서술 덕분에 원래 가진 능력에 벅찰 정도로 머리속을 꽉 채운 느낌이다. 스윈지우드는 책을 통해 독자가 뭘 고민하길 바랐을까? 의도야 어쨌건 내게 '소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해준 저자와 회원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무례하지도, 허무하지도 않게'. 언젠가부터 공부를 하든, 사람과 관계를 맺든, 어떤 일을 할 때 내 태도에 대한 지향점이 되어버린 말이다. 지난 몇 주간 이론가, 회원들과 대화하며 느낀 것도 동일하다. 풀어쓰자면 '사회 각 하위 영역의 고유한 논리를 무시한 채 내가 익숙한 영역의 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지도, 영역의 철저한 순응주의자가 되어 융통성 없는 로봇처럼 살아가지도 말자' 정도가 될까. 어떤 일을 하든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자기 의사를 표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문화사회학이론' 역시 소통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다고 하겠다. '각각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인내로써 경주하라'는 성경구절도 어쩌면 같은 말이 아닐까 싶다.

 

많은 이론가들을 만나고 배웠지만 가장 큰 빚을 진 건 베버와 부르디외다. 베버는 사회가 분화됨에 따라 사회의 각 하위 영역은 각 영역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합리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환원론, 결정론적 시각이 주는 오류를 피하게 해주어 내게 일말의 오만함도 벗어버릴 것을 요구했다. 그의 논의는 한 사람은 그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언제나 예측가능한 방향으로 행위 하는 것은 아니며 그가 속한 영역의 논리에 따라 행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삼성그룹의 회장과 나의 사회경제적지위는 현저히 다르나 동일한 대상을 놓고 정물화를 그린다면, 그림은 '미술'이라는 사회 하위영역의 고유한 내적기준에 의해 평가받는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하위 영역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니 속단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논의는 다른 영역에 있는 행위자와 소통하려면 그 영역의 고유한 논리를 따라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영화 한편을 보고 그 메시지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고 하자. 정말 그 영화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면 시대상황에 따른 사회적 함의는 물론, 영화 자체의 플롯과 기법상의 미학적 완성도까지 고려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복음을 들고 선교를 간다. 메시지의 완전성에 대한 확신에 찬 나머지 듣는 사람이 어떤 언어를 쓰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고려하지 않는다면. 오만하면 인생이 편하다. 허나 겸손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세상사는 건 어쩌면 꽤나 피곤한 일인 것이다. 베버역시 동일하게 말한 게 아닐까.

 

베버의 영역을 '장'으로, 내적 논리를 '일루지오'나 행위의 원천인 '아비투스'로 바꾸면 부르디외의 얘기가 시작된다. '장'에 진입하려면 장내 질서를 내면화 시켜야 가능하다는 그의 논의 역시 베버의 분화테제와 일맥상통한다. 둘의 논의로 인해 유물사관과 환원주의의 단순논리는 피할 수 있게 됐다. 둘의 많은 논의가 비슷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다. 베버는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 행위자가 물질세계와 문화의 변증법적 관련 속에서 행위하며 각 영역이 (형식적)합리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분화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형식적 합리성이 극대화된 영역에서 개인은 실질적 합리성을 사용하지 못하고 자유를 침해받는 새장에 갇힌 존재가 된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너무 겸손하려다 보니 이도저도 아닌 순응주의자, 카멜레온이 되어버릴 거라는 얘기다. 이와 다르게 부르디외는 행위자의 자율성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장 내에서 행위자는 그가 가진 자본, 아비투스에 따라 보존, 전복 전략을 구사하며 장 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에 대한 장 자체의 자율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도 그 반대로도 행위할 수 있다는 주장은 행위자와 영역, 그 둘 간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장 내 게임에 자유롭게 참가하되 장의 지배논리에 완전히 종속된 행위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겸손함과 줏대 없음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허나 이 논의 역시 문제를 낳는다. 장과, 행위자의 자율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경험적으로 장의 자율성이 높으면, 즉 외부에 의해 행위자들의 선택이 좌지우지 되지 않는 비율이 높을수록 장 내에서 행위자가 가지는 자율성도 높아지는 것 같다. 교육학 과목을 들으면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생활을 돌아보니 그랬다. 중고등학교에서 진로선택에 대해 혹은 인생에 대해 폭넓게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대학입시라는 말로 압축된 국가와 사회 각 영역의 압력이 중고등학교의 장을 위협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반면 상대적으로 선택의 폭이 넓고 자유롭다 느꼈던 대학에서는 중고등학교보다는 대학 내부에서의 질서와 규칙이 비교적 침해받지 않고 지켜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허나 정말 그렇다면 행위자의 성찰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뭘까? 바리게이트를 치지 않고도 짱돌을 들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아무도 '너 자신을 알라'고도 '마음이 교만해지지 말라'고도 말하지 않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지난 몇 개월 간 겸손해져야만 했고, 아직도 노력중이다. 수많은 이론가들의 얘기를 차마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잠시 동안의 귀띔만으로도 혼란스러워지기엔 충분했다. 바람직하며 당연히 옳은 것이라고 가정했던 것에 대한 의문, 이름만으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88만원 세대로서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 아직도 수 백개의 물음표가 떠다니지만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오만함을 깨닫고 버릴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날 너무나 사랑하셔서 공부할 수 있게 하시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고, 플러스 지독한 혼란스러움까지 허락하신 하나님, 마음을 나누며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 세미나 회원님들, 여러 이론가님들께 감사한다. 가끔 '삶은 00다'라고 내 나름 정의해 볼 때가 있다. '삶은 게임이다', '삶은 시다', '삶은' 계란이다....;; 최근 몇 개월, 그리고 세미나 이후, 내게 삶은 '소통'이다. 더불어 잘 살기 위해, 오늘도 :) _정원희(CAIROS 세미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