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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랜드 보어, <성서와 대안좌파> 서평


“뭐.. 뭐야. 이 책 무서워...” 

지난달에 카이로스 사무실로 한권의 책이 날아왔다. ‘논밭’이라는 생소한 출판사가 낸 이 책의 표지에는 빨간색 띠가 둘러져 있었고, 무려 체 게바라의 그림과 그것의 패러디처럼 보이는 가시관을 쓴 예수가 그려져 있었다. 제목도 무시무시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절대 읽어서도 안 되고, 더구나 서평을 써서도 안 될(그렇다. 바로 이것이 이 서평이 늦어진, 그래서 3호 발행이 늦어진 이유이다! 라고 편집장은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제목이었다. ‘성서’와 대안‘좌파’. 


이런 시절에 원제인 Rescuing the Bible(성서를 구출하기)을 ‘좌파적’으로 번역한 번역자나 출판사가 대단하다 싶지만, 사실 저자인 롤랜드 보어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오히려 이 번역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나 저자가 서 있는 지점을 제대로 짚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보어는 호주 출신의 신학자로서 남미나 아프리카의 해방신학에 비해 한국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영미권의 맑스주의 신학(과 성서비평)을 전개하는 사람이다. “비평루트”를 잘 뒤져 보면 <야훼는 게이였다?>라는 필자의 글에 그가 잠깐 소개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가서에서 무려 “그룹섹스(1:2-4), 남자, 여자, 목자, 동물이 함게 섞인 환상(1:5-2:7), 모조 남근을 가진 남자(3:1-5); 남근 송시 및 게이 장면(3:6-11); 두 여자가 물 스포츠 특히 소변보고 사정하기(4:1-15); 여자와 남자의 가학/피학(4:16-5:9); 기괴한 남자의 몸을 퀴어하게 음미하기(5:10-16); 레즈비언 sequence(6:4-12); 여자들의  절시증(scopophilia-남의 나체나 성행위를 느끼고 성적 쾌감을 느끼는 증상, 7:1/6:13-7:6/5); 유방 페티시즘과 여성 사출(7:7/6-10/9); 섹스 파티(8:1-14)”의 모티브를 찾아낸 양반이니 은혜 받고 싶거들랑 한 번 성경(性經)을 펼쳐보시길.)  


성서를 우파의 손에서 구출하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보어는 아주 솔직하게 성서를 마르크스주의의 비전, 혹은 혁명적 좌파의 비전의 도구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서를 구출하기’라는 그의 전략은 따라서 신정통주의나 계시실증주의자들처럼 성서가 가진 어떤 ‘순전한 진리’를 되찾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우파의 손에 붙들린, 그리하여 미국과, 그가 살고 있는 호주의 되먹지 못한 우파 정부를 지원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성서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와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좌파의 품으로! 


보어가 보기에 기존의 근대적인 좌파는 세속주의라는 환상으로 인해 패퇴할 수밖에 없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자유주의와, 종교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수행한 사회주의 모두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오히려 세속이 종교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종교가 정치의 전면에서 삭제되었기에 오히려 그것은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은 채로 뒤에서 정치와 손을 잡아 버린 것이다. 게다가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적으로 증폭되고 있는 영성에 대한 관심은 더 이상 정치가 종교를 분리시키거나 비판할 수 없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보어는 그가 “새로운 세속주의”라고 명명한, 정치와 종교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주장한다. 


물론 그는 이 작업을 철저히 입장성(맑시스트!)을 갖고 수행한다. 새로운 세속주의는 종교와 세속주의가 서로 얽혀 있는 세계의 현실을 인정하며, 따라서 성서가 현재 우파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 그것이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보어의 이 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중반부에서 보어는 성서학자인 고트발트, 호슬리, 종교개혁기의 좌파들인 뮌쩌와 윈스탄리, 총을든 해방신학자 또레스로부터 자신의 주장의 근거들을 끌어오고 있다. 그들은 성서 안에서 당시의 권력을 강하게 비판하며,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과 코뮌적인 삶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구절들을 찾아내고, 설교하며, 실천한 이들이다. 


좌파의 정치적 신화로서의 성서

그러나 보어는 그들과 같이 ‘확신’에 차서 “성서는 좌파다”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의 성서학자로서 그는 이러한 읽기가 가능해지는 지반을 탐색한다. 그것은 성서가 결코 일관된 하나의 신학적/역사적 주장을 담고 있는 문서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힘들의 관계에 의해 구성된 이질적인 문서라는 주장을 통해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단지 ‘주장’이 아니라 성서학계의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보어의 기여는 그것이 아카데믹한 영역에서 성서에 대한 탐구를 위해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정치적 실천을 위해 독자-대중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본 점에 있다. 즉 그는 오늘날 좌파적, 혹은 더 넓게 ‘개혁적’인 사람들을 포함한 독자-대중이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성서를 빼앗아 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말하자면 “너네만 성서 해석하냐! 우리도 한다.(좌파적으로!)”라는 것.


그러나 그러한 독자-대중의 성서 읽기는 지식인들의 성서읽기와는 사뭇 다른 형태일 것이다. 보어는 그러한 대안적인 성서 읽기를 “정치적 신화(political myth) 구축하기”라고 표현한다. 그에게 있어 ‘신화’는 어떤 대안적인 언어로서, 이미지들과 은유들이 가득하고 우리가 일상생활 용어로는 언급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언어이며, ‘정치적 신화’는 그 신화의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미래의 정치적 전망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성서는 그러한 정치적 신화의 보고(寶庫)인데, 보어는 직접 성서의 구절들을 제시하면서 대안경제와 코뮌주의적 삶, 질서보다는 카오스를 그리는 좌파의 정치적 신화들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신화’라는 용어는 몇 가지 난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통상 ‘신화’는 한 시대의 사회의 어떤 실상(이를테면 빈곤과 억압의 구조)을 은폐하고 배제함으로써 그 사회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어떤 이야기들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 한국에서 유행하는 ‘싸이코패스’ 담론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범죄는 왜 일어나는가? 선천적으로 뇌가 잘못된 싸이코패스들이 있어서 일어난다. 그들은 무지막지하며, 당신의 바로 옆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범죄자의 신화는 수많은 범죄가 오늘날의 주택정책의 산물인 재개발 지역이나 원룸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보어 자신도 정치적 신화가 언제나 ‘신학적 의구심’과 함께 기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그가 ‘정치적 신화’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신학적 의구심이라는 기존의 신화에 대한 부정과 대안적인 세계상을 구축하는 긍정의 기능을 다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보어는 정치적 신화가 어떻게 이 양면성을 모두 갖출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의 더 두꺼운 저작들(<Political Myth>, <Criticism of heaven> 등)에서 우리는 더 자세한 서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맑시스트는 성서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제기를 덧붙여 보자. 과연 독자들은 어떻게 실질적으로 성서를 ‘좌파적’으로 읽게 될 수 있는가? 보어는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어떤 답을 주고 있지 않다. 그가 탐구하는 것은 좌파적 독해의 가능성, 딱 거기까지만이다. 여기에 대해 해답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주장하는 정치적 신화는 결국 좌파 이데올로그들의 계몽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사실 우리주변에도 이런 이들은 적지 않다. 생각보다 많은 ‘좌파적’ 설교문이나 책들이 인터넷이나 서점가에 이미 비치되어 있다. “예수는 사회주의자다”라는 주장도 별반 새로울 것 없는 식상한 주장이기까지 하다. 그 작업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에게 죄송하지만 그것은 보통 감동도, 실천도 낳지 못하는 하나의 ‘의견’으로 공론장에 제출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슷한, 혹은 그 정도의 주장에도 다다르지 못하는 보수적인 성서 읽기라도 역사 속에서 강력하게 힘을 발휘했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사실 그것은 성서라는 텍스트 안이나, 좌파적 성서 해석자들이라는 주체의 차원에서는 해명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적 차원’을 갖는다. 이 사건 - 조심스럽게 나는 그것을 메시야 사건으로 명명하려 한다. - 이야말로 모든 권력자들(좌파조차도!)의 신화를 무너뜨리며, 동시에 새로운 정치적 신화를 기초 짓는 신화 이전의 ‘신적 차원’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사건의 원형으로서 ‘전태일 사건’을 가지고 있다. “나도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던 그리스도인 청년의 죽음은 70년대의 수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했으며,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 메시야 사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메시야 사건의 ‘신학’이야말로 보어의 맑스주의 ‘성서학’이 다다른 문턱을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의 지대가 아닐까._김강기명(비평루트 편집장)

성서와 대안좌파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로랜드 보어 (논밭,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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