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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론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는 2차대전 이후 존재해온 케인즈주의적 계급타협과 복지체제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의 등장과 함께 의문시 되고 나서부터 생긴 체제로 국제적 자본주의를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상의 형태로 재조직 하려는 프로젝트로 정의된다(Harvey 2007, 26-37). 1차적으로는 경제적인 문제이다. 그러기에 신자유주의를 언급할 때면 자본의 위기, 금융화, 노동의 유연성 등 주로 경제적인 분야에 관련 된 것들이 많이 등장한다(Levy and Dumenil, 2006; Brenner 2001.; Chenais 2003.).

하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노동의 문제, 고용의 문제 등 일상적인 삶의 문제에까지 침투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랑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문화의 문제나 예술의 문제까지 침투하는 것이다. Bichler와 Nitzan(2004)은 권력에 의한 사회의 형성과 통제의 문제를 연구하였던 Louis Mumford를 따라 사회를 하나의 거대 기계(Mega Machine)로 파악하고, 신자유주의 국면에서는 자본의 수익률 복원을 위해 전사회가 하나의 기계처럼 재조직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명제는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의 논의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전적인 이야기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시장경제적 관계에 적합하게 개편하거나 종속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사본의 증식 운동과 자본의 경쟁논리에 사회 전체를 종속시킨다(김세균 1996, 50).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를 파악함에 있어서 경제적인 연구를 넘어서서 신자유주의 체제가 어떻게 전사회적 변동을 가져오는지, 특히 문화부분처럼 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영역들을 어떻게 바꿔가는 지를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가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의 경제적 변동에 대한 연구에 비하면 부족한 편이다.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파악하는 가운데 상품화라는 테제로 일상의 변동을 관측한 Harvey(2007)의 연구나, 신자유주의 국면이 인간의 인격(Character)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를 연구한 Sennett(2001)의 연구 등이 있기는 하다. 또 국내에도 신자유주의와 문화의 영역의 변동을 연결시킨 강내희(2000)나 권 경우(2007) 등의 연구가 있다.

이런 상황이 이 연구는 신자유주의가 전 사회를 재편하는 과정에 있어서 문화 부분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가는 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축구라는 스포츠와 이를 둘러싼 문화들을 변동시켜 나가는 지 보려 한다. 이를 위한 연구의 대상으로 대처정권 하에서 전사회적인 신자유주의화를 경험하였던 영국의 사례를 선택하였다. 비록 한국과 현실적으로 다른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전사회의 재편이 축구라고 하는 스포츠와 이를 둘러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전사회 재편을 가속화 해가는 우리 사회를 통찰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축구는 19세기 말 탄생 이래로 노동계급과 강한 관련성을 가지고 노동계급의 문화로 자리매김 해왔기에, 이러한 축구의 신자유주의적 변동은 근대사회와 더불어 성립된 하층계급 문화, 노동계급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보는 데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여기서는 먼저 19세기 말 축구가 노동계급과 결합되는 모습을 살펴본 뒤에, 이러한 축구가 신자유주의 국면 속에서 어떤 계기를 맞아서 어떠한 모습으로 재편되는 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결과고 축구와 관련된 문화는 어떻게 변동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축구와 노동자와의 결합


근대 스포츠의 일반적 성격이 그러하듯이, 축구도 19세기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스포츠였다. 하지만 완전히 발명된 것은 아니었고, 유럽에서 전통적 유희의 형태로 내려오던 것이었다. Public School의 학생들이나 대학생들은 스포츠 장려의 분위기 속에서 전통적인 유희였던 축구를 유지해갔다. 하지만 전통적 유희를 유지해가는 것이다 보니 성문화 되지 않았고, 따라서 각 학교마다 규칙도 서로 달랐다. 이것이 1863년에 각 학교의 대표들과 졸업생들이 모여서 축구 규칙을 만들고,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 FA)가 만들어 지면서 점차로 축구는 근대적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다(Giulianotti 2004, 30).

학교에서 출발한 전통에 맞춰 처음에 축구는 아마추어리즘과 엘리트주의를 표방하였다. ‘신사’로 대표되는 상류계급 남성들의 스포츠로 그 정체성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축구 규칙이 만들어지고, FA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public school과 Oxbridge의 학생들과 졸업생들에 의한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1860년대 중반 이후 상황은 바뀐다. 축구가 노동자들과 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데 역할을 한 조건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 조건은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를 위해 자본가측이 스포츠를 장려했다는 점이다. 19세기 노동자의 증가와 함께 노동계급의 여가가 문제시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자본가들은 주일학교나 건전한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 등을 장려하여 노동계급의 여가시간을 통제하려고 하였다(Bailey 1978, 12). 그리고 이러한 통제의 연장선상에서 축구를 장려하였다. 그 결과 초기 축구클럽의 탄생에 있어 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Aston Villa, Birmingham, Everton, Fulham, Bolton, Barnsley 등의 유명 클럽은 교회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 클럽이었다(Vamplew 1988, 52). 또한 자본가들도 스포츠가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기르는데 효과적일 것으로 예측하고 축구클럽의 탄생을 후원하였다(Mason 1980, 26).

두 번째 조건은 노동자들이 스포츠를 실행하고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18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영국에서 노동운동이 조직되면서(하남길 1996, 91), 노동자들은 토요일 오후에 쉴 수 있게 되었고 이 시간에 축구를 하거나 관람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또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도시를 가로질러 같은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클럽들 간의 경기를 보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성장하면서 노동자들은 축구의 유료관중이 될 수 있었고, 이는 축구가 지배계급이 원하는 아마추어 스포츠가 아니라 프로페셔널 스포츠로 정착하게 되는 데 기여했다.

마지막,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노동자들이 축구라는 스포츠를 자신들의 문화로 만들어 나갔다는 점이다. 축구의 시초는 지배계급에게 있었고, 처음에 축구를 향유함에 있어 지배계급에 의존해야 했으나 노동자들은 다른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었다(Cunningham 1980, 128). 그들은 축구를 자신들의 문화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들 나름의 주장과 노선을 갖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프로페셔널리즘이었다. 노동자들은 조용함 대신 함성으로, 신사도대신 근성으로, 순수한 아마추어리즘 대신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축구를 변화시켜나감으로써 부르주아의 덕목을 함양하고자 하는 지배계급의 의도를 뒤틀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만들었다(Hargreaves 1986, 67).

이러한 상황 가운데 축구장은 점차로 노동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노동자들과 축구는 187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결합되어 갔다. 이 시기에 많은 노동자 클럽들이 영국 중부와 북부의 산업지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져갔다. 1870년대 여전히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축구클럽이 경기에서의 우위를 보일 때 노동자들의 팀으로 이에 대항할만한 팀은 Blackburn Rovers였는데, Blackburn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이 일대의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복귀하는 일을 포기하였다고 할 정도였다(Murray 2008, 47). 축구장을 향해 걸어가는 관중들의 행렬은 공장을 향해 걸어가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거의 같았다(Inglis 1995, 53). 1882년과 이듬해 Blackburn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두 클럽 Rovers와 Olympic이 FA컵에서 준우승과 우승을 거두면서 아마추어리즘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최종적으로 승리한다1).

이후에도 프로페셔널리즘을 경계하고 축구가 원래 만들어질 때 구상되었던 부르주아적 덕목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은 계속적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축구 클럽과 노동계급 공동체 사이의 깊은 관계는 지속되어왔다. 축구선수는 축구를 보는 노동자들과 같은 계급 출신인 동시에 그들의 덕목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1950년대 영국 축구의 대표적 스타인 Stanley Matthews의 경우 사람들은 그를 ‘전형적인 광업 노동자’의 이미지로 받아들였었다. 다시 말해 스타 선수들은 ‘노동자의 영웅’이었다(Critcher 1979, 163). 또한 이들은 노동자들과 비슷한 임금을 받았는데 이것이 더욱 노동자들과의 연대감을 심화시켜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수들의 처우 뒤에는 FA와 클럽을 지배하는 자들이 선수들의 임금상한선을 만들어 선수들이 ‘노조’가 되어 임금을 상승시켜 비용을 증가시키는 일을 막기 위한 노력이 존재했다(Giulianotti 2004, 33). 또 노동자들의 생활터전의 근처에 지어진 축구장은 Pub이나 공장 등과 함께 노동자들이 회합하는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다(Giulianotti 2004, 84). 축구경기장 골대 뒤 양쪽의 입석(terrace)을 보어전쟁 중에 억울하게 죽은 동료들을 위한 기념의 공간(Kop)으로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전환시킨 사례(Bowden 19995, 116)도 노동자와 축구의 결합을 보여준다.

이러한 축구와 노동자들의 결합이 늘 긍정적인 모습으로만 읽힌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축구는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결집하지 못하게 하는 마약과도 같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으며, Umberto Eco의 유명한 말 “과연 월드컵이 벌어지는 일요일에 무장투쟁이 가능한가? 축구 경기가 있는 일요일에 혁명이 가능한가?”는 이러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준다고 볼 수 있다(Eco 1986, 172). 하지만 축구는 1차대전 당시 국가의 전쟁수행 노력에 사보타주를 거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Birley 1995, 70-72), 대처 하에서 폐쇄 위기에 놓인 부두 도크의 가동을 지지하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하는 등(Giulianotti 2004, 84), 축구가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오히려 유지하고 결집을 고양시켜준다는 증거도 수없이 많다.




3.  영국 축구의 ‘불황’과 신자유주의적 재편과정


그렇다면 이렇게 현대사회의 등장과 함께 형성되어 노동자계급과 결합한 축구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신자유주의 국면 하에서 제 조건들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1)  불황의 등장과 심화


경제 분야에서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앞서 ‘불황’의 국면이 존재했던 것처럼, 영국 축구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에는 ‘불황’의 국면이 앞서 존재하였었다. 불황국면이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시작은 1960년대부터였다. 영국사회의 전후 케인즈주의적 코포라티즘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축구는 이전과 같이 토요일 오후만 되면 남성노동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실질임금의 상승으로 인하여 중산층이 형성되고 이들이 가족과 함께하는 다양한 주말의 레져생활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축구장은 다른 레져분야들과 경쟁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Critcher 1979, 169). 다른 한편으로는 자동차의 광범위한 보급과 도로의 정비로 인하여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작은 클럽들과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던 노동계급이 점차로 도시에 연고를 둔 큰 클럽들의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관람횟수를 제한하는 경향을 나타냈기 때문이기도 하다(Bale 1989, 93-96). 그 결과 축구장의 관람객 수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당시에는 방송중계나 유니폼 스폰서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축구단의 수입은 오로지 관중의 입장료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1-4부 리그 총 입장객 수가 1949년 4천1백여만 명에서 1955년에는 3천4백여만 명, 1960년에는 2천8백여만 명, 1971-72년에는 2천1백여만 명까지 하락한 뒤 70년대 내내 2천5백여만 명 수준을 기록하였다(Critcher 1979, 169). 80년대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82년 2천만 명 이하로 떨어진 뒤 급속히 하락하여 1986년에는 1천 6백여만 명 하락하였고, 1992년까지 총관중 2천만 명을 넘어서지 못하였다(Brewer 2005, 70).

하지만 이러한 수입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클럽이 필요로 하는 비용은 늘어났다. 선수들의 임금제한이 1961년도에 철폐된 것이다. 선수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1950년대 내내 당시 선수들의 임금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리고 임금상한의 철폐를 주장해왔다. 그리고 노동당과의 연계 하에 Stanley Matthews 같은 스타 선수들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1961년 선수들이 파업을 결의하고 나서 임금제한은 철폐된다(Murray 2008, 223-235). 이에 따라 선수들의 임금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61-64년까지 약 61%가 증가하였다(Szymanski and Kuypers 1999, 95). 1978년에는 선수들이 자유롭게 클럽과 계약하고 계약이 종료되면 클럽을 이동할 수 있는 권리인 Free Agency 제도가 도입되었다(Banks 2002, 165). 그 결과 이후 6년간 1부 리그의 비용 지출은 3배로 증가하였다((Szymanski and Kuypers 1999, 95).

이러한 선수들의 임금제한의 철폐는 한편으로는 선수들의 대우가 나아지는 효과를 가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클럽들이 적당한 수준에서 임금을 조절하고, 또 남는 재정을 FA를 통해 소규모 클럽들을 지원하는 케인즈주의적 조합주의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었다(King 1998, 37). 이러한 이탈은 1980년대 초부터 상위리그의 수위권에 있는 클럽들에 의하여 본격화되었다. 이 클럽들은 스타급 선수들을 보유하는 비용부담을 갖는 클럽들이기에 이들은 상업적 전환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축구 경기장 관중감소를 우려하여 시도하지 않았던 리그 축구 경기의 TV 생중계를 1983년부터 국영방송과 계약을 맺고 시작하였다. 또 유니폼 스폰서 광고도 이 시기에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1부 리그 수위권을 점하고 있는 Elite 클럽 또는 Big 52) 에게는 “땅콩”에 불과했다(Szymanski and Kuypers 1999, 56). 여전히 대부분의 주 수입원은 유료관중이었다(Murray 2008, 312).

경제적인 위기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위기도 함께 찾아왔다. 축구장 내외에서 집단적인 폭력과 광기를 보이는 ‘훌리건’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축구장 폭력은 점차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자들을 비롯한 일반의 시각은 이러한 폭력의 문제를 일반적으로 경제의 장기침체국면과 맞물려 경제적 하락과 박탈을 경험한 이들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득세하였고, 이들에 대한 연구도 ‘노동계급’이나 ‘하위계급’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는 분위기였다(Giulianotti 2004, 96-109). 

결정적 위기는 불황국면과 이를 돌파하기 위한 시도가 함께 존재하던 때에 찾아왔다. 그리고 영국 축구의 경제적 불황국면과 문화적 위기가 결합되어서 발생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존재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그것이었다. 1985년 브뤼셀의 Heysel 경기장에서 ‘훌리거니즘’을 대표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Liverpool 구단의 팬들이 이탈리아의 Juventus의 팬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결국 경기장 한쪽 벽이 무너졌다. Liverpool 팬들은 Juventus의 팬들을 계속 그곳으로 밀어 댔고, 그 결과 39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 2주 전에 Bradford의 Valley Parade 경기장에서도 입석 관람석이 무너지면서 56명이 사망했다. 결정적으로 1989년 4월 Sheffield의 Hillsborough 경기장에서는 Liverpool과 Nottingham Forest의 팬들의 충돌로 96명이 사망하였다(Murray 2008, 300). 이 사건을 둘러싼 담론들은 사고의 원인들을 ‘낡은 경기장’과 ‘훌리거니즘’으로 보았다(Giulianotty 2004, 157-158). 그런데 ‘낡은 경기장’은 영국 축구의 경제적 불황을 드러내주고 있었고, ‘훌리거니즘’은 노동계급의 문화적 병리현상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결국 대처정부가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대처정부는 이전부터 노동계급과 훌리거니즘에 대하여 공격해오고 있었다(Taylor 198, 171-191). 그러던 중 Hillsborough 참사가 일어나자 Taylor 판사를 조사위원으로 임명하고 대책을 내놓게 하였다. Taylor 판사는 영국 축구 전반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축구계와 축구장을 변화시킬 것을 권고하였다(Walvin 1994, 197). 이에 따라 영국 축구는 거대한 전환을 맞게 되었고, 이 과정이 본격적으로 영국축구가 신자유주의의 길을 걷는 과정이 되었다.


2) 영국 축구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Taylor 보고서 이전에도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전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일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것은 방송중계권료에 관련된 문제였다. 발단은 1985-86시즌 국영방송사인 BBC와 ITV와 리그와의 중계권 계약이 틀어지게 되면서 발생했다. 방송사와의 중계권 계약이 결렬되자, 1부 리그의 거대클럽들은 리그 자체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이전에 1-4부 리그까지 동등하게 분배되던 중계권료를 1부 리그 50%, 2부 리그 25%, 3-4부 리그 25% 로 차등분배 하도록 만든다(King 2002, 61). 대처정부의 민영화 정책과 더불어 1988년 위성방송업체인 British Stellite Broadcasting(BSB)이 공영방송(BBC, ITV)과 중계권을 놓고 경쟁구도를 벌이게 되자 중계권료는 단숨에 350%가 인상된다(Szymanski and Kuypers 1999, 59). 이렇게 되자 다시 Big 5클럽들은 ITV와 접촉하여 중계권료 배분구조를 1부 리그 75%, 2부 리그 12.5%, 3-4부 리그 12.5%로 바꾼다(King 2002, 63).

본격적인 재편은 Taylor의 보고서와 함께 시작되었다. Taylor의 보고서가 가장 강조한 것은 축구장의 안전을 위하여 경기장의 입석을 없애고 모든 입장객이 좌석에 앉도록 하라는 것이었다(Brewer 2005, 76). 그런데 이것은 영국 축구의 전통에 매우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이 보고서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지키기 위해 축구 클럽들은 본격적으로 자유시장의 원리를 도입해야 했기 때문이다(King 2002, 88).

 입석을 없애고 좌석을 만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경기장의 개조에 대한 거대한 비용을 발생시켰다. 더 나아가 오래된 경기장들은 부수고 아예 땅을 구해 새로운 경기장을 지어야 했다. 이는 거의 모든 구단에 해당되는 일이었다. 1993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1-4부 리그의 92개 클럽 중 70개 클럽이 1차대전 이전에 만들어진 축구장에서 경기를 하고 있었고, 이중 34개 클럽은 19세기부터 사용해온 구장에서 경기를 하고 있었다(Duke 1994, 130).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도 총 38개 클럽 중 28개 클럽이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경기장을 사용하고 있었다(Inglis 1987, 10). Taylor는 Football Trust나 Football Ground Improvement Trust 등을 통해서 경기장 개보수와 신축에 필요한 비용을 공적으로 지원 하겠다고 말했지만,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대처리즘의 일반적 분위기 속에서 그 액수가 충분할리가 없었다. Taylor도 대처리즘의 원리에 편승하여 클럽들에게 자유시장 원리를 도입하고 클럽들이 수익을 다각화 한다면 이익을 창출하고 필요한 비용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King 2002, 100-103).

이러한 정부의 권고안에 따라 리그와 클럽의 운영 형태가 크게 바뀌었다. FA는 1991년 Blueprint for the Future of Football을 통해서 1부 리그의 클럽수를 줄이겠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일종의 기업 구조조정의 논리로, 채산성이 악화되어 있는 클럽의 1부 리그 참가를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1부 리그의 주요 팀들은 비슷한 시기에 FA에 압력을 넣어 FA가 정해놓은 각종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Premier League를 1992년에 탄생시켰다(Banks 200, 59). 이제 프리미어 리그는 자신들의 수익을 2, 3, 4부 리그에 재배분할 의무로부터 벗어났다. 또 구단들은 런던 증권거래소에 자금조달을 위하여 주식을 상장하고 기업을 공개하였다(Giulianotti 2004, 196).

각종 규제가 풀리고 자유시장원리가 도입되는 것은 비단 축구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대처리즘 하에서 지속되고 확대되고 있던 흐름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축구의 시장화는 다른 분야들과 맞물리면서 그 효과가 증폭되었다. 그중에서도 시장화의 가장 큰 효과는 방송시장 민영화에 따라 미국의 언론재벌 Rupert Murdoch이 영국의 방송시장에 진출하면서 BSB 위성채널을 인수하여 BSkyB라는 채널을 만들고 프리미어리그와 협상하여 고액의 방송중계료를 지불하기로 한 일이었다. 1992년 BSkyB는 주계약자로 BBC와 함께 5년간 프리미어리그 방송중계료로 3억 4백만 파운드를 지불하기로 하였다. 4년 뒤엔 중계권료가 250% 상승하였고, 2003년엔 4년간의 중계권료가 10억 파운드에 달하였다(안임준 2003). 2007년엔 BSkyB와 아일랜드계 방송업체인 Setanta가 정과 부를 이루어 약 17억 파운드에 3년간 국내 방송중계권을 땄고, ESPN 등의 해외 방송업체들도 해외방송 중계권료로 6억여 파운드를 지불하였다3).

신자유주의가 경제의 지구화(Globalization)를 수반하듯이, 축구 또한 지구화의 흐름과 맞물렸는데 중요한 사건은 벨기에 리그 소속의 Bosman 이라는 선수가 해외로 팀을 옮길 때 발생하는 비용이 당시 출범한 EU의 통합시장 지향적 무역법에 저촉된다고 EU법정에 제소한 일이었다(Giulianotti 2004, 236). 재판은 선수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제 선수들은 통합된 유럽의 축구 노동시장 속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선수들을 끌어들일 자본을 갖춘 소수의 거대클럽들로 하여금 전 유럽에서 기량이 좋은 선수들을 끌어 모으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의 거대 축구 클럽들은 좋은 선수들을 긁어모아 전 세계적인 관심사를 받기 시작했고, 프리미어 리그가 전 세계로 방영됨과 맞물려 거대 클럽들의 유니폼은 무시할 수 없는 효과를 가진 광고판이 되었다. 이러한 효과를 인식한 글로벌 기업들은 거액을 주고 주요 클럽들의 유니폼에 자사의 로고를 부착하고 있다. 삼성이 Chelsea에 5년간 5천만 파운드를 지불하기로 하고 유니폼에 삼성 로고를 달았으며, LG도 Fulham과 3년간 구단 사상최고액으로 유니폼 스폰서를 계약하였다. Manchester United는 미국계 보험업체인 AIG와 4년간 5650만 파운드를 받는 대가로 유니폼에 AIG 로고를 달았다. Arsenal은 Emirates 항공으로부터 1억 파운드를 받고 8년간 Emirates 항공 마크를 유니폼에 부착하고 15년간 신축 경기장 이름을 Emirates Stadium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4).

하지만 이렇게 방송수입과 스폰서 수입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고 해서 입장료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Taylor 보고서에 따라 경기장의 입석을 없애고 좌석제로 전환하는 일은 입장 가능 인원의 수를 크게 줄였다. Glasgow의 Ibrox 경기장 같은 경우 입석이 있을 땐 100.000명이었던 수용인원이 좌석제로 전환한 뒤에 42.000명으로 바뀌었다. Big5 클럽들의 경기장 관중 수용규모도 3만 명 수준으로 줄어버렸다. 하지만 이는 좌석의 희소성을 가져왔고, 수요가 폭증하자 구단들은 티켓 값을 천정부지로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증개축을 통해 거대규모의 클럽들은 경기장의 수용인원을 늘려갔지만, 티켓 값은 계속 인상하였다. 1926년을 기준으로 영국 축구 1부 리그의 평균 입장료는 0.6 파운드에서 1981년 2파운드까지 매우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렸었다. 하지만 1990년 5.39파운드, 1995년 11.58파운드, 1999년 16.27파운드로 프리미어리그의 입장료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프리미어리그가 탄생한 후 영국 축구를 둘러싼 경제규모는 엄청나게 커졌고, 수익도 늘어났다. 미국계 컨설팅 회사인 Deloitte는 프리미어리그에 있는 것만으로도 최소 3500만 파운드의 수익이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5). 이렇게 되자 외국계 자본들이 프리미어리그의 구단들을 소유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는 영국의 축구가 프로화 되던 19세기 말부터 진행되어 오던 소액주주 중심의 유한회사형 클럽소유 구조가 1990년대 중반 상장된 주식회사 형태로 바뀌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Morrow 2007, 134). Rupert Murdoch은 1998년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6억여 달러에 Manchester United 구단을 인수하려고 이미 시도한 바 있었고, 비록 영국에서 오래 거주하기는 했지만 리비아 출신의 백화점 재벌 Al Fayed가 1998년 Fulham 구단을 인수하였다. 2003년 구소련 관료 출신의 러시아 에너지재벌 Roman Abramovich는 Chelsea 구단의 지분 50%를 5930만 파운드에 매수하고 8000만 파운드에 이르는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구단의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외국자본의 프리미어리그 인수전은 시작되었다6). 2005년엔 미국의 스포츠 재벌 Malcolm Glazer가 Manchester United의 지분 중 70%를 7억 9천만 파운드에 인수함으로써 이 구단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스포츠 재벌 Randy Runner가 Aston Vila 구단을, 아이슬란드의 은행가 Egert Magnuson이 WestHam United 구단을, 프랑스 사업가 Alexandre Gaidamac이 Portsmouth 구단을, 휴대폰 사업가 출신으로 태국의 총리를 지내다 쿠데타로 인하여 영국으로 망명한 Thaksin Shinawatra가 Manchester City 구단을 인수하는 등 지속적으로 구단들이 해외 자본가들의 손에 넘어가 2007-2008시즌 프리미어리그 20개 구단 중 11개 구단이 외국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러한 외국인 자본가들은 구단에 자금을 공급하고 각종 사업을 통하여 이윤을 창출하거나 인수 당시보다 더 비싼 값에 되파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리버풀을 인수한 미국의 스포츠 재벌 Tom Hicks가 인수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싼 값에 두바이 국제금융에 구단을 넘기기 위해 협상을 하고 있는 일은7) 이제 해외자본의 영국 축구클럽의 소유가 국제적 투기자본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의 축구팀은 아니지만 투기자본의 대부인 George Soros가 이탈리아의 AS Roma 축구팀을 인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90년대 초반 이후 진행된 일련의 과정들은 축구클럽들과 선수들을 신자유주의 속으로 거의 완벽하게 편입시켰다.




4.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결과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 변화를 가져온다. 여기서는 영국축구의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어떠한 축구산업이나 시장 이외의 축구장을 둘러싼 다른 분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양극화


신자유주의적인 재편의 첫 번째 결과는 바로 양극화이다. 스포츠는 이전부터 공정한 경쟁을 한다는 환상을 준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정준영 2003, 118). 하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재편된 영국의 프로축구 리그는 이제 클럽의 재정규모에 따라 그 순위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해져버렸다. 출발선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1990년대 이전에도 거대도시를 기반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많은 재정을 소유하여 리그의 수위권을 달리는 클럽들은 존재했다. 하지만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재편과정을 거치고 나서부터는 방송수입의 문제나 UEFA챔피언스 리그(유럽축구연맹소속 국가들의 리그 수위권 팀들이 모여서 연중 치르는 대회)를 통해서 생기는 수입 등 이전과 달리 리그의 높은 순위에 드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재정적 성공을 보장해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리그의 수위권에 드는 팀들은 이변이 없는 한 재정적 성공을 통해서 우수한 선수들이나 감독들을 영입하고, 이를 통해 다시 리그의 성적을 재생산한다(Morrow 2007, 43-44). 반면에 하위권에 있는 클럽들은 방송중계료나 UEFA 주최 대회의 진출여부, 스폰서 수입에서의 차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수입을 얻을 수밖에 없으며, 노동시장의 높은 이동성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팀 내에서 우수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을 상위권 클럽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저조한 성적을 재생산 할 수밖에 없다. < 표 1 >은 192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점차로 1부 리그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팀의 수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모습을 드러낸다. 200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소수의 클럽들만이 상시적으로 상위권을 점유하는 모습이다.


< 표 1) > 1부리그 3위 이내 입상 점수 합계 (1위 : 3점, 2위 : 2점, 3위 : 1점)

출처 : (Dobbson and Goddard 2001, 45; www.premierleague.com)

1920-29

1930-39

1947-59

1960-69

Huddersfield

14

Arsenal

18

Man Utd

19

Man Utd

10

Burnley

6

Sheffield Wed

7

Wolves

16

Liverpool

9

Liverpool

6

Everton

6

Arsenal

8

Tottenham

8

Sunderland

5

Sunderland

5

Tottenham

8

Burnley

7

WBA

5

Aston Villa

4

Portsmouth

7

Leeds Utd

7

Everton

3

Derby County

4

Preston

5

Everton

5

Leicester

3

Man City

4

Blackpool

3

Ipswich town

3

Newcastle

3

Wolves

4

Chelsea

3

Man City

3

Sheffield Wed

3

Charlton

3

Liverpool

3

Wolves

3

Arsenal

2

Huddersfield

3

WBA

2

Nottm Forest

2

Bolton

2

Preston

1

Burnley

1

Sheffield Wed

2

Cardiff

2

Tottenham

1

Derby County

1

Chelsea

1

ManCity

2

 

 

Huddersfield

1

 

 

Tottenham

2

 

 

Sunderland

1

 

 

Aston Villa

1

 

 

 

 

 

 

Chelsea

1

 

 

 

 

 

 

1970-79

1980-89

1990-99

2000-08

Liverpool

19

Liverpool

24

Man Utd

21

Man Utd

20

Leeds Utd

10

Everton

8

Arsenal

9

Arsenal

15

Derby County

7

Man Utd

6

Liverpool

7

Chelsea

12

Arsenal

5

Ipswich town

5

Blackburn

5

Liverpool

5

Nottm Forest

5

Arsenal

4

Newcastle

5

Leeds Utd

1

Everton

4

Aston Villa

3

Aston Villa

4

Newcastle

1

Ipswich town

2

Nottm Forest

3

Leeds Utd

3

 

 

Man City

2

Southhampton

2

Chelsea

1

 

 

QPR

2

Tottenham

2

Crystal Pal

1

 

 

Chelsea

1

Watford

2

Norwich

1

 

 

Man Utd

1

West Ham

1

Nottm Forest

1

 

 

Tottenham

1

 

 

Sheffield Wed

1

 

 

WBA

1

 

 

Tottenham

1

 

 


상위권과 하위권간의 격차도 지속적으로 벌어진다. 1974년부터 시작된 상하부 리그간 강등제도8)를 보면 여실하게 드러난다. 1974년부터 80년까지 1부 리그로 승격된 21팀 중 5팀만 승격 첫해에 강등당한 반면에, 93-99년 사이에는 1부 리그로 승격된 20팀 중 11팀이 승격 첫해에 강등 당하였다. 거대 클럽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수위권을 독차지 하는 반면에 소규모 클럽들은 재정적인 문제로 1부리그와 2부리그를 오가는 것이다. 1부리그인 프리미어리그 내에서도 양극화는 눈에 드러난다. 리그 내 20팀이 경기를 시작한 1995-96시즌부터 2007-08시즌까지의 상위 3클럽과 하위 3클럽간의 평균승점의 총계를 비교해보면 <표 2> 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


<표 2)> 1995-2008 프리미어리그 상하위 3팀간 평균 승점차

시즌

95-

96

96-

97

97-

98

98-

99

99-

00

00-

01

01-

02

02-

03

03-

04

04-

05

05-

06

06-

07

07-

08

상위3팀평균

77

70.33

73.33

77.33

77.67

73

71.33

76.67

81.33

85

88.67

80

85

하위3팀평균

33.33

38.33

36.33

33.67

29.33

31.33

31.33

32.33

33

32.67

26.33

33.33

27.33

차 이

43.67

32

37

43.66

48.34

41.67

50

44.34

48.33

52.33

62.34

46.67

57.67


상위권 -> 많은 수입 -> 좋은 선수 영입 -> 상위권 이라는 구도와 하위권 -> 적은 수입 -> 좋은 선수 유출 -> 하위권 이라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양극화와 재생산의 구도가 경기의 승패의 결과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상위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리그 내 순위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무리한 재정지출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순위를 다투는 클럽들보다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하는 구도 일종의 무기경쟁 같은 구도를 띄는 것이다(Rosen and Senderos 2001, 47-68). 지출은 결코 줄어들 수 가 없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방송중계료를 비롯한 많은 재정 수입원으로도 성적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무리한 지출을 하고 클럽이 빚더미에 오르게 되는 사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때 리그 수위를 다투고, UEFA주최 경기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무리한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8천만 파운드의 빚을 떠안고 파산한 Leeds United 구단의 사례9)가 이러한 영국축구의 신자유주의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외국인 구단주들의 클럽 소유의 시작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지출을 감당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2) 문화적 재편


영국 축구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무엇보다도 축구와 노동자와의 결합이라는 오래된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기본적으로는 영국 축구 클럽들의 신자유주의적 경영방식으로의 선회가 노동자들을 클럽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Taylor의 보고서 권고안에 따라 입석은 사라지고 경기장엔 좌석만 남았다. 하지만 좌석은 입석의 반도 안되었고, 이에 따라 입장권 가격은 급등하였다.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수입을 확충해야 하는 부담을 갖고 있는 경영진들도 더 이상 노동계급을 주요고객으로 해서는 클럽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Hortoan 1997). 새로운 경기장의 건축도 노동계급으로부터의 이탈을 부추겼다. BSkyB의 등장은 클럽들에게 엄청난 방송중계료 수익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팬들에게는 엄청난 수신료 부담을 안겨 주었다. 따라서 하층계급은 TV를 통해서 경기를 보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Giulianotti 2004, 282). 이에 따라 대처리즘 하의 양극화 국면 속에서 지위하락을 경험한 노동계급은 축구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계급이 축구로부터 분리된 데에는 단순히 이러한 비용의 상승에만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화적 차원에서의 문제도 존재한다. 대처정부와 우파 이데올로그들은 1980년대의 일련의 위기과정을 겪으면서 훌리거니즘의 문제를 노동계급과 연결시켰고, 노동계급의 전통적인 축구관람형태나 응원형태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경기장에는 CCTV가 설치되었고(King 2002, 99), 지정좌석에 앉아야 하는 관람형태는 골대 뒤를 제외하고는 노동자 서포터들의 공간적 연대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경기장 개축과정에서 전통적인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한적한 곳으로 옮긴 곳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경기장 안으로의 진입에 성공한 노동계급도 이전과 같은 문화를 향유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국면 하에서 노동계급 자체로 변동하고 있었다. 탈산업화와 서비스 산업의 성장 속에서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확대되었고, 노동계급은 상대적으로 몰락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중산층과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새로운 팬이 되었다(Boyle and Haynes 2000, 180). 이러한 새로운 관중의 등장과 다수화는 축구선수들과 서포터의 관계도 바꿔 놓았다. 이전의 노동계급 관중들은 선수들과 계급적·지역적 동질감을 느끼며 같은 클럽을 만들어가는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자유노동시장 속에서 활발하게 이동하고 성공적인 경기의 대가로 수만 파운드를 주급으로 받는 선수들과 이전과 같은 동질감을 느끼기는 어려워졌다. 이제 중산층화된 팬들은 전 세계에서 모여들어 높은 주급을 받으며 경기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구매하는 ‘구매자’ 또는 ‘소비자’가 되었다(Critcher 1979, 170). 경기장에는 이들의 구매력을 활용하여 구단의 수익을 올리기 위한 다양한 상업시설이 들어섰고, 경기장은 쇼핑몰이 되어 버렸다. 1960년대 스타 선수들은 노동계급의 영웅이었지만, David Beckam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의 스타 선수들은 헐리우드 스타와 다를 바 없었다(Giulianotti 2004, 170, 228). 노동계급의 하위문화였던 축구는 중산계급의 대중문화가 되었다. 구단에 대한 충성심이 이전에 비해서 결코 약화된 것이 아니라는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Malcolm and Jones and Waddington 2000, 138), 이전에 존재했던 유대나 일체감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전지구적인 McDonaldization이나 Disneyization으로 설명되기도 한다(Duke 2002, 21).

또 1990년대 중반 노동당 정부와 구단은 서포터들을 탈정치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미 1990년대 초반 Taylor의 보고서에 따라 축구가 재편되는 것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노동당(Giulianotti 2004, 163)은 집권 후 1997년 Football Task Force를 구성하여 서포터와 클럽이 좀 더 유기적 관계를 갖도록 한다는 명분하에 서포터들의 대표체로 Trust를 조직하도록 유도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종래의 노동계급 중심의 서포터조직을 약화시키고 이들을 탈정치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Murray 2007, 94-96).

그렇다고 축구를 둘러싼 경제와 문화적 변동과정에 팬들이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수동적 주체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서포터들은 일련의 변화과정에 대한 나름의 저항을 보여주었고, 새로운 형태의 연대의 형식과 문화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1980년대부터 시작된 Fanzine과 Independent Suppoters Associations(ISA)의 등장이다. 화이트칼라 계급의 젊은이들은 기존의 축구에 대한 담론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관점에서 축구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Rows 1995, 160-165). 이들은 축구장 안에서의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에 대항하였고(Murray 2007, 327), Heysel 참사 이후 노동계급과 축구장을 훌리거니즘으로 비난하는 대처리즘의 담론 정치에도 맞서는 등 신좌파적인 행동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알려나갔다. ISA의 활동은 구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으며, 몇몇 Fanzine은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Giulianotti 2004, 133-4). 또 최근에는 해외 자본가들이 구단을 소유하려는 일이 부쩍 늘어나면서, 이들과 대항하고 클럽을 팬과 지역사회의 소유로 돌리려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Brown 2007, 614-635; http://blog.daum.net/lstmedia/14068322). 물론 이러한 시도들이 전체적인 신자유주의적 흐름을 막진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5. 결론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는 일은 생략하기로 하고,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문화변동의 측면에서 영국에서의 사례가 주는 함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영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과정의 시작은 문화적인 부분에서 보자면 ‘고급화’였다. 노동계급과 하층계급 등의 폭력성으로부터 경기장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입장료를 인상하고 좌석을 설치하고 각종 쇼핑공간을 통해 축구장을 노동계급의 공간이 아닌 중산층의 공간으로 재창조하였다. Taylor 보고서를 두고 논란이 있을 당시 영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전(前)감독이었던 Terry Vanable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출신 배경인 노동계급을 배신하거나 속물적으로 비웃을 생각은 없지만 입장료 인상은 영국 축구에 오명을 안겨준 부류의 사람들을 축구장에서 몰아낼 수 있다. 나는 대부분이 노동계급인 젊은이를 말하는 것이다(Giulianotti 2004, 163).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문화적 영역에서 ‘고급화’라는 이름하에 노동계급과 하층계급의 공간들을 재구성하고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온 한국 주요도시들의 재편과정과 상업공간의 재편과정 또한 이러한 ‘고급화’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스포츠 경기장, 특히 노후한 시설을 여전히 이용하는 야구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상업공간, 오락공간, 문화공간 등의 재편을 ‘고급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전략에서 바라보고, 그러한 전략이 어떻게 기존에 그곳을 이용하던 사람들을 배제해 나가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전사회 재편을 탐구하는 데 있어 매우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_마르셀(CAIROS 연구원)



 □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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