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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 어느 날 아직도 겨울은 언제쯤에나 갈 건지 확실하지도 않았던 어느 목요일. 운수가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별로 보러 올 사람이 없었던 것인지 '경계도시2'라는 송두율 교수의 귀국 이후 몇 개월 간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다큐멘터리 시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배당된 영화표가 마침 두 장이라 이런 '우울한' 영화를 함께 보더라도 별 문제가 없을 만한 녀석 하나를 불러 낮부터 커피에 담배로 노가리를 풀며 상영시간을 기다린다.

 
때는 2003년 '경계도시 1' 이후 홍형숙 감독은 송두율 교수의 귀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고, 독일 베를린의 송두율 교수 자택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굳이 '경계도시 1'을 보지 않더라도 별 상관없이 볼 수 있다. 어쩌면 전편과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편에서의 송두율은 민주주의를 위해 70~80년대의 독재자들에 반대하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념분쟁으로 휩싸인 한반도의 상황에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아갈 것을 천명했던 존경 받는 지사이며, 동시에 위르겐 하버마스라는 당대의 석학의 제자이자 학문 동지로서 학계에서도 추앙 받는 학자이다. 그러나 '경계도시 2'의 송두율은 이런 존경 받는 혹은 기표로서의 모습들이 지워져 버리고 모든 사람 앞에 내던져져 자신이 천명했던 '경계인'으로서의 삶까지도 위협을 받게 된다. 들은 이야기지만 '경계도시 1'에서의 송두율은 여유롭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계도시 2'의 송두율은 마치 궁지에 몰려 상처 입은 짐승과 같은 모습이다. 아니 차라리 상갓집 개가 더 나은 표현일지도...[각주:1]
 

독일을 떠나 국내로 금의환향한 송두율은 가족들과 함께 시민운동가들과 학계의 동지들에게 둘러싸여 여러 행사에 불려 다니기에 바쁘기 그지 없는 일정을 진행한다. 그러나 그 이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 미디어와 각종 보수 단체들의 이념논쟁 그리고 국정원과 검찰의 국가보안법 위반에 관한 수사였다. 수사 및 항간에서 떠도는 논란의 핵심은 그가 과연 북한의 대형간첩이자 노동당 예비후보 김철수인가 하는 것이었다. 지난한 수사와 신문 과정 그리고 마침내 법정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보수 미디어에 의한 마녀사냥과 같은 여론몰이는 계속되고 송두율이 입고 있던 민주지사로서의 옷 그리고 학자로서의 옷 하나 하나가 벗겨져 나간다. 결국 그가 국내로 돌아온 것을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를 편들던 시민운동가들마저도 이 땅의 이념편향적 지형에서 그 동안 얻었던 정치적 지분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그의 경계인으로서의 입장에 대해 비난하고 '기술적으로'라도 체제에 순응한다는 태도를 취할 것을 강권한다. 그들도 북녘 체제에 동조한 간첩 혹은 노동당 예비후보 김철수에 대한 지지를 계속하다가는 일반 시민들로부터 시민운동 세력이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를 믿어주고 필름밍(filming)을 계속해 나가던 홍형숙 감독마저도, 물론 잠시 잠깐이기는 하지만, 이 시점에서 스스로 일종의 의심에 빠졌던 것을 감추지 않는다.

 
이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성서에 나오는 욥이라는 사람의 이미지였다. 욥은 원래 의로운 사람이며 부자로 신 앞에 순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집안 식구들이 다 죽고, 재산은 날아가고, 자신은 욕창에 걸렸으며, 부인으로부터는 '신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때 욥의 친구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를 위로하는 듯 했지만 욥이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다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합리적인 생각에 욥에게 신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라고 권한다. 하지만 욥은 완강하다. 스스로 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들은 욥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어째 욥의 친구들이 그려진 모습에 당시 송두율이라는 개인을 둘러싸고 비난을 퍼부어 대는 대한민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입혀질 수 있을 듯 하다. 보수 미디어가 내새우던 어쩌면 지금도 합리적이고 당연할 듯한 이념지향성과 경계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의문과 비난, 그리고 이에 이은 그를 편들던 진보 미디어들과 시민 단체들 그리고 운동가들의 그의 이념적 태도에 대한 의심과 이를 분명히 결정하라는 강요.
 


홍형숙 감독의 시각은 분명 한 개인의 '우리와 다른' 이념적 지향에 관용하지 못하는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 돌려져 있었다. 법원 앞에서 있었던 지나가던 두 사람의 남자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그들은 분명 대한민국의 일반 시민이다. 그저 매일매일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가족에게 매일매일의 먹이를 물어가려고 노력하는 당나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송두율과 같은 간첩'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것은 습관과 같이 대한민국 사회 곳곳을 물들이고 있는 좌빨 알레르기였다.
 

홍형숙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역설적 상황이 들어선다. 송두율 교수의 스승 하버마스는 내세우는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유명하다. 모든 사람이 공론의 장에서 계급장 떼고 동등하게 이야기 하여 모두가 이상적인 합의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론. 그러나 대한민국이야말로 이념적 소통불가능의 영역이었고 하버마스의 이론이 완전할 수 없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되는 곳이었으며 하버마스의 제자 송두율은 바로 이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송두율은 바로 이 소통불가능의 영역에서 모든 존경 받는 모습이 벗겨져 버린 '벌거벗은 삶'으로 드러난다. 마치 그의 모습은 자신을 죄인으로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신을 대면하고자 하는 욥의 모습 그 자체였다.
 

욥의 이야기는 이후 욥의 불평을 듣고 있던 신이 직접 나타나 욥과 친구들을 꾸짖는 장면으로 치닫는다. 체스터튼과 같은 보수 기독교 논객은 이 때 신이 나타나 인간 보다 더 높은 신의 논리를 보여주고 욥이 신의 말씀을 듣던 중에 이를 깨닫고 회개한다고 말한다.[각주:2]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욥이 신의 장광설을 들으며 신도 어쩔 수 없이 무력하구나라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인간이 처한 여건에 더 잘 들어맞지는 않을까. 어떤 기표로서의 욥, 존경받는 장자로서의 욥은 상처받았다. 그리고 친구들의 비난에 화를 내던 욥에게 나타난 신 역시 욥의 깨달음 안에서 더 이상 하늘에만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이 아니라, 삶이라는 불확정적 영역 안에서 인간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땅 위의 신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실제로 영화 말미에서는 인간 송두율을 법정에 세웠던 '국가보안법'으로 대변되는 이념 지향적 국가가 상처받게 되는 모습, 다시 말해 송두율 교수에 대한 간첩혐의에 대해 검찰이 패소하는 모습이 잔잔히 그려진다. 왠지 법원을 나서는 송두율 교수의 모습은 기쁜 한편 왠지 어깨가 처져보이는 듯 하다. 단순히 피곤함 때문일까... 그 모든 혼란하고 복잡한 상황들을 통해 타의에 의해 여기까지 달려온 피곤 탓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이전과 같은 송두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었던 학자, 교수, 민주지사라는 기표에 상처를 받았다. 국가 역시 이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보수 언론과 반공 보수세력의 결탁을 통해 작동했던 이념 지향성은 분명히 송두율 교수에 대한 무죄 판결에 일정 이상 상처를 받게 된다. 


이 이중부정 혹은 이중구속의 상황에서 어떤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욥기의 이중부정에서는 땅 위로 내려온 신, 다시 말해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와 만나는 상처받은 인간이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2003년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송두율 사건의 이중부정은 어떤 효과를 가져왔을까? 아니 혹은 잠정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올 것인가? 2010년, 송두율 사건 이후 7년이 지난 지금, 원칙 없는 보수정권이 들어서 모든 것이 혼란하고 어느 때보다 더 자기 앞가림이나 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워지는 이 때, 이 사건 혹은 비결정적인 것에 대한 판단은 더더욱 힘들어지기만 한다.

 
어쩌면 홍형숙 감독의 편집 기간이 그렇게나 길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 그대로 한국이란 나라는 통치라는 것이 불가능한 비결정성이 지배하는 나라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체적 결정을 해 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혼돈 속에서 영속적으로 과거를 반복하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그런 의미의 변화가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우리 사회의 난맥상. 도대체 왜 우리는 지금까지도 이런 이념적 편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역사의 진보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언제까지나 과거의 망령에 휩싸여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갖은 상념적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를 낙관하는 태도가 아닐까. 가로등이 내려 비치는 거리를 걸으며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실제로 어떤 형태로든 사건의 진보성에 대한 판단 혹은 평가는 사후적일 수 밖에 없다. 비록 앞 길이 불분명하고 두렵더라도 미래를 끝없이 긍정하고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 뿐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더라도 앞으로 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결정될 것이고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나가기 위한 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_박성훈(CAIROS 연구원)


  1. 주 1. 경계인은 두 가지 색깔을 가지는 동시에 두 가지 색깔 모두를 가질 수 없는 자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경계 위에 선다는 것은 모든 특성을 내려놓아야 함을 말한다. 선이란 것에는 넓이가 없고 색이 칠해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경계인이란 발붙일 자리 없는 진정한 이방인일 뿐이다. 물론 이 경계라는 것이 넓이가 없는 선이 아니라 어떤 범위가 설정된 양측 간의 경계영역이 될 수도 있다. 독일의 송두율은 어땠을까? 그는 경계영역이 인정되는 곳에서 일종의 경계인으로 자신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 송두율은 더 이상 색을 가질 수 없는 자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진정한 경계인이 된 것은 독일을 떠나 남한 사회 내에 들어왔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절대로 발붙일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 말이다. [본문으로]
  2. 주 2. 체스터튼의 욥기서문은 꽤 읽어 볼만한 글이다. 그러나 그의 보다 높은 의미 혹은 철학의 신, 혹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우매한 인간을 가르치는 신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물자체와 같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초월적 관념일 것이다. 체스터튼이 본 욥기는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이다. 그리고 그 구조 내의 양극은 해결할 수 없는 난제로서의 신 혹은 물자체라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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