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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어츠, <문화의 해석>의 '두텁게 기술하기'(Thick description) 방법

 

기어츠는 문화를 클럭혼의 ‘복합적 총체’로서의 문화라는 방대한 정의에서 벗어나 베버의 ‘의미의 망’으로서 보는 입장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문화의 분석은 법칙을 추구하는 실험적 과학이 되어서는 안되며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적 과학이 되어야 한다”(13).
 

기어츠는 윙크에 대한 의미 해석 사례(윙크, 거짓 윙크, 거짓 윙크 흉내내기, 거짓 윙크 흉내 연습하기)를 통해 인간의 행위는 의미구조 없이는 문화적 범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해와 분석의 대상과 주체에 관하여...


용대... 코 파는 거?

이는 문화에 대한 해석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혹은 민속지적 기술들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문화나 사회가 연구자(이론가)에게 던지는 ‘윙크’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그러한 기술들을 마치 어떠한 문화나 사회현상에 대한 투명한 ‘재현’(representation)인 것인 양 대하는 것은 그러한 기술들이 의미구조 하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윙크-즉 연구자의 특정한 관점 하에서 재의미 부여됨으로써 재해석되는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태도이다. 기어츠는 방대하고 소위 “두터운” 기술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을 기죽이는 ‘아우라’(?)를 가진 경험연구들이 이론을 은폐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완성된 인류학적 저서들에는 [...] 조사 대상자인 그 사람들이 자신들 혹은 자신의 동족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연구자-필자 주]가 새로 우리 나름대로 구성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매우 모호하게 만들기 마련이다.(19)

 
기어츠가 지적한 것처럼, 사실상, 관찰을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기술할 때까지 많은 정보들이 “배후정보로 밀려나”버린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기술하는 연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인류학적 조사라는 것이 실제에 비해서 훨씬 더 관찰적인 활동이며, 훨씬 덜 해석적인 활동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아주 기본적인 사실들에서조차, 만일 그러한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보다 더한 경우에는 설명들에 대한 설명, 즉 윙크에 대한 윙크에 대한 윙크를 하고 있는 셈이다.(19)

 
따라서 (기어츠는 “분석”이라고 썼지만) 경험연구나 민속지는 (그렇게 믿고 있을 때조차) 있는 그대로는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구조를 분류하는 것이며 거기에 사회적 근거와 중요성을 부여하는 작업”(19)이다. 이 때 의미구조를 분류하는 것이란 ‘코드’라는 “암호”를 연구자의 일의적인 관점에서 “해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주체들 간의 의미와 해석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에서부터 그것들의 상호 공존 내지 갈등의 역학을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문제는 서로 중복되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의미구조들을 어떻게 두텁게 기술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음의 문장은 기어츠가 연구의 실제적인 초점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그것의 존재론적 양태에 관한 것이 아니며, [...]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그것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행동 또는 매개물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조소인가 도전인가, 아이러니인가 분노인가, 또는 교만인가 자존심인가 하는 문제들이다(21).

 
다시 말해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파생되는 의미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의 의미는 공적인 것이다. “윙크라는 것이 무엇인가 또는 신체적으로 눈꺼풀을 수축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한, 당신은 윙크를 하거나 윙크를 흉내 낼 수 없다”(23). 기어츠는 동일한-그렇게 보이는-행동(act)을 동일한 행위(action)-의미를 담지한 행동-로 이해하는 인지론자들의 오류를 지적한다(23쪽을 보라). 여기에서 “규칙은 사적(私的)으로 따를 수 없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철학적 탐구>)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말은 그 (동어반복같지만) 문화구조에 속한 행위자가 알지 못하는 객관적 구조나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문화란 상호주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다.

 
윙크라는 현상 자체를 기술하는 것은 엷은(thin) 기술이지만, 윙크가 (구체적인 맥락 하에서) 어떤 의미들을 지니는가를 기술하는 것이 바로 두터운 기술이다. 결국 두터운 기술이란 동일한 행동들에서 동일하지 않은 의미를 가진 여러 행위들로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화(classification)는 이미 행위자들에게 상호주관적으로 이해된 의미-즉 행위자들의 분류체계를 연구자가 다시 분류화하는 이중적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기어츠가 말하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 “이해적 접근법”(versthehen approach), “에믹 분석법”(emic analysis)이다. 문화의 상징체계에 관한 설명이 행위자-지향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행위자들의 문화 혹은 삶 그 자체를 그들의 공식들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연구자의 서술이란 연구대상(행위자)들이 그들의 문화구조 내적으로 갖는 의미들의 해석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윙크 그 자체는 우리(연구자)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자들의 의미나 문화 그 자체는 연구자들에게 아무런 학문적 의미가 없는 ‘날 것’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연구자들이 연구대상을 분류/객관화하는 해석-이를 통해 구성된 의미는 행위자들(lay people)과는 상관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차이는 다만 인류학자가 그것[행위자들이 갖는 상호주관적 의미-필자 주]을 설명한다는 것뿐이다”(27). 


학문의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실제로 그 학문을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이처럼 장황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27).

 
“물질세계와 물리학은 분명히 다른 것”이라는 기어츠의 진술은 사회과학의 연구대상과 연구자 간의 관계에 대한 유비이다. 연구자가 “대상 그 자체를 파고 드는”(27) 태도는 대상-실제로는 성찰성을 가진 행위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다고 연구자들이 생각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경험연구를 비롯한 인류학적/사회과학적 연구는 대상이 스스로 갖는 의미(본질)를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연구자들이 갖는 생각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어츠는 “우리 나름의 해석을 내리고 그것으로부터 분석을 시작”(27)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즉 사회과학(혹은 “문화연구”)에 있어서 분석이란 사실상 해석자들이 분석을 구체화하는 분석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바로 사회과학 연구의 이러한 과정이 경험연구나 민속지를 통해 구성된-백번 양보해서 ‘기술’된 문화 대상의 이론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문제는 기어츠가 지적하듯이 “자연적 사실로서의 문화와 이론적 실체로서의 문화를 구분짓는 경계선”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언제나 이미 해석된 문화를 (자신이 속한 연구공동체에 유의미한 형태로) 다시 해석해야할 처지에 놓여있다. 연구대상-행위자들이 갖고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보편화하고 이론화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인류학적 저서들은 그 자체가 이미 해석이며, 그것은 두 번째 해석일 수도, 세 번째 해석일 수도 있다(실상 첫 번째 해석은 “원주민”만이 내릴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문화이기 때문이다).(27)

 
심지어 “인류학적 저술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허구라고 할 수 있다”(27). 인류학이나 사회학은 또 하나의, 다른 버전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어츠는 이를 “픽티오” 즉 “구상된 것”이라고 말한다. 기어츠의 자백(?)은 모든 사회과학자들이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굳이 강조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은 “인류학적 대상이 사회적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학문적 인공물인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함으로써 인류학적 지식의 객관성 자체를 위협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29).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기어츠는 학문(인류학이나 민족지)의 의의가 사실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의 이해에 있는 것이다. 즉 인류학적 문화연구는 낯설게 보기를 통해, 미처 보지 못한 숨은 의미를 밝히는 것이며 대상에 대한 연구자들의 당혹감을 덜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연구자-타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면밀히 관찰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쳐야 하는 대화의 과정일 수 있다.

 
이해를 넘어 실체에 가까이...

 
어떤 서술, 어떤 이야기가 보다 나은 이야기, 설명인가 하는 점을 “증명”이나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의 상실은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설명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타문화와 이방인들과 얼마나 더 가깝게 만날 수 있게 해주는가에 달린 것이다(“학문적 상상력”).

 
기어츠는 상징체계나 추상화된 실체들에 대한 “일관성” 내지 “통일성”을 가진 기술, 즉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하고 전혀 흠이 없는 공식적 질서체계로 그려”(31)내려는 노력은 실천의 다양성, 즉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규칙을 준수하는 수많은 사례들을 포착할 수 없게 한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일관성 내지 일반화가 소위 ‘리얼리티’를 훼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잔여’가 인류학적 서술을 생생한 현실로 만든다. “인류학에서는 약간의 추론만이 효과적”이다. “지나친 추론은 논리적 환상에 빠지거나 형식적인 균형성에 학문적으로 도취되게 한다”(40). 인류학적 태도 혹은 에토스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인류학적 해석이라는 것이 일어난 사건을 이해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을 실제 일어난 일들[...]로부터 유리시킨다는 것은 곧 그것이 해석하고자 하는 대상으로부터 유리시켜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31).

 
생생한 현실, “대상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31) 가도록 인도하는 것이 인류학(자)의 역할이다. 이를 위해서 해석은 어떤 대상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설명해야 한다. 문화코드에 의해 예견되고/될 수 있는 행위만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를 벗어난 지점들, 가능성들이 현실화된 지점들도 고찰해야 한다. 이것을 잘 하는 해석이 “훌륭한” 해석이다.


문화분석은[...] 의미를 추측하고 그 추측이 어느 정도 정확한가를 [행위자의 의미에 대조해-필자 주] 따져보고 보다 더 나은 추측으로부터 설명을 위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또는 그래야만 한다)(34).

 
따라서 문화이론은 (1) 지나친 추론을 삼가고, 두터운 기술을 통해 미묘한 차별성을 보여줌으로써 일반성을 추구해야 한다. 흔히 농담처럼 언급되는 경험연구에서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는 통상적인 오해는 “문화 해석의 일반 이론을 쓸 수 없다”(41)는 기어츠의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론형성 작업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규칙들을 성문화하는 것이 아니라, 중층기술하는 것이며, 또 여러 사례들에 적용되도록 일반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례들의 내부에서 일반화시키는 것”(41)이다. 사실상 “훌륭한” 논문은 경험연구에 이론과 그 이론을 통한 해석이 녹아있기 때문에 서술(실체)과 이론(해석)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론의 구성은 그것에 의거한 해석 수준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해석과 떨어져서는 별 의미도 없고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41). 즉 이론 자체가 무의미하다거나 단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해석과 별개의 이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인 성취가 없다면 그에 해당하는 해석 수준-즉 경험연구나 민속지적 기술의 성취(두터운 기술)도 없다는 것이다. (2) 문화이론은 엄격한 의미에서 예측 가능하지 않다(42). 본래 문화 해석 자체가 사후적이기 때문이다._먹보에 술꾼(CAIROS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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