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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2회 카이로스포럼:선교라는 스캔들

정정훈의 "불가능한 타자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에 대한 논평

[제 2회 카이로스 포럼: 선교라는 스캔들?!]

'동일성과 타자'를 넘어서

정정훈의 "불가능한 타자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에 대한 논평


모든 종교현장이 내부적 설명근거가 있을지라도 인문학적, 사회학적 설명이 가능하듯이, 기독교선교에도 마찬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불가능한 타자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이라는 정정훈 연구원의 글은 한국기독교가 사회에서 저지르는 배타성들은 그저 참된 기독교신앙에서 벗어난 일부 일탈자들이 사고 친 게 아니라, 오히려 한국기독교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담론과 정서에 충실한 사람들이 언제든 저지를 수 있는 일임을 시종일관 밝힌다. 그러므로 과제는 당연히 사고 친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정신분석보다는 한국기독교의 일반적 정서와 담론 자체에 문제가 없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 연구원이 펼치고 있는 논지의 핵심은 동일성과 타자의 관계다.

“동일자는 자신과 다른 특성이나 속성을 가진 이들을 타자로 규정하면서 양자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설정한다.…이런 과정을 통해 정상적이고 규범적 존재인 동일자와 결함과 결핍을 안고 있는 비정상적 존재인 타자라는 관계의 쌍이 설정된다.…이 정상적 동일자와 비정상적 타자라는 관계의 구도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한국의 주류적 보수 기독교인들의 인식 속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정정훈, 4쪽) 동감한다. 실제 정 연구원이 한국기독교인들과 일본 우익 국민주의에서 예로 들었듯이 그러한 문제들은 일상 속에서 자주 확인된다.


1. 그러나 개념이 존재하기에 현상이 있는 것인가, 현상이 존재하기에 개념을 정리하는 것인가? 기본개념을 동의하면서도 내 머릿속을 맴 돈 의문은 ‘도대체 동일자와 타자의 개념을 그 구성원들에게 누가, 어떻게 주입하는가?’이다. 동일자와 타자의 대립항과 같은 관계는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내 가족과 남의 가족, 우리나라(민족)와 외국(다른 민족) 등 어디에나 상존한다. 그러나 같은 대립항끼리도 언제는 문제가 되나 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일성과 타자의 설명(모든 이론)은 그 안으로만 들어가면 똑같은 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자동화공정(컨베이어시스템)이 아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생각한다.

첫째, 기독교인들이 어디서 그런 배타성을 배울까? 당연히 교회에서 가르치는 다양한 성경해석(설교, 성경공부 등)과 그 가르침이 반영된 프로그램들일 것이다. 구약과 신약, 심지어 같은 구약과 신약 안에서도 각권과 각 문장이 갖는 본문의 자리(상황)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를 수 있는데 우리는 원하는 문장만 골라서 우리 입장강화에 활용할 뿐이다(수 11:6~15). 정말 성경은 믿는 자들의 배타성을 가르칠까? 오해(오독)의 소지는 충분하다. 그러나 전체문맥 속에서 바로 읽으면 성경에는 죄인의 연대성만 존재할 뿐 믿는 자들의 배타성의 자리는 없다.

둘째, 동시에 오늘 한국기독교의 현실은 한국인과 한국기독교 역사상황으로부터 자라났다. 정정훈 연구원의 좋은 글에 역사성을 더 권하고 싶다. 다른 기독교가 아니라 바로 한국기독교의 한국기독교 됨은 역사성의 산물이다. 유교 권위주의의 오랜 역사성에 더하여 식민지와 가난에 찌들어 또 다른 유토피아와 번영을 꿈꾸는 바탕(종교성) 위에 세워진 신학(신앙). 거기에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결합이 오늘 우리 신앙을 만들었다. 그 오래고 사연 많은 역사성 위에 세워진 한국기독교의 아픔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부모로 받되 더 나은 자식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성시화-성서한국-민족복음화-선교한국-세계선교, 무엇이 문제인가?(10쪽)

전도나 선교는 죄가 아니다. 동일하게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성시화-성서한국-민족복음화-선교한국-세계선교’ 자체는 당연하다. 성시화하고 성서한국을 달성하는 것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과 방식의 문제가 아닐까? (법륜스님이 이끄는 정토회를 보라)
다시 말하지만 내가 아는 한 성경은 배타성이 아니라 죄인의 연대성을 말한다. ‘복음을 모르고 죽어가는 죄인들을 보면서도 어떻게든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무책임한가?’(전도자) ‘불의한 사회실체를 알지 못해 갈수록 처참해가는 상황을 보면서 먼저 알고 있는 우리가 말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무책임한가?’(어느 공산주의자)


3. ‘덜 폭력적인 선교방식 고민, 타자-되기 삶의 구현’이 되려면

내 소견으로는 정 연구원의 글은 파헤쳐 놓고 서둘러 덮는 모습처럼 결론이 조금 허무하다. 단순히 개인적 성숙도가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갖는 구조적 심각성이 있다고 말해놓고, 그래도 나는 기독교를 믿으며 덜 폭력적인 대책은 있을 것이다?(11, 12쪽) 어떻게? ‘덜 폭력적인 선교방식 고민, 타자-되기 삶의 구현’이다.

타자-되기의 삶? 비주류적 삶 살기? 긍정하나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강자된 자기위치를 바로 인식하는 것은 긴요하나 기독교다움, 선교의 바른 자리는 결코 도덕성으로 세울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주류가 될수록 위험성이 커진다는 말은 백번 맞다(12쪽). 그러면 우리는 주류인가, 비주류인가? 목사, 연구원의 직업적 위치는? 그러면 실존적 자리는? 그러면 대책은 직업을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직업을 그대로 두더라도 그런 자세로 살라는 것인가? 후자라고 하면 인문학적 설득력은 좀 부족한 게 아닌가?

개인적으로 나는 김준곤 목사의 성경해석, 그의 정치적 선택은 반대하지만,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120% 공감한다. 기독교인이라 불리든 안티 기독교인이라 불리든 상관없이 우리시대의 아픔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바로 알지 못해 생기는 일이다. 최고의 스승은 둔 못난 제자들의 모습. 답은 다시 스승에게 바로 배우는 것이 아닐까?

“마음속에 그리스도만 거룩한 주님으로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망에 관해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해 두십시오. 그들에게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그것을 설명해 주십시오. 늘 바르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을 헐뜯는 사람들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15, 16)


구교형/성서한국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