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진/Francis

세월호 참사에 나타난 무시(disrespect)의 경험




<Edvard Munch(1863-1944), Skrik>


Francis

 

1. 가라앉은 자

   지난 4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많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순간 바다에는 아직도 12명이 가라 앉아 있다.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자유의 보호는 홉스 이래로 로크, 루소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기본적 이념이다. 이 이념은 국가의 정치체제와 상관없는 국가의 근본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근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의 진보는 생명의 보존에서부터 신체의 보호, 재산의 보호 그리고 자유의 보호의 증진으로 진행되어왔다. 따라서 생명의 보호를 염려하는 일은 내전이나 전쟁상황에 놓인 국가 이외에는 현대국가에서 생명에 대한 인정과 존중 그리고 보호를 염려하는 시민은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선진국으로 갈수록 자기 생명의 안전에 대한 보장의식은 뚜렷하다. 그리고 그 나라에는 G20에 속하는 한국도 속해 있다.

   시민의 생명보호는 공적운송시스템에서 더 철저한 안전이 보장되어 진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게 선박, 철도, 고속도로, 비행기에 대한 사업 면허증의 심사, 안전관리, 공단 설립, 세금 투입, 그리고 이를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과 부서를 설립하는 권한이 전적으로 정부에게 주어져 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에서 목격한 것은 위난상황에서 국민의 생명보호가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민간에 외주화 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막대한 세금을 쏟아 부은 해경은 무력했으며, 그렇게 많은 구조함은 실제적으로 한 생명도 구조해 내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대한민국은 국민의 생명보호라는 가장 기본적인 국가이념과 실질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300명이 넘는 국민이 바다에 가라앉았는데 단 한 생명도 구해내지 못했다. 생명보호라는 국가의 핵심적 기능이 부재한 가운데, 그 곳에는 통제당하는 언론과 고위층의 방문에 따른 의전 그리고 손발이 맞지 않는 정부부처만이 있었을 뿐이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기능이 부재했다는 것은 곧 실질적인 국가의 부재를 의미한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304명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의 생명을 위난 시 보호하고 구조한다는 국민의 기본적인 신뢰, 그리고 국가의 기본적인 기능은 그렇게 바다에 함께 가라앉게 되었다.

 

2. 표류하는 자

   바다에 가라앉은 많은 사람들은 고등학생들이였다. 가장 약한 국민들인 이들은 자신의 귀책사유 없이, ‘가만히 있으라.’는 전문가의 말을 듣고 바다 속에 수장되었다.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자신의 친구들로서, 그리고 약한 국민들로서, 국가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국가가 재난 시 국민을 보호하고 그 생명을 구출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현대국가의 다툼 없이 완성된 이념일 뿐 아니라 현대국가의 기본적인 책임이다.

   이 기본적인 책임관계가 훼손될 때 국가책임이념 안에서 연합되고 통일되었던 국민들은 표류하게 된다. 이 표류는 단순한 국적포기가 아니라, 한 국민국가를 이루고 있는 동질성의 내적 와해이다. 이 내적 와해는 국가가 부담해야 할 안전보장을 개인이 담당하도록 하게 하는 심리적 기제로서 국민은 형해화 된 국가라는 틀 안에서 자연상태로 내던져진 안정과 안전에 대한 신뢰의 훼손이며 동시에 국가 안에서 다양한 개인들의 내적 통일의 와해이다. 이 내적 통일의 와해는 국가 안에서 기본적인 생명, 신체, 재산, 자유의 기본적인 보장을 통해서 각 개인의 개성과 존엄성을 다양하게 추구하고, 자기 삶을 형성해 나가는 그런 심리적 및 도덕적 기제의 존중과 인정에 대한 붕괴이며, 이는 결국 개인의 다양한 삶의 개성에 대한 파괴를 불어 일으킨다. 따라서 국민으로서 개인은 자신의 삶의 전망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주위에 숨어있는 위험에 과도하게 집중하거나, 아니면 그런 재산이 없는 이들은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 속에서 주어진 삶에 속박되게 된다. 이런 삶은 필연코 개인의 이상이 아닌 주위 환경에 위험에 정향된 삶의 방향과 태도를 불러일으키고 개인의 존엄과 존중을 훼손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은 국민으로서의 내적 와해라는 표류뿐만이 아니라 개별자로서 자신의 삶의 전망과 이상과도 결별하여 표류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현대사회의 위험의 증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위험은 소재의 위험성에 오롯이 달려 있기보다 소재의 관리가능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스가 잘 관리되면 생활에 유익을 주지만, 관리가 잘못되면 한 순간에 많은 생명을 언제든 앗아 갈수 있는 것등 일상을 살펴보면 수많은 예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위험의 크기는 소재에 달려 있기보다 소재의 관리가능성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 관리의 완전성이 바로 국가에게 부여된 책임이다. 나는 세월호의 이 문제를 단순히 책임윤리로 환원해서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국가와 선원들이 법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그것이 단 한 생명도 구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3. 무시(disrespect)의 경험

   앞서 말한 국가의 기본이념인 생명, 신체, 재산, 자유의 보호증진은 국가라는 틀 속에서 보장된다. 국가라는 틀을 이루었다는 의미는 이 네 가지를 국가 즉, 행정부와 그 부속 기구인 군대와 경찰 그리고 사법부와 입법부를 통해 외적으로 보장하며, 국가 외적 기능은 국민에 대한 동등한 대우라는 내적 기능을 통해 실질적으로 완성된다. 이것이 개인이 국가라는 사회를 이루었을 때 국민으로서 자아의 내면으로 당연히 갖게 되고 보장되는 기대감이며, 존중이다. 이의 성문화가 법이고 헌법이며, 헌법의 구체화가 각종 법과 법률들이다. 따라서 국가라는 사회는 법제화를 통해 개별적으로 고립된 개인을 사회라는 상호주체적 존재로 엮어 내어 상호주관성이라는 도덕적 존중과 기대감을 모두에게 통일적으로 부여하고 보장한다. 이는 권리와 책임이라는 사회 내의 공통적 코드를 통해 나타난다. 이 권리와 책임은 악셀 호네트의 말처럼 개인 간 또는 개인과 국가차원의 상호인정이다. 그리고 이 인정은 법적 권리와 의무를 모든 국민에게 보장한다는 추상적 인격의 차원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권리와 의무가 적극적으로 필요한 그 구체적인 상황, 즉 한 개인 개인을 구체적 인격의 차원에 대우하는 현장에서 확인된다.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상호인정의 확인이 비로소 이념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현재의 실제적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세월호 사건을 다시 돌이켜 본다면, 단 한 생명도 구하지 못했으며, 부모들 사이에 정보경찰을 투입하고, 청와대로 면담을 가는 부모들을 그 부모들 수 보다 더 많은 숫자의 경찰병력으로 막은 것은 국민의 기본적인 법적 권리뿐만이 아니라 인정이라는 도덕적 권리까지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것을 지켜본 많은 시민들은 저들과 같은 국민으로서 동일한 무시의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 무시의 경험이 단순한 슬픔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많은 국민들을 애도와 거리로 불러낸 하나의 이유일수 있다. 그리고 그 애도와 거리의 외침마저도 충분히 보장하지 않을 때 이 무시의 경험은 다시 반복된다.

 

4.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는 명제는 사실 세월호 사건뿐만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국가의 통치언어이기도하다. 요즘 이 명제에는 종북이나, 미개라는 수식어가 붙여져 활용되곤 한다. 하지만 이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도덕적 의미는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권력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현존사회의 필요성에 의해 만든 유사도덕명제라는 점이다. 지배계층이 아닌 계층은 도덕규범의 외적, 내적 확신을 체계화 할 필요를 갖지 못한 반면, 지배층은 보이지 않는 지배의 수단으로 유사도덕명제를 항상 필요로 한다

   그리고 유사도덕명제의 형성을 가로 막기 위해 푸코가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있는 대상의 금기, 말할 때의 상황의 강요하는 의식, 말하는 주체의 우선권이라는 금지의 세 울타리를 쳐 놓는다. 미개의 발언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말은 하되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비난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고 고급 언어를 써서 말하고, 당사자가 아닌 다른 국민을 침묵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지배계층이 아닌 계층은 자신들의 언어를 지배계층의 언어로 평소에 규범화하여 표현할 수 없다. 다만 세월호 사건처럼 자신의 내적 도덕성인 불의(不義)의식, 즉 악셀 호네트의 말처럼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만 표현 할 수 있다. 그 표현되는 언어는 규범화된 유사도덕명제에 대항하는 일상생활의 주체들과 그 언어차원으로 포현된다. 가령 엄마인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라던가 비싼 돈을 주고 보모를 둘 수 없는 계층이기 때문에, 유모차에 탄 아이와 함께 길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는 그런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언어와 모습이다. 이 일상적 언어의 주체들이 소환되어 나오는 현장은 국가에 의한 무시가 일상적 기대와 신뢰감을 넘어선 시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천박하고 미개한 언어가 아니라 유사도덕명제라는 지배층의 발명된 지배명제에 대항하는 유일하고 진실한 도덕명제이기도 하다.

'필진 > Franc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춤이 된 세월호  (0) 2014.10.06
정의에 대한 짧은 스케치.  (0) 2013.12.23
영·미 법철학에서의 법개념  (0) 201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