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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trans-post-christianities

초월로의 회귀 혹은 존재론적 위계의 귀환?

- “근본적 정통주의의 철학적 배경 -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의 부활”에 대한 토론 -
*1st Cairos Colloquia 논평문

정정훈 | 카이로스 연구원, 수유+너머 연구원

1.
개인적으로 신학하는 친구들을 많이 둔 덕분에 ‘근본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에 대한 소문은 비교적 일찍 들었던 편이다. 한 5,6년 전인가 ‘좌변기’라는 공부모임을 함께 하고 있던 교회사를 전공하는 친구가 밀뱅크를 이야기하며 그가 기독교에 대한 나의 고민에 어느 정도 유효한 참조점들을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는 정보를 주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그 친구 덕분에 밀뱅크와 ‘근본적 정통주의’에 대한 일말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입장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관심과 궁금함 때문에 그들의 원전을 아직 ‘친견’하지 못했으면서도 오늘 ‘근본적 정통주의’를 주제로 한 김동규 님의 논문에 대한 논평을 맡겠다는 무모한 자원을 했던 것이다.

김동규 님은 ‘근본적 정통주의’의 신학적 입장을 간명하게 요약하고, 그 철학적 배경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것을 분명히 제시한다. 그리고 플라톤-신플라톤주의-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참여의 존재론’이라는 사상적 계보를 보여주며 이 계보가 가지는 세속성비판과 새로운 신학적 사유의 잠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김동규 님은 ‘근본적 정통주의’가 가지는 몇 가지 문제점들―철학을 비롯한 여타 학문을 신학 아래 두려는 신학적 패권주의의 오만함, 신학의 일차성을 주장하면서도 철학에 그 사유의 기반을 두는 논리적 역설, 일원론적 설명틀의 단숨함―을 지적하는 것 역시 잊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비판보다는 그 입장에 대하여 열린 태도로 대화에 임하는 것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 이 논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외한인 토론자에게도 이 글의 주제인 ‘근본적 정통주의’의 철학적 배경이 무엇인지, 그 사유틀이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다가왔다는 점에서 이 글은 그 의도를 제대로 성취한 글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을 거 같다. 이 글은 아직 시론적 논의이기에, 이후 본격적인 후속연구를 통하여 ‘근본적 정통주의’의 논리와 의미가 보다 더 풍성히 규명될 필요도 있을 거 같다. 그럼 이쯤에서 ‘발표자의 글 요약’과 ‘발표된 글의 긍정적 의미’를 짚는 토론문 전반부의 예정된 수순은 끝내기로 하고, 비판적 문제제기라는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2.
‘근본적 정통주의’의 핵심은 초월성에의 참여의 존재론이 있다. 근대에 대해 ‘근본적 정통주의’가 비판적인 이유도 근대가 초월성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근본적 정통주의’는 근대의 세속성에 의해 배제된 초월성을 복원하기 위해 플라톤의 존재론에 기댄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플라톤의 존재론은 일종의 이원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데아/형상의 세계와 그 모사물들의 세계인 현상계. 현상계의 존재자들은 모두 일정하게 초월적인 것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참여라고 번역되는 methexis는 또한 분유(分有), 즉 나누어 가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나누어 가짐의 정도에 따라 현상계의 존재자들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참여/분유의 존재론은 초월적인 것을 분유하는 정도에 따라 존재자들 사이에 위계를 발생시키게 된다. 초월적인 것을 더 많이 분유하는 존재자일수록 그 존재의 가치가 더 높은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위계적 존재론은 정치의 세계에도 도입된다. 플라톤에게 정치란 지배할 자격이 있는 자의 지배이다. 지배할 자격은 본성상 우월한 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법률』Ⅲ) 그래서 그의 이상국가에서는 결코 수호자, 전사, 장인의 자리는 서로 참견하거나 교환이 불가능하다.(『국가』Ⅳ)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민주주의뿐이다.(『국가』Ⅷ) 그에게 민주주의란 자격 없는 자들이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며(『법률』Ⅲ), 그것은 아르케가 없는 무정부적 통치를 의미할 뿐이다.(『국가』Ⅷ)

근본적 정통주의가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존재론에 기반 한 것이라면 이는 분유의 정도에 따른 존재론적 위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위계제로 이어지게 되지 않을까? ‘근본적 정통주의’가 초월성을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다면 이 초월성을 더 많이 분유한 자들의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지배를 함의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초월성이 기독교의 신이라면,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이라는 우월하지 못한 자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 우월한 자라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3.
김동규님의 글에서 만나게 되는 ‘근본적 정통주의’는 단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없는 반복으로 밖에 여기지지 않는다. 즉 아우구스티누스가 현대적 맥락에서 어떻게 재해석되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근본적 정통주의’는 자신들의 입론을 뒷
받침할 형이상학적 논거로서 아우구스티누를 단지 끌어오는 것일 뿐인가?

가령 ‘근본적 정통주의’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는 근대적 주체관을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적 주체로 회귀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은 소위 탈근대적 철학자와 이론가들에 의해서도 많이 행해졌다. ‘근본적 정통주의’가 데카르트의 근대적 주체에 대한 탈근대적 비판 이후에도 아우구스티누스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탈근대적 사유의 데카르트 비판에도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근본적 정통주의’가 데카르트적 주체를 넘어서기 위해 기대는 사유가 탈근대적 철학이 아닌 아우구스티누스인지도 드러나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근본적 정통주의’의 탈근대적 사유에 대한 비판 역시 제시되어야 ‘근본적 정통주의’가 아우구스티누스로 되돌아가는 이유가 선명해질 것이다. 단지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3.
개인적으로 ‘근본적 정통주의’의 욕망이론이 매우 흥미로웠으나 이 글에서 충분히 전개되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지 않는 사유에 나도 관심이 많은데, 그 근거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점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내가 아는 욕망이론 가운데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들뢰즈/가타리의 생산으로서 욕망이론이 있고, 이 사유는 철저하게 내재성의 사유이다. 그러나 ‘근본적 정통주의’가 초월성의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결핍이 아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궁금하다. 초월성의 사유가 결핍이 아닌 욕망을 사유하는 방식이 궁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