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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9/11 테러 13주기, [9․11의 희생양]을 다시 펴보며



9/11 테러 13주기, <9․11의 희생양>을 다시 펴보며

마이클 웰치(Michael Welch) <9.11의 희생양: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갈무리, 2011)의 역자서평


2001년 9월 11일, 이 날짜에는 가까운 미래에도 깊이 울려 퍼질 만한 중대한 의미가 있다. 역사 속에서 이 날짜는 과거에 발생했던 이 잔혹한 사건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9/11은 현재와 그 너머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동적 감정의 기표로서, 미국인들의 강렬한 비애뿐 아니라 그들의 불안, 공포, 분노를 상징한다. (<9․11의 희생양>, 14쪽)


9/11 테러가 발생한지도 어느덧 13년이 흘렀다. 이 13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그 끔찍한 사건을 우리가, 스스로 잊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아닌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사건은, 엄밀히 말해 우리의 것이 아닌 타자의 슬픔이자 증오였다는 점에서 당시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크게 주목할 만한 사건은 아닌 것 같다. 9/11 테러공격이 발생한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곳, 소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는 새로운 세계무역센터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날의 희생자들을 기르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새로이 세워진 세계무역센터는 9/11 테러공격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우뚝 선 미국 자본주의의 확신을, 그 자리에 조성된 추모공원은 이 사건에 대한 미국 사회의 애도, 나아가 이 사건의 의미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미국 사회의 신념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같은 건축물의 완성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 9/11 테러사건에 대한 미국 사회의 애도마저 완성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9/11 테러사건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는 작업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 같고, 이제 이 사건의 우울과 공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미국 전역에 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9/11 테러는 당시 미국 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공포를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다. 21세기의 시작, 자본주의적 확신이 체현된 건축물인 세계무역센터가 이슬람 테러조직의 공격에 의해 무너져 내린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미국은 이 사건을 통해, 오랜만에 국제 사회에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테러공격으로 사망했다는 점은, 그리고 피해자들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는 점은 미국이 자신에게 피해자 이미지를 부여하기에 적합한 근거를 제공했다. 하지만 9/11 테러공격도 세월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각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물론 미국사회가 피해자들에 대한 추모를 잊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13년이 지난, 2014년 9월 11일에도 뉴욕 맨해튼의 그라운드 제로에는 이 충격적 사건을 추모하려는 사람들이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13년이 지난 당시에도 여전히 미국사회는 9/11을 기억하려고 했다.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망한 무고한 사람들, 그들을 구하려 현장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구조요원들, 이들은 모두 미국 사회가 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9/11의 피해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려하지 않는  9/11의 피해자 혹은 희생양들도 있다. 이들은 9/11 테러공격으로 인한 일차적 피해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테러공격 이후, 부시 행정부가 이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용한 이슬람인과 아랍인이다. 이들은 9/11 이후의 미국사회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인권유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9.11의 희생양: 테러와의 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갈무리, 2011)에서 저자 마이클 웰치(Michael Welch)가 말하는 희생양이란 바로 9/11의 2차적 피해자, 즉 앞서 언급한 이슬람인과 아랍인이다.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담론이 미국 내에서 흔치 않은 것이라는 데 있다. 9/11 발생 이후, 이와 관련된 많은 담론들이 쏟아져 내린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희생양 모델을 이용해, 이 사건을 설명하고 이슬람인들과 아랍인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안팎에서 겪어야 했던 인권유린 사태를 전면에 내세워 언급하는 책은, 단언컨대 이 책 한 권뿐이다. 그것도 백인 남성 저자가, 피해자로 자신을 이미지화한 미국의 치부를 자세히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같은 지적 활동을 이슬람 계열의 연구자가 펼쳤다면 조금은 쉽게 납득이 갈 것 같다. 하지만 이 같은 작업을 펼친 사람이 바로 전형적인 미국의 백인 남성 교수라는 점은 나에게 상당한 흥미를 끄는 대목이었다. 자국에서 일어난 모종의 재난 상황을 바라보면서, 웰치는 그것으로 인한 자국민들의 고통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자국 행정부가 어떠한 만행을 저지르고,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집단을 희생양으로 만드는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9/11이 하나의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머문다면, 이 사건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웰치의 접근법을 따른다면, 9/11 테러사건에는 인류가 위기 때마다 사용해온 희생제의가 숨어있다. 고대국가 시절부터 인류는 국가 재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그 사건의 죄를 물어, 무고하지만 죄를 가지고 있다고 선전할 만한 특징의 주체를 희생시켜온 잔인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주체는 희생양으로서 살해 혹은 추방되었다. 공동체의 지배권력은 대중이, 이 희생양에게 증오심을 품도록 만들었는데, 이때 대중의 분노는 어떤 이성적 판단이 아닌 광기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이기에 문제적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증오를 품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증오를 이용해, 희생양에게 지배권력이 가하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은 이때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대중의 증오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증오범죄고, 그 범죄의 주체가 국가와 같은 공동체라는 점에서 국가범죄다. 여기서 필자가 언급한 이야기는 고대사회부터 21세기까지 이어져온 인간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 점은 <희생양>의 저자인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21세기의 시작, 2001년에도 이 희생제의는 멈추지 않았다. 9/11이라는 거대한 재난 상황이 발생하자, 미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의 지배권력 부시 행정부는 그것의 원인으로 이슬람 세력, 정확히 말해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지목했고, 이것에 엄청난 대중적 증오를 조장했다. 테러공격으로 분열된 국가를 다시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부시 행정부가 이용한 것은 그 증오심을 폭발시킬 통로, 즉 전쟁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부터 이라크 전쟁까지 부시 행정부는 전쟁을 통해, 파괴된 미국적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고, 그 속에서 미국의 대중은 하나 결집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9/11 테러용의자들과 같은 국적, 같은 인종, 같은 종교라는 이유로, 그들과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수많은 이슬람인들과 아랍인들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 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아프가니스탄 젊은이가 그들의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미국인 간수들은 그에게 계속해서 고문을 가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딜라워로 알려져 있었고 22살이었으며 전직 택시 운전기사였다. 그는 새벽 2시 무렵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수용소의 감방에서 끌어내어져, 미군 기지를 향한 로켓공격에 관한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통역관은, 딜라워가 취조실에 도착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을 때 그가 다리를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가 지난 4일 동안 줄곧 손목에 사슬이 묶인 채 감방 상반부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9․11의 희생양>, 202쪽)

 

이 같은 일들은 20세기 초중반, 그러니까 1900년대의 세계대전 가운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인권이 사회적 화두로서 이미 자리를 잡은 21세기에 발생한 일이다. 히틀러 정권에서, 스탈린 정권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자행한 국가범죄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에서 이러한 인권유린사건이 다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면서 자행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누군가는 9/11과 관련된 인권유린 사건도 결국 다 지난 옛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시 이후 오바마가 “담대한 희망”으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제 미국식 공포정치의 막이 내릴 것이고 전망했다. 사람들은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도 그 막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살해되자, 이 같은 예상은 더욱 실현 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아직 9/11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바뀐 상황, 희망의 대통령이 부임한 미국은 현재 2014년 말까지 이라크에 군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IS”라는 이슬람 테러단체와 전쟁을 진행형이다. 이라크 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수렁에 빠져,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근거지를 잃은 이슬람 테러단체들은 자신들의 체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들을 참수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미국은 현재 과거, 자신들이 벌인 인권유린행위와 유사한 범죄를 통해 자국민을 잃고 있는 심각한 모순에 빠져있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이 취하는 방식은 안타깝게도 과거에 그들이 의존했던 방식, 즉 전쟁이다. IS와의 일전으로 이슬람 국가의 민간인 상당수가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9/11 테러공격은 13년 전의 사건이지만, 그것의 영향은 아직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현재 벌어지는 국제적 상황을 보면 이렇게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9/11 테러와 관련된 일련의 비극적 사건들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남겼다.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미국 행정부가 보인 발걸음들이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를 가리키는 하나의 지표라면, 이를 토대로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싶다. 그 지표에 의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는 수많은 희생양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민권과 인권이 결국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그러한 미래를 살게 될 것이다. (<9․11의 희생양>, 323쪽)


9/11 이후 13년 동안, 부시-오바마 행정부의 발자취가 어땠는지는, 현재의 상황으로 설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자행한 전쟁과 인권유린은 지금의 미국적 상황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중요한 교훈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볼 만한 가치를 갖는다. 과연 시민권과 인권이 사라진 미래, 이런 세계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올까?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이 같은 끔찍한 미래가 도래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의 과오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뿐이다. 이렇게 끔찍한 증오/국가범죄를 저지르고도 부시 행정부는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마이클 웰치가 말하는 것처럼, 그 결과 미국 사회에는 죄를 짓고도 처벌 받지 않은 지배권력의 “불처벌의 문화”(culture of impunity)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한국사회는 2014년 4월 16일, 비통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은 대한민국 행정부 권력의 무능함을 그대로 노출시킨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그런데 이때 노출된 것은 행정부의 무능함만이 아니었다. 세월호 사건이라는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한민국 행정부는 국민적 분노를 돌릴 희생양을 찾는 데 열중했다. 행정부 재난 구조 체계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행정부의 권력과 위신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희생양은 따로 있었다. 청해진해운과 관련이 있던 구원파, 즉 “이단종파”였다. 행정부와 미디어는 이들에게 국민적 증오를 돌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물론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해 청해진해운이 무고하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필자는 현재 구원파를 변호할 마음도 없다. 희생양을 만들어 권력의 안정을 꾀하고 공동체를 단결시키려는 시도가 이번에도,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 소극이 끝나고 난 뒤에 결국 누구도 세월호 사건에 책임을 지지 않은, 즉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비극적 상태로 서서히 이 사건은 막을 내리고 있다. 언젠가, 세월호 사건도, 9/11 테러처럼 잊힐 것인가? 지금 당장은 그렇다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망각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13년 후,  2027년에 혹시 우리에게 세월호 사건과 관계된, 그것과 유사한 비극이 또 다시 발생하지는 않을까? 이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타산지석으로 <9․11의 희생양>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박진우_<9.11의 희생양> 옮긴이, 현대소설 및 미국소설 연구에 관심이 있고, 영문학으로 석사를 했다. 지금은 인문사회도서 번역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