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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ROS 회원이신 시지프스 님께서 보내 주신, 최근의 김동호 목사의 발언에 대한 논평입니다. 


편집/업데이트 내역

- 2015.4.29. 21:45. 교정 및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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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노란 리본이 아니다

--굿모닝 목사와 목사의 직업윤리, 그리고 종교의 사회적 기능


시지프스 (CAIROS 회원)



1. 사실 노란 리본은 나도 잘 안 달고 다닌다. 최근에 들어서야 여기저기서 노란 리본을 받을 기회가 생겨 가방 지퍼에 보일듯 말듯하게 달고 다니는 정도다. 노란 리본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 및 유가족들에 대한 연대를 상징하는 수많은 기표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겨우 노란 리본 따위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의 진정성 여부를 결정짓는 표식이 될 수는 없다.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하자고 굿모닝 목사(높은뜻 연합 선교회 대표 김동호 목사)가 굳이 노란 리본을 들먹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각주:1] 적어도 지난 몇 년 동안 그가 특유의 번호 붙인 간결한 메모 형태의 글을 통해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한 논란을 몰고 왔던 것을 떠올려 보건대, 그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건 단순히 노란 리본을 달고 안 달고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2. 특히 그는 지난 2013년 5월 18일에 올린 글에선 당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을 두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이 세 곳에서 열리게 된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각주:2] 문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한 이유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이데올로기화되고 이념화되었다는 데서 찾는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들이나 그 가족들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용기와 정의로움이 스스로의 우상이 되”어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지나치게 정죄하고 심판하고 있으며, 반대로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다. 한 마디로 양쪽 모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데올로기화하고 이념화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렇게 “실수하고 잘못한 사람들의 뻔뻔함과 옳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지나친 교만함과 뻣뻣함이 세상을 자꾸 경직시키고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면서, 부디 앞으로는 “5·18 기념식이 한 곳에서 한 마음으로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에겐 ‘5·18 민주화 운동’이나 신사참배나 결국엔 개인의 능력과 선택에 따른 행동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난 만큼 폭력의 가해자인 국가는 회개하고 부끄러워할 줄 알고, 그 피해자인 시민은 용서하고 겸손할 줄 알면, 그것으로 갈등은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3.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거대한 국가폭력에서 재현된 적대의 전선을 국가와 시민이 대등한 인격적 주체로 만나 각자의 윤리적 책임을 다 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사사로운 갈등으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도 순진하리만큼 안이한 사고방식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문제적인 것은 그가 이러한 갈등의 구도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설정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이야기를 5·18을 둘러싼 온갖 종류의 역사 왜곡과 정치적 악용으로 인해 아직도 그 트라우마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5·18의 피해 당사자나 그 가족들이 했다면, 우리는 결코 그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에 담긴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들만이 화해와 용서를 말할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서의 권면을 제3자가 그것도 희생자들의 편에 한 번도 서 본 적 없는 누군가가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중립을 가장한 ‘물타기’ 내지는 힘의 비대칭성을 무시한 일방적인 ‘가해자 편들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이제 그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즈음하여 올린 문제의 그 글을 살펴보자.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란 리본’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세월호 참사’로 바뀌었을 뿐, 2년 전 그가 5·18을 맞이하여 올렸던 글에서 한 이야기와 최근에 올린 글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이야기다. 예의 허구적인 진영 논리, 양비론, 기계적 중립주의 등에 입각하여 목사의 직업윤리를 일관되게 저버리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세월호 1주기.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정치인들.정치인들이라고 다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별로 진실성은 없어 보인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 거리에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 같은 느낌이 든다.

내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내가 안다. 그래서 나는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리본을 다는 건 비겁한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쉽게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막내 아들이 광화문에서 열리는 세월호 추도예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난 함께 가지 못했다. 추도예배 하나 가 놓고 나를 변명할까봐 그것이 싫었다.

혹시 우리 막내 아들 녀석 내가 추도예배 같이 안 갔다고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생각도, 의식도 없는 애비라고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조금은 걱정된다. 그건 아닌데....

노란 리본을 달면 종북 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의 페이스 북을 보았다. 큰 일 할 목사가 노란 리본 달고 다니면 안 된다고 누가 충고했다는...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노란 리본을 단 오대식 목사가 나는 좋다.

그래도 난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큰 일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종북좌파로 몰릴까봐도 아니다.

누군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군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안 달 수도 없지만,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달 수도 없지 않은가?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되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된다.

노란 리본 달았다고 다 바리새인도 아니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모두 다 보수 꼴통도 아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에는 노란 리본 단 목사도 있고,

나처럼 노란 리본 안 단, 아니 못 단 목사도 있다.

노란 리본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고,

노란 리본 못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다.

너는 네 식대로 아파하고,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좀 아파 하자.[각주:3]


5. 물론 어떤 관점에선 이런 불만도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소셜한 것’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을 주된 수단으로 한 표현적 자아들의 전시적 행위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의 포스팅을 봐줄 (즉 '좋아요'해주고 '리트윗'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즉 내게로 되돌아올 그 타자의 시선을 은밀하게 응시하면서 이루어지는 자기만족적인 표현행위, 정확히는 전시적 퍼포먼스에 가까운 그런 행동이 어떤 측면에선 외설적인 욕망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고민 자체는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그런 고민 속에서 결국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것도 나름대로는 윤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단, 문제는 그가 목사라면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2,000년 역사 동안 목사, 즉 성직자들에게 요구되어온 가장 기본적인 직업윤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식이건 위선이건 관계없이 목사는 직업적으로 일단 희생자들/패배자들/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을 신원하는 한(恨)의 사제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안과 밖을 포괄하는 일종의 사회적 상상계이다.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기능을 사회통합적인 동시에 사회보수적인 것으로 보는 오랜 관념 역시 바로 거기서 생겨난 것이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말고, 일단 목사라면 민중의 고통과 신음을 달래기 위해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 한다는 것이 종교에 대한 보편적인 기대이다. 


6. 여기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진술, 곧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원래 그 표현이 나온 맥락은 이렇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각주:4]


저 일련의 진술들에서 마르크스는 종교의 양면적 성격, 즉 ‘현실 세계의 비참함의 반영이자 표현’인 측면과 ‘그러한 비참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측면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종교가 현실과 관계 맺을 때, 그것은 한편으로는 비참한 현실에서 만들어진 바, 그 현실 세계의 비참함을 그대로 표현하는 성격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현실 세계의 비참함에 대한 반란의 성격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때론 억압당하는 피조물의 한숨이자, 심장이 없는 세계의 감정이며, 정신을 상실한 상황의 정신으로 표현되며, 때론 반대로 인민의 아편으로 취해지면서 소극적이나마 비참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르크스의 시대에 아편이라고 하는 것이 진통제/마취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진술 역시 비참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종교의 진통제/마취제적 성격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마취제/진통제 없이 환부를 도려내는 고통스러운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이는 종교의 현실적 기능을 가장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진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싫든 좋든 종교는 사회적으로 그런 진통제/마취제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또 필요하다면 그런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일종의 종교의 사회적 존재론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편 그 이상의 기능을 하고자 했던 종교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민중신학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해방지향적 신학은 바로 그 ‘진통제/마취제’ 너머의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찾고자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 작전에 참여하면서 했던 말,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으로부터 차의 핸들을 빼앗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도 바로 그러한 종교의 진통제/마취제 그 이상의 기능을 말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7. 따라서, 종교가 아편으로서조차 기능하지 않겠다면 그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종교가 유의미한 사회적 존재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굿모닝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노란 리본을 달면 종북 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의 페이스북을 보았다. 큰 일 할 목사가 노란 리본 달고 다니면 안 된다고 누가 충고했다는...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노란 리본을 단 오대식 목사가 나는 좋다. 그래도 난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큰 일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종북좌파로 몰릴까봐도 아니다.” 그래서 왜 그는 노란 리본을 굳이 안 달겠다는 것인지 그 이유는 끝까지 밝히지 않고 있다. 어쩌면 오히려 그가 결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못 박고 있는 저 이유들 때문에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글을 읽어봐도 그가 애도를 표현하지 않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저 얼토당토 안 한 이유들이 사실은 그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애도 행위의 거부 사유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의 말인즉슨, “난 아무 것도 표현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아무런 실천도 하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 내게 실천을 강요하냐, 그렇게 나에게 모종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니들은 다 내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거야”, 라는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마 이념 갈등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한국사회의 저열한 레드 콤플렉스와 무분별한 진영 논리에 포획되어 목사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역할마저 포기하겠다는 것으로 이 글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8. 물론 굿모닝 목사는 보수나 진보 그 어느 진영의 이념 논리에 일방적으로 포획되어 있다고 보진 않는다. 차라리 그는 그렇게 각각의 진영을 나누는 ‘진영 (분할의) 논리’에 포획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 이미 2년 전에 5·18을 두고 쓴 글에서도 보았듯이, 그의 중립강박이야말로 그가 진영 논리에 포획되어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남들은 굳이 받아들이지도 않는 진영 논리에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강하게 포획되어 있기에, 그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각각의 진영에 대한 양비론을 펼치고, 자신을 목사로서 그 두 진영 사이의 중재자로 위치시킨다. 노란 리본을 말하면서 종북좌파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가 그런 진영 분할의 논리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닌가. 그런 진영 분할의 논리 자체가 문제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 그런 프레임을 굳이 가져와서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변호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9. 굿모닝 목사가 적극적으로 노란 리본을 달고 추모의 뜻을 나타냈다면 그는 (목사의 직업윤리적 관점에서) 그저 ‘보통’의 목사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적극적으로 세월호 추모를 비난했다면 목사로서 뿐만 아니라 시민으로서나 인간으로서 매우 ‘나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두 가지 다 거부한다는 것이다. 목사의 직업윤리에 충실하여 세월호 추모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월호 추모를 적극적으로 비난하는 비도덕적이고 극우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목사의 직업윤리적 관점에서 ‘나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목사로서 철저하게 잘못한 것이다. 인간으로서나 시민으로서 잘못한 것이 아니라, 목사로서, 목사답지 못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시민으로서나 인간으로서 평가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그가 목사라는 사실에서이다. 이는 결코 목사에게 요구되는 윤리가 다른 이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에 비하여 질적으로 수준이 더 높은 윤리라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글에 불편함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결핍되어 있다고 본 어떤 윤리적 자질은 철저히 ‘목사’라는 직업과 관련된 윤리적 자질이었다. 목사라는 직업이 갖고 있는 윤리에 대한 상식적 이해에 기초하여 그의 윤리적 결핍을 비판했던 것이다. 


10. 사람들이 그에게 느끼는 불편함의 정서는 아마도 이런 것이겠다. “저게 목사가 할 소리냐? 목사가 과연 저런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는 것이 목사로서 합당한 행동이냐? 그럴 거면 왜 굳이 목사가 된 것이지?” 그에게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목사로서의 윤리는 위에서 말한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특화된 직업윤리일 뿐이다. 이 윤리는 결코 다른 직업군들과 비교해서 그 수준의 높고 낮음을 말할 수 있는 윤리가 아니고, 그저 목사에게 특화되어 더욱 더 전문적으로 요구되는 종교인의 사회적 역할에 근거한 윤리이다. 목사에게 그런 직업윤리를 요구하는 것이 목사가 아닌 이들에겐 정말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의 열두 사도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목사들 스스로 주장하는 그 직업(루터와 칼뱅식으로 말하자면 정확히는 ‘소명’이라고 해야 할)에 부합하는 윤리란 것이 짧게는 개신교 500년사, 길게는 기독교 2000년사에서 지속적으로 정립되어 왔고, 그러한 직업윤리가 기독교의 안과 밖을 포괄하여 하나의 사회적 상상계로까지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11. 우리는 특히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한국사회가 교회, 나아가 종교계 전반에 기대하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것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개신교와 가톨릭 구별할 것 없이 한국교회는 세월호 참사에서 이러한 사회적 기대를 철저하게 저버렸다.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맡아주어야 할 역할에 대한 기대, 그러나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음으로 인해 생긴 결핍 같은 것이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당시 나타났던 열렬한 관심과 지지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러한 ‘프란치스코 신드롬’은 한국의 성직자들에게 갖고 있는 대중적 기대가 전혀 충족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외부의 누군가가 나타나서 대신 충족시켜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월호 참사의 여파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유가족들이나 시민들이 종교, 특히 개신교나 가톨릭에 기대했던 것은 유가족들에 대한 적극적인 공감의 태도였다. 물론 그 공감은 정치적 이념 논리,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고 유가족들을 일관되게 지지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12. 하지만 굿모닝 목사와 같은 교계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목사들은 한결 같이 국가의 눈치를 먼저 살폈고, 유가족들에 대한 자신들의 협력과 지지가 반국가적인 태도, 좀 더 정확히는 종북좌빨들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비치지 않는 선에서 대단히 소극적으로 지원에 그쳤다. 한 마디로 불우이웃돕기 성금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세월호 유가족들을 대했던 것이다. 유가족들이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급급한 모습을 드러냈다. 종교라는 것이 고통의 현실로부터 주어지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적 동일시, 도덕적 요구에 대한 책임적 응답과는 무관한 지극히 사적인 자기만족의 도구가 되어 갈 때, 즉 사회적 영성·고통 공감·도덕적 책임의 자리로부터 제도 종교가 물러날 때, 사실상 종교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기능을 거부하는 것이자, 종교가 유의미한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 안에 존재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굿모닝 목사의 글은 종교가 하나의 사회적 실체로 존재하고는 있으나 사실상 그 존재의 사회적 가치는 전무한 상황, 곧 종교의 사회적 부재의 현실을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1. 김동호 목사의 글 전문을 인용하고 이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글로는, 「목사들의 참회록인가?」, 『당당뉴스』, 2015.4.21. http://m.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30 참조할 것. [본문으로]
  2. 페이스북 페이지 ‘김동호목사의 개인페이지입니다.’ 2013년 5월 18일자 게시물. https://www.facebook.com/kimdonghopage/posts/453701851386863 [본문으로]
  3. 페이스북 페이지 ‘김동호목사의 개인페이지입니다.’ 2015년 4월 15일자 게시물. https://www.facebook.com/kimdonghopage/posts/843377702419274 [본문으로]
  4. 칼 맑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박종철출판사, 1991, p.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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