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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ros회원이신 정정훈 님의 새 책, `인권과 인권들'에 대한 이우창 님의 서평입니다.


원문: http://begray.tistory.com/253


아울러 정정훈 님의 책, `인권과 인권들'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알라딘 링크: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7813


편집/업데이트 내역.

- 2015. 6. 7. 18:00. 업로드. 

- 2015. 6. 8. 08:10. 책표지 추가.



정정훈. <인권과 인권들: 정치의 원점과 인권의 영속혁명>. 그린비, 2014.



 정정훈 선생의 <인권과 인권들>을 읽었다. 올해 1월 수유너머N 화요토론회 발표자리에서 저자 서명이 적힌 책을 받았는데--그는 그 자리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질문자이기도 했다--, 좀처럼 손을 못 대다가 이번에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을 기회로 읽게 되었다. 300쪽 정도의 많지 않은 분량에 대체로 읽히기에 무리없는 문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이론적으로 숙고해야 할 대목이 있어 4-5시간 가까이 걸렸다. 여러 차례 읽고 정리해야겠지만, 일단 한번 읽은 뒤의 생각을 적는다.





 기본적으로 <인권과 인권들>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이론적인 텍스트였다. 이때 "이론적"이라는 표현은 비실천적이라는 뜻이 아니라--이론과 실천은 대립한다는 통념은 대체로 무익하다--이 책이 인권 개념의 이론적 재구성 또는 재활용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나와 같이 이미 정치철학적 논의에 다소나마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큰 어려움 없이 읽히겠지만 한국 인권운동사나 현재 인권운동의 현안 같은 내용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프랑스 혁명을 다루는 2장은 (물론 이 부분에도 18세기 서유럽과 프랑스 혁명에 관심있는 독자와 그렇지 않은 독자 사이에 간극이 있겠지만) 그나마 나으나, 특히 아렌트-아감벤-바디우, 랑시에르-발리바르-스피노자 및 데리다 등의 이론을 소개하고 양자의 대립적 구도 위에서 저자 본인의 입장을 정향하는 3장에서 6장까지의 실질적인 '본론'은 해당 이론가들의 논리를 어느 정도 숙지하지 않는다면 쉽게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저자가 해당 부분에서 본인의 명확한 언어로 정리하는 대신 여러 이론가들의 논의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해나가는 탓도 있다. 나는 이러한 서술방식이 <인권과 인권들>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저자가 좀 더 자신의 논의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서술로 보완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론적 언어를 빌려 자신의 의도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오늘날 한국에서 보기 드문 사례임은 분명하며, 설령 그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일지라도 이 책이 지적인 자극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권과 인권들>의 전체적인 서사를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오늘날 인권의 위기를 검토하고, 2장에서는 프랑스 혁명사를 통해 인권 개념의 역사를 짚는다. 3장과 4장은 인권 개념에 대한 이론적 비판 및 반비판의 주요한 사례들을 다루며, 이때 논의는 주로 프랑스-미국의 '비판 이론'에 할애되어 있다. 저자는 5장과 6장에서 인권 개념에 다시 정치적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한 이론적 재정초를 수행한다; 여기서도 스피노자, 발리바르, 데리다와 같이 '현대 프랑스 정치철학'의 계보에서 주로 거론되는 논리가 참고되는데, 정작 인권 개념을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는 미국의 정치철학('비판 이론'과는 구별되는)계의 시선이 거의 다뤄지지 않는 걸 불만스럽게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 책 전반에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문제의식이 '어떻게 인권을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에서 탈구시킬 것인가?'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인권과 인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기술발달 및 금융화를 통해 기존의 노동력을 소화할 수 없게 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배제된 인구"(25)의 표상으로 오늘날 만연한 좀비의 이미지를 예로 드는 프롤로그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인권이 세 가지 형태의 위기, 즉 "시큐리티 통치체제, 인권담론의 위기, 인권 감성의 쇠티"(28)에 직면했다고 설명하는 1장은 <인권과 인권들>의 담론이 전개되기 위한 무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한편으로 경제적 차원에서 (재)생산 메커니즘으로부터 잉여인구, 즉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지속적으로 확대생산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정치 권력은 그러한 '좀비'들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물질적/제도적 토대를 해체하고 이에 따른 반발을 제압한다("시큐리티 통치"). 한 마디로 이 과정에서 시민으로서의 인간은 인간 이하의 '동물-인간'으로 격하된다.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권력의 작동에 대항해 사회구성원들의 배제를 막고 (그람시적 의미에서) 시민사회의 생동성을 보존/활성화하는 것이 인권운동의 역할이라면, 이 인권운동은 한편으로 90년대 이후의 다양한 분화--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한 예로 들 수 있겠다--및 인권 개념의 추상화 등을 통해 심지어 우파들에게 전유될 정도가 되었으며 동시에 맑스주의를 포함해 기존의 '거짓 보편성'을 비판하는 다양한 좌파적 비판에 직면하여 그 담론적 힘을 상실해갔다("인권담론의 위기"). 동시에 인권운동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의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공감sympathy의 정서가 신자유주의적 경쟁구도로 내몰린 한국 사회에서 급속히 사라졌다("인권 감성의 쇠퇴"); 나는 공감이 기본적으로 '나'와 타자의 상동성을, 즉 우리 모두가 보편적 인간의 상을 공유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는 점에서(스미스의 <도덕 감정론>_Theory of Moral Sentiment_가 대표적이다) 이를 보편성의 상실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인권과 인권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자본) 대 시민사회라는 고전적 도식에 입각해 있다. 양자의 갈등관계에서 후자로 하여금 전자의 폭압을 견제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매개항이 바로 인권(운동)이다; 국가-인권-시민사회라는 느슨한 삼각형을 떠올려도 좋겠다. 오늘날은 한편으로 국가권력이 적극적으로 시민사회의 해체/관리작업에 개입하며, 인권 담론이 동력을 잃었고, 인권 담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공급하는 사회의 특정한 정념--공감--이 힘을 잃었다. 이러한 정세인식 위에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인권 담론의 역사를 되짚고 그것에 새로운 이론적 동력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대목에서 눈에 걸리는 지점이 있다면, 18세기 서유럽의 서간소설로부터 공감-인권의 논리를 전개한 뒤 곧바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 공감의 쇠퇴로 넘어가는 방식은 역사기술의 측면에서는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 공감의 쇠퇴를 논한다면, 애초에 (18세기 서유럽이 아닌) 현대 한국에서 공감이 어떤 형식으로 존재했는가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인권과 인권들>은 이 과제를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수행하지 않는다. 인권이 보편적인 공감에 기초한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 있지만, 현대 한국에서 사회적 공감이 과연 선행했는가? 오히려 사회적 공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인권운동만 존재했다고 볼 여지는 없는가? 좀 더 파고든다면, 보편-공감이라는 정념이 작동하는 사회적 단위로서의 시민사회--예를 들어 하버마스의 부르주아 공론장--와 같은 것이 한국에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저자의 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기한 물음들에 답할 수 있는 설명이 거시적인 스케치의 형태로나마 주어져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내용은 없다. 내 생각에 이는 이 텍스트가 점차적으로 이론적인 논의에 집중하면서 현대한국에 대한 언급은 부분적인 사례들의 제시로 그치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여전히 이 텍스트가 실천적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추상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나는 뛰어난 이론적 저술은 어떤 형태로든 그 이론이 배태된 사회적 맥락을 품게 된다고 믿는데, <인권과 인권들>은 이 점에서 다소 아쉽다.




2장 "인권과 혁명"은 프랑스혁명기를 살피면서 인권개념의 탄생과정을 역사적으로 조망한다. 먼저 프랑스 혁명과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을 둘러싼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논쟁을 소개하고, 다음으로 프랑스혁명을 1871년의 파리 코뮌까지의 "장기혁명"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수정주의적 해석을 참고하면서) 혁명을 그것을 구성한 다양한 입장들의 복합체로 정의한다. 전자가 인권운동의 기원으로서 "인간의 권리"를 놓는다면(다만 이때 버크-페인 논쟁은 감수성sensibility이나 덕virtue과 같은 주제를 생략하고 있으며 다소 도식적인 통념에 따라 해석되는 감이 있다...근래의 정치사상사나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접한 독자들에게는 조금 낡은 감을 줄 수도 있다), 후자는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자유주의 혁명으로 보는 통념을 반박한다; 이는 인권의 개념을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종속시키지 않기 위한 정지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도는 혁명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 루소를 로크의 자유주의 또는 '소유적 개인주의'와 구별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97-99). 저자가 바라보는 프랑스혁명은 경제적 계급, 성차, 민족, 인종과 같이 여러 층위에서의 핍박에 대항한 소수자/약자들의 평등-자유에 대한 갈망이 폭발한 사건이며, 이러한 복수의 층위에서 전개되는 해방적 계기를 포괄하는 것이 (이후에 언급될) '인권'(HUMAN RIGHT)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권과 인권들>은 프랑스혁명이 최종적으로 부르주아의 지배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과정에서 가시화된 다양한 운동들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진전해나갔다고 주장한다.



 3장 "인권과 그 불만들"은 인권 개념의 허위성 혹은 무력함을 비판하는 입장들을 소개한다. 맑스에서 바디우에 이르는 비판적 시선은 인권이 동물적인--19세기의 맥락에 맞춘다면 (좁은 의미의) "자유주의적" 혹은 "공리주의적"과 같은 표현도 적절하겠다--인간, 신체의 생존과 감각의 쾌로만 정의되는 인간관에 기초해 있다고 지적하는 데서 궤를 같이 한다. 맑스에게 인권 혹은 시민권의 개념은 시민사회의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이때 시민사회는 헤겔의 도식을 따라 경제적 영역을 지칭한다. 조금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논리는 아렌트-아감벤의 것으로, 양자는 정치적 삶의 장으로서의 시민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을 보호하는 권리가 인권이라면, 이러한 "벌거벗은 삶" 또는 "호모 사케르"는 국가권력의 생명정치적 작동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시민권/국민의 권리)를 결여했기 때문에 인권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아감벤의 논리와 생명정치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명확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데, 글의 전제적인 흐름에 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3장이 제기한 인권담론의 위기에 대항해,  4장 "인권을 넘어선 인권"은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으로부터 정치적 저항을 위한 이론적 토대로서의 인권 개념을 끌어내려 한다. 아렌트-아감벤의 논의가 정치적 참여가 가능한 시민권을 유일한 해답으로 보고 따라서 시민권을 박탈당한 이들이 국가폭력의 무제약적 행사 앞에서 무력함을 이야기할 뿐이라면, 랑시에르와 발리바르는 공식적인 정치로부터 배제된 이들이 연대와 봉기를 통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창한다. 이때 인권은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라는 윤리"로서 기능한다(169). "인권의 정치는 정치적 주체, 국가와 사회의 제도라는 틀 속에서 향유하고 쟁취할 수 있는 권리의 주체에 어떠한 자격 제한도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정치이다." 발리바르는 <인권선언>을 독해하면서 평등과 자유가 불가분함을 주장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보편적 평등자유égaliberté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 인권의 정치라고 말한다; 요컨대 아렌트-아감벤이 설정한 시민권과 인권의 분할을 폐기하기 위한 투쟁으로서 인권의 정치가 재등장한다(174-75). 이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배제된 자들이 연대를 통해 자신들을 정치적 주체로 형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시빌리테의 정치"이기도 하다(187-88).


 그러나 랑시에르-발리바르의 이론이 실제로 아렌트-아감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적절한 답변이 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후자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기술적으로, 물질적으로 강력하게 작동하게 된 오늘날의 국가권력에 대한 비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나 신자유주의적 조건처럼 국가권력이 시민사회로부터 배제당하는 인간들을 생산하고 또 이들을 무력으로 침묵시키기를 개의치 않을 때, 배제당한 자들의 연대가--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실제로 국가폭력의 압도적인 무력을, 생명정치적 작동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아감벤 식의 존재론적 사고가 더 나은 해결책을 보장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랑시에르-발리바르가 소환하고 또 정당화하는 인민봉기의 권리가 얼마나 유효할 것인지에는 여전히 미심쩍다; 특히나 오늘날의 한국처럼 국가폭력이 광범위하게 또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5장과 6장은 저자의 고유한 이론적 입장이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인권과 인권들>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5장 "인권, 관개인적 권리와 인간-양태의 권리"는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인권개념을 극복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토대로 새로운 인간관 혹은 주체론을 설정하려 한다.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간추린다면, 타자를 배제하는 개체의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관과 달리 스피노자는 인간이라는 개체 또한 보다 작은 개체들의 집합체이며 인간의 생존과 역량강화를 위해서는 타자와의 소통/관계맺기가 필수적이다. "즉 개인이란 항상 복수의 하위 개체들로 구성된 복합체이며 개인은 자신의 실존과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타인을 비롯한 다른 존재자들을 필요로 한다. 개인의 대체 불가능한 특이성은 무엇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권이란 타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 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는 것을 통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의 연합의 관계를 구축함으로써만 확보될 수 있는 권리이다. 자연권이란 연합체 속에서만 실제적으로 보장받고 누릴 수 있는 공동의 것res communis이다"(232). 타자와의 연합, 또 다른 개체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음을 깨달은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타자/대상에 대한 배타적이고 무제약적인 권력행사를 중단한다; 마치 지나친 자원개발이 자원의 고갈과 인류의 쇠퇴를 가져올 것임을 깨닫고 난개발을 멈추는 인류처럼 말이다.


 6장 "(불)가능한 권리와 인권의 정치"는 인권과 (인권에 내재한) 인간의 보편성이 이데올로기적 허위라는 비판에 대항해 그것이 현실적 실천으로는 보편성을 갖지 못하더라도 보편성의 이념을 담을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권'은 마치 칸트의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과 같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도달할 수는 없으니 지향점으로 계속해서 남아 새로운 실천을 불러일으키는 보편성으로 남으며, 현실의 다양한 실천들로서의 인권'들'은 사회를 보편적 인권의 실현으로 점차 이끄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이념으로서 '인권'이 갖는 역할을 이론적으로 재정초하는 게 6장의 요점이다.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개념은 자체가 보편적인 이념이자 동시에 그것이 결여된 현실로부터 이념을 실현하려는 무한한 혁신운동을 끌어내는 목표로 다시 소환된다. 이는 (불)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논의와 연결된다. "인권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권리, 절대적 이념으로서의 인권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정치적 실천이다"(279). 국가는 한편으로 인권의 실현을 제약하면서 동시에 그 실현의 매개물이라는 양가적 위상을 갖는다. 여기서 표면적으로는 발리바르와 데리다의 논리에 기초한 6장의 논의가 (실제로 스피노자의 영향을 깊게 받은) 헤겔적인 논리를 상기시킨다는 것을 짚어두자...물론 헤겔은 이념의 불가능성에 머물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분명히 한 걸음의 차이가 있는데, 나는 현재로서는 저자가 그 사이를 뛰어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



 

 5장과 6장은 이론적으로 다양한 사고를 촉발할 수 있는 부분으로 쉽게 몇 부분만을 다루고 정리하기는 어렵다. 가능한 질문 중 하나를 꺼내본다면, 이 책은 개인들의 무제약적인 자유행사가 서로에 대한 침해를 초래하지 않도록 필연적으로 제약될 수밖에 없으며--이것이 평등자유로서 인권이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국가 혹은 사회가 자유의 제약을 통해 자유를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고전적인 형태의 사회계약론의 논리를 다시 도입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자연권의 제약과 포기에 대한 홉스의 논의와 무척 닮아있다. 이때 자유 혹은 역량의 실현은 여전히 개인의 자유/역량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헤겔적인 의식의 상승/확장과정처럼 공동체적 삶이 개인을 초월하는 주체로서 자유/역량을 사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인권과 인권들>은 단일한 신체를 가진 개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근거한 인권 개념을 보전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인간의 개체적 폐쇄성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이율배반을 스피노자를 경유해 관개인적 주체를 재구성하는 길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론에서 도출되는 연합 혹은 인권의 정치가 자유주의적 논리를 실제로 탈피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예컨대 우리는 자유주의적 인간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순히 '각 개인은 각자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선택을 한 결과 정치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는 논리를 저자의 대안과 동일한 결과를 공유하는 양립가능한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나는 스피노자의 논리 자체가 이러한 양의성을 갖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데, 이에 대한 논의는 현재로서는 내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는 저자가 서 있는 지점이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사이 어딘가가 아니냐는, 한 마디로 그가 아직 충분히 공동체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유발한다. 요컨대, 저자는 실제로 인권을 자유주의로부터 구출하는데 성공했는가, 아니면 명시적인 자유주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여전히 자유주의와 개인의 범주 안으로 빨려들어오는가?


 나아가 개인의 자유/역량의 실현 및 확장은 어떤 형식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는가? 그것은 홉스에서처럼 자기보존 및 물질적 삶의 풍요로움인가? 로크에서처럼 근면을 통한 재산권의 확장인가? 루소에서처럼 일반의지=공동체의 덕에의 융합인가? 헤겔처럼 더 넓은 형태의 공동체적 삶--인륜성--에의 합치인가(혹은 악셀 호네트가 강조하듯 '인정'도 포함되는가)? 현재의 인권운동들이 다소간 해당 운동과 결부된 주체에 따라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면, 인권이 실현되는 형식은 어떠한 실천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나는 실천의 범위 자체를 확장하는 것이 인권의 정치에 속한다는 의례적이고 손쉬운 답변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 질문을 지속하고 싶은데, 이는 결국 '인권'의 개념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권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유발한다는 사실과 이상의 질문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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