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진/강성호

천세용의 분신자살과 성공회: 자살한 신자는 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할 수 없을까?

들어가며


2014년도는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로 시작되었다. ‘박근혜 퇴진’과 ‘국정권 특검 실시’를 외치며 분신했던 이남종(40)이 사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1월 1일에 숨졌기 때문이다. 이남종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남종 추모기도회’를 열었다. 박은규 공동대표(정의평화기독인연대),  안성용 집행위원장(이명박구속과박근혜사퇴를위한개신교평신도시국대책위), 홍승권 집사(향린교회). 박득훈 목사(새맘교회), 최헌국 목사(촛불교회) 등의 참여로 추모기도회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위의 ‘이남종 추모기도회’를 보도한 뉴스앤조이 기사 밑에 “자살한 사람을 추모하다니,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있는가 묻고 싶다.”, “영정 앞에 있는 십자가를 치우면 좋겠다. 자살한 사람에게 십자가가 왠 말인가?”라는 댓글에 대답하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자살을 죄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자살한 사람들의 교회 장례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상황을 고려하기보다 교리적으로만 접근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들은 종교라는 틀에 갇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의 윤리학이 결여된 것이 아닐까. 귀중한 생명을 천시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문제를 도그마에 갇힌 교리로 잣대를 들이미는 것에 뭔가 반박하고 싶어졌다. 아래의 글은 역사학도로서 1991년 5월 투쟁에 있었던 한 사건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 것이다. 





천세용의 분신자살

1991년 5월은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었다.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강경대가 무참히 살해된 것을 비롯하여 박승희, 김영균 등이 저항의 수단으로 자신의 몸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5월 3일에 분신자살한 천세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90년 2월 서울 동북고를 졸업한 뒤 경원대에 입학해 총학 산하 선봉대인 ‘횃불회’의 회원으로 적극적인 학생운동을 펼쳤던 대학생이었다. 천세용은 이날 경원대 공대건물 3층 현관 난간 위에서 “학우여, 이제 복수다. 6천 경원인 단결투쟁, 노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온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5m아래 바닥으로 투신하였다. 분신자살 시도 후 천세용은 화상 전문 클리닉이 있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져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았으나 사망하였다. 동료들은 사체를 경찰 등으로부터 탈취 당했던 경험을 이유로 안전한 시신사수를 위해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천세용을 후송하였다.

천세용은 
1989년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성공회 신자였다. 기독청년협의회 소속 100여 명의 회원들은 "천세용을 살려내라"고 쓰인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을 나와 서울시청으로 향했다. 이들은 서울대성당에서 ‘요한’으로 영세를 받은 천세영의 죽음을 애통했다. 





거리로 나온 사제들


천세용의 분신은 성공회 사제들이 거리로 나가게 만들었다. 천세용의 분신을 접한 성공회 사제단은 수서비리, 페놀사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 증가하고 있는 양심수의 숫자 등을 이유로 현 노태우 정권이 민주화의 의지가 전혀 없으며, 민주화를 실현할 능력도 없다고 비판하였다. 성공회 사제단은 천세용의 분신도 이러한 현 정권의 본질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사제단은 젊은 학생들의 죽음이 모든 기성세대에 대하여 자성과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요즘 일어나고 있는 온갖 비리와 사회의 모순은 기성세대들의 책임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사제단은 노태우 정권이 백골단을 해체하는 등 양심적고 실질적인 민주화 조치를 분명히 취할 때까지 모든 신자, 청년들과 함께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천세용군의 분신·죽음에 접한 대한성공회 사제단이 농성에 들어가며」)

교회법을 넘어


천세용의 장례식은 5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이날 오전 9시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애국학생 천세용 영결미사’가 유가족 및 신자 등 5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원래 천세용의 장례 미사는 대한성공회 공도문에 규정된 <자결한 자에 대한 예식사용 불가>조항에 의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천세용의 분신을 접한 성공회 사제들은 세 차례에 걸친 토론을 벌인 끝에 “그의 죽음은 단순한 자결이 아니라 폭력사태와 비민주적 상황에 의한 타살”이라는데 뜻을 모았다. 이로써 천세용의 장례식은 성공회 성당에서 치러질 수 있게 되었다. 


성공회 사제들은 자결한 자의 장례미사를 치를 수 없다는 교회법에 대해 “예식을 해석할 권한이 주교에게 주어져 있다”는 공도문(the book of common prayer)의 5의 가항을 인용해 장례미사의 근거를 마련한 뒤 정연우 서울대교구 총감사제의 재가를 받아 천세용의 죄를 사한다는 뜻의 ‘특별관면’을 발표하였다. 성공회 사제들은 그의 죽음이 “귀한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세상을 밝히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특별관면’조처를 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성공회의 시국인식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교회법을 뛰어넘은 획기적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날 장례 미사에서 이대용 신부는 설교를 통해 “비록 요한(천세용)의 분신자살은 가장 고귀하게 생명을 사용한 것이지만, 더 이상 희생이 없도록 하자. 오늘 영결미사를 생명의 축제로 승화시키는 자리로 만들자”로 말하였다. 천세용의 영결미사에 참석한 한 신자는 “영세와 견진성사까지 받은 천씨가 왜 분신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형제들을 분신으로 내몬 유일한 배후조종자는 현 정권일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상에서 보듯이, 성공회 사제들은 천세용의 분신이 단순히 한 개인의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1970년 전태일의 분신에 대한 새문안교회 기독청년들의 인식과 대동소이했다. 이들도 전태일의 죽음이 단순히 한 개인의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태일의 죽음에는 한국교회도 공모자로서 책임이 있다고 인식하면서 ‘참회의 금식기도회’를 가졌다. 이들은 전태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메마른 양심에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분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을 외면하고, 교회여! 무엇을 하려는가. 회개하라!"

타자의 고통,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한 오늘의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외침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