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스피노자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정치 ․ 사회적 환경을 배제한 채 스피노자의 사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또한 스피노자 당시의 사회를 고찰하는 것은 오늘날 민중신학함에 있어서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왜냐하면 그는 민중신학이 그러했듯, 단지 시대가 낳은 아이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야생적 별종”(네그리)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민중신학자들과는 다르게 그의 글을 최대한 교양 있는 식자들이 읽어주기를 바랬고, 때문에 네덜란드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글을 썼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전에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들>과 <신학정치론> 단 두 권만을, 그마저도 후자는 익명으로 출간해야 했으며, 공화제에서 총독제로 정권이 바뀌면서는 그 책이 금서(禁書)로 지정당하는 것(1674년)을 지켜봐야 했다. 스피노자의 다른 책들 역시 그의 죽음 이후에야 - 역시 익명으로 - 출간될 수 있었다. 이것은 다중의 자유와 능력에서 출발하는 그의 사상이 당시 교회와 국가체제에 매우 위험한 사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민중신학함에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민중신학 역시 ‘학(學)’인 이상, 그것이 완전히 민중에게 읽힐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신학함이 민중을 배제함으로써 성립되어 있는 우리의 종교와 정치체제의 안락한 토대를 얼마나 위협하고 있는가에, 또한 민중의 자기 초월하는 해방의 능력에 접붙여 짐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그려내는가에 있지 않을까.
이어지는 절들에서 네덜란드의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나는 ‘신학적 주권체제’와 ‘주권적 신학체제’라는 개념을 사용하려 한다. 이 개념은 당시 칼뱅주의 교회와 오란녜 가문의 공모를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17세기 후반, 칼뱅주의자들은 레이덴의 신학자였던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의 이론에 입각해 단 하나의 “기독교 사회” 아래에서 국가와 교회에 대중이 이중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주권적 신학체제) 이들의 신학에 굳이 ‘체제 regime’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들의 신학이 순수한 담론적 ․ 이론적 층위에서만 작동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의 정치적 체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면 “신학-정치”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비전을 발견한 곳은 바로 홀란트의 총독 가문인 오란녜 가문(Oranje-Nassau 家)이었다. 오란녜 가문은 칼뱅주의 주권적 신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스페인과 프랑스 등 강대국들과의 전쟁에서 지도력을 과시함으로써 대중의 열광적, 신앙적 지지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주권체제를 구성하려 했다.(신학적 주권체제) 스피노자는 이러한 주권적 신학체제와 신학적 주권체제에 맞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장에서 17세기의 “야생적 별종” 스피노자의 삶의 자리를 탐구해볼 것이다._김강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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