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된 국가였다.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탄압받는 여러 분파들은 네덜란드에서 그 안식처를 찾았고, 스페인과 동유럽의 유태인들 역시 이단사냥을 피해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각자의 양심의 자유와 내면적 신앙은 불가침의 영역으로서 존중되었다.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동기와 함께 에라스무스로 대표되는 인문정신에 기반을 둔 것이었고, 중앙집권적이고 일원적인 정치질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한 종파가 ‘국교’가 되어 완전히 정치와 사회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17세기 유럽의 상황에서 ‘상대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네덜란드 역시 종교전쟁이 유럽을 휩쓸던 “17세기 유럽”이었다. 종교적 갈등은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통상 그 갈등은 ‘칼뱅파’와 ‘비 칼뱅파’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대칭적인 갈등은 아니었다. 칼뱅파는 주류였고, 비 칼뱅파는 비주류였다.
(2) 칼뱅주의의 대두
재세례파의 지도자 메노 시몬스
(3) 칼뱅파 내부의 갈등: 아르미니우스 파와 고마루스 파
그러나 네덜란드가 1609년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 하자 칼뱅파 내부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초창기에 칼뱅주의를 주로 받아들였던 것은 도시 부르주아지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상업적 이익을 위해 전쟁이 빨리 종전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촌의 인민대중과 도시 프롤레타리아, 군인 출신의 칼뱅주의자들은 매우 엄격하게 카톨릭의 철저한 배척과 말살을 목표로 하는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2)
도르트레흐트 교회 회의, 벨기에 신앙고백을 체택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한다. 장로교인들은 좋아라~ 하는 회의.
이들의 갈등은 1610년대에 격화되어 나타났다. 정치적 갈등과 교리적 갈등이 동시에 나타났다. 당시 총독인 오란녜 공 마우리츠(자료 링크)가 종교의 관용을 옹호하던 정무관파의 재상인 올덴바르트네벨트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목사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그들을 숙청하고, 도르트레흐트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단죄했던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회의에 대표가 아닌 ‘피고’의 자격으로 출석해야 했으며, 일방적인 논쟁 끝에 파문되었다.6) 하지만 논쟁은 계속되었고, 공의회 명령의 집행권은 종교의 관용을 보장하고 있던 각 도시들에 위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지방정부들의 보호 아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칼뱅주의 외의 다른 교파들과 활발한 논쟁을 벌이며 지식인들 사이에서 계속 전파되었고, 정무관 파가 재집권하여 오란녜 가문을 총독과 최고사령관 직에서 배제했던 1650년대 이후로는 다시금 안정적으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4) 비 주류 종파들
네덜란드에는 칼뱅파와 아르미니우스파외에도 소위 “교회 없는 기독교도”7)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다양한 소종파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은 앞서 설명한 재세례파였다. 이들은 독립전쟁 시기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국가와 교회의 분리, 평화주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였고, 칼뱅주의 식의 억압적인 교회체제가 아닌 민주적인 교회체제를 옹호했다. 또한 자연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신앙관을 가진 소치니 파8)와 목사와 신학자 없이 평등한 신앙 공동체의 이념을 가지고 종파를 불문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와 토론 모임을 가졌던 콜레기안파 등도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특히 콜레기안파는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이들은 메노파, 루터파, 칼뱅파, 아르미니우스파, 소치니파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었으며, 심지어 카톨릭교인들이나 스피노자와 같은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용어와 상징을 사용했지만, 그 내용은 교회체제의 틀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들은 자유로운 성서해석과 회합의 자리에서 떠오르는 영감에 따른 예언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였고, 성서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를 강조하였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모임이었던 콜레기안파와의 교제는 젊은 스피노자의 정치사상과 신학사상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칼뱅파의 주권적 신학체제
이 사람이 바로 오란녜 공 마우리츠(1567-1625). 아버지의 대를 이은 전쟁영웅이자, 칼뱅주의자들을 등에 업은 독재자.
주류 칼뱅파의 목사들은 목사라기보다는 선동가에 가까웠다. 이들의 설교의 대부분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 대중을 선동하여 일정한 여론을 만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대중의 선두에 서서 당국의 정책에 간섭했다. 이후 의회파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그들은 지속적으로 의회파의 자유주의적 정책을 공격하며, 대중을 선동하였다.10) 또한 칼뱅파는 자신들 이외의 종교에 대하여 매우 비타협적이었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던 메노파는 이들에게 있어 국가의 평화와 통일을 어지럽히는 최악의 종교로 여겨졌다. 칼뱅파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외에도 소치니파, 메노파, 유대교 등을 탄압할 것을 당국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11)
따라서 정무관파의 집권기에 커다란 정치적 이슈 중 하나는 때로 극단적으로 향하는 칼뱅파 성직자들과 교인들의 요구를 어떻게 무디어지게 할 것인가였다. 무역이 번성하던 때에 칼뱅주의의 전투적, 전제적, 신정정치적 태도는 상인들과 부르주아 계층의 이해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2) 그러나 당시 인민 대중은 정무관파가 민족의 번영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속적으로 엄격한 칼뱅주의와 - 특히 위기 시에 - 오란녜가로 경도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군중의 폭동이나 봉기는 통상 칼뱅주의와 오란녜 가의 선동에 의해 발생하거나, 그들에게 이용당하였으며, 결국 권위주의적인 총독제에 대한 지지로 귀착되곤 했다. 이렇듯 칼뱅파는 “하느님의 주권”에 입각한 주권적 신학체제를 세웠고, 이것은 오란녜파의 군주제적 정치지향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기능했다.
(6) 오란녜파의 신학적 주권체제
1660년대 말에 이르러 이러한 칼뱅주의자들의 선동과 탄압은 상당히 위험한 수위로 치달았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익명으로 내야 했다. 그의 제자였던 쿠르바하가 68년에 종교비판서를 출간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만큼 네덜란드는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672년 정권이 오란녜파로 넘어가자 이내 스피노자의 책은 금서(禁書)로 지정 당하게 된다.13)
1672년 정무관파가 실각한 이유는 루이 1세의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정무관파의 군축정책과 평화주의적 외교 노선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드 비트 형제는 심지어 프랑스군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었다. 인민 대중은 “프로테스탄트의 수호자” 오란녜 가문의 젊은 지도자 빌렘 3세가 최고사령관과 총독의 자리에 올라,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 맞서 국가와 교회를 지켜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오란녜 파와 칼뱅 파는 대중의 반 비트 정서를 자극하여 결국 폭동을 일으켜 비트 형제를 살해하고, 지난 시기보다 더 강력한 총독제를 복원시켰다.
오란녜가와 칼뱅주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기부터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오란녜 공 빌렘 1세는 독립전쟁기였던 1573년에 칼뱅주의로 개종하였고, 칼뱅파가 주류를 이루었던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루어냈다. 이후에도 오란녜 가문은 칼뱅파 교회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칼뱅주의자들은 오란녜 가문의 지도자들에게서 그들이 꿈꾸는 정의로운 기독교 군주의 상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란녜 파의 정치행동은 곧잘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정치는 이러한 칼뱅주의의 주권적 신학체제와 오란녜 파의 주권적 신학체제의 결합물이라 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네덜란드의 정치 ․ 종교적 상황을 다음과 같은 도표로 정리한다._김강기명
1) 깔뱅은 <기독교강요> 초판(1636) 이래로 ‘이중의 정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영적인 정부 regimen spirituale와 정치적인 정부 regimen politicum를 의미한다. 정치적인 정부에 대해서 깔뱅은 시민생활에서의 정의와 외적인 도덕성만을 확립하는 통치권을 부여하여,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지만,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독립될 수 없다고 보았다. 국가 통치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하느님에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는데에 있었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하권, 김종흡 공역(서울: 생명의말씀사, 2006년), 593-596쪽
2) 김원태. “네덜란드 칼뱅주의 개혁교회와 국가의 관계 고찰”(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년), 41-42쪽
3) 이들의 입장은 1610년 「항변서」Remonstrance 로 정리되어 의회에 공식적으로 제출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첫째, 구원의 영원한 결정은 믿고 신앙 안에서 견인하는 자들에게 관계되며, 둘째,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지만 오직 믿는 자들만 유익을 얻으며, 셋째,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진실로 선한 일을 전혀 할 수 없으며, 넷째,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며, 다섯째, 신자들이 만일 그리스도의 도움을 원하고 수동적으로 있지 않는다면 유혹 중에 은혜의 도움으로 타락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르미니우스주의 5개 항목이라고 부른다. 존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양낙흥 역(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301쪽 참조
4)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40쪽
5)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41쪽
6) 도르트 회의에서 결정된 항목은 다름과 같다. 첫째, 선택은 창세전부터 하느님의 목적 위에 이루어졌다.(무조건적 선택) 둘째,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는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미친다.(제한된 속죄) 셋째, 타락으로 인간은 부패와 속수무책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가 가진 생래적 빛은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전적인 타락) 넷째, 중생은 영혼과 의지의 내적 갱신이며, 강력하고 즐겁고 놀라우며 신비하고 지울 수 없는 하느님의 역사이다.(불가항력적 은혜) 다섯째, 하느님은 택자들의 회개와 인내와 겸손과 감사와 선행을 계속 새롭게 하심으로 그들을 보존하셔서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은혜에서 떨어져나가지 않게 하신다.(성도의 견인) 존 맥닐. 앞의 책, 302쪽 참조
7) Leszek Kolakowski. "Les Crétiens sans église"(Gallimard, 1987);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으로부터 재인용
8) 폴란드에 정착하고 있던 이탈리아 출신의 종교개혁가인 파우스트 소치니의 이름을 딴 종파이다. 소치니는 예정론과 대속사상을 부정했으며, 자신의 사상을 담은『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소치니 파는 이후 유니테리언으로 이어진다.
9) 제네바는 종교개혁 당시 칼뱅이 목회를 담당한 곳으로서, 정치에 있어서도 칼뱅의 사상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자들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도 이러한 칼뱅의 이상을 이루어보려 했다.
10) 추영현. 앞의 글, 425쪽
11) “이 곳에는 설교자들의 극단적인 권위가 뻔뻔스러움으로 인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상과 신앙의 자유가) 억눌려 있습니다.” EP 30, 괄호 안은 필자
12) 추영현. 앞의 글, 426쪽
13) 이 사건은 스피노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그는 비트 형제가 살해당할 때 바로 옆 골목에 살았으며, 비트 형제가 살해당한 자리에 직접 쓴 “야만의 극치”라는 푯말을 꽂아 놓으려 했으나, 친구들이 그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말렸기 때문에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평생에 사람들 앞에서 목놓아 울었던 적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추영현, 앞의 글, 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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