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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민중신학, 스피노자를 만나다

I-3. 반(反)주권, 반(反)신학의 사상가 스피노자

(1) 유대교적 배경

Benedictus de Spinoza, 그는 본래 가문 명인 Espinoza를 버렸고, 자식이 없었으므로, 역사상 유일무이한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는 1632년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미카엘은 1600년경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카톨릭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한 ‘새파르디[마라노] 유대인’의 한 명이었다. 새파르디 유대인들은 남부 유럽에서 상당부분 유대교의 전통을 상실한 채 몇 세대를 지나왔기 때문에 이주 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네덜란드에서 민족과 종교의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유럽에서 이주해온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보존해온 탈무드와 카발라에 입각한 종교활동과 신앙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상업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세속적이고 인문적 성향이 강했던 새파르디 유대인에게 농촌지역을 배경으로 한 아슈케나지 유대교의 신비주의적인 교리는 잘 맞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네덜란드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1)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스피노자의 파문이었다.

스피노자는 어렸을 때부터 유대교의 학교에서 탈무드와 카발라,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유대인들은 상당히 게토화 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모어(母語)는 네덜란드 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였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 전통의 학문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때문에 유년시절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유대교 학교에서는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돕고 있던 와중에 메노파 출신으로서 콜레기언파의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던 친구들을 만나서 교류를 갖게 되었고, 콜레기언파의 모임과 자유사상가 판 덴 엔덴의 라틴어 학교에서의 수업을 통해 점차 유대교와의 관계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주의적 정신에 입각해서 유대교의 미신적인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스피노자의 이런 태도는 유대교 공동체를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결국 1656년 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파문 결정은 회개를 조건으로 철회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스피노자는 돌아가기를 택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교 및 가족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유산조차 상속받지 않은 채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야의 철학자로 살아가기 시작했다.2)


(2) 사상가로서의 명성

유대교로부터 뛰쳐나온 스피노자는 오래지 않아 재야의 자유사상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콜레기안파와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그들 중에는 이름을 날리던 당대의 과학자, 철학자 및 정무관파의 정치인들도 있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주의를 비롯한 합리론 철학과 광학 등을 연구했으며, 홉스와 마키아벨리 등의 정치사상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과 우려(특히 칼뱅파)를 받았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칼뱅파의 공격으로 인하여 추방당했다. 하지만 그는 콜레기안파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레인스뷔르흐로 이주(1660년)하여 친구들의 비호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이 시기에 <지성교정론>을 저술하였으며 3년 뒤에는 포르스뷔르흐로 이주하여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를 출간하고, 네덜란드 정치의 중심지였던 헤이그로 다시 이주하여 재상이었던 요한 드 비트와도 교분을 맺고 그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죽을 때까지 대학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혼자서 연구를 지속했다. 정무관파가 집권할 당시의 네덜란드가 학문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되는 분위기였다 할지라도 칼뱅파 교회는 끈질기게 자유사상가들과 이단 사상을 추적하였으며 당국에 압력을 넣고 있었기에 스피노자와 같은 자유사상가가 대학에서 공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스피노자 자신도 자유롭게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이 결코 그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초청했던 독일의 선제후(選帝侯) 칼 루드비히에게 보낸 거절 편지는 스피노자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먼저, 제가 청년들의 교수에 전념하고자 한다면 저의 철학 성취를 중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공인된 종교를 혼란시키지 않기 위해서 철학하는 자유의 어떤 한계를 제한하여야 할지 말씀드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중략) 각하, 저는 좀 더 나은 행복에 대한 희망 때문이 아닌, 평화에 대한 사랑을 위해 주저하고 있음을 헤아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제가 공적인 강의와 멀어지기만 하면,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한집> 48, 1673년 3월 30일)  


스피노자는 평생 셋방살이를 하며 매우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며 학문을 연구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생활하기에 넉넉한 돈을 정기적으로 보내주었지만, 그 대부분은 책을 사는 등 연구비로 들어갔고, 그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운둔하며 사는 신비가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그가 쓰는 글들은 암스테르담의 친구들에게 보내져 낭독되곤 하였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스피노자의 편지들은 그가 결코 고독하지 않았으며, 당대의 상황과 학문적 대화에 성실하게 참가했음을 보여준다.


(3) 야생적 별종

1660년대 후반 칼뱅파와 오란녜파에 의한 소요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공화주의와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위협받게 되자,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집필을 중단하고 <신학정치론>을 쓰게 된다. 이 책과 또 그의 마지막 저작인 <정치론>에서 나타난 스피노자의 사상은 당대의 어떤 종교사상과도, 또 어떤 정치사상과도 다른 별종적인 사상이었다.3) 그는 칼뱅주의의 예정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유의지설 모두를 비판했다. 양자 모두는 구원에서 어떤 기적을 발견하는 신학이었으며, 결국 하느님을 인간적 군주로 상상하는 이론이었다. 그는 이러한 군주적 표상에 입각한 신학[미신]이 주권적 신학체제와 신학적 주권체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이론이라고 보았다. 그 대신 그가 제시한 것은 어떤 초월도 없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 사상을 통해 그는 다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전면적인 자유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당대의 사회계약론과도 달리 각 개인의 자연적 능력과 권리(자연권)는 어떤 계약 상황 속에서도 포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다중의 정념을 다스릴 수 있는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국가 주권[계약]의 필요성을 논하면서도, 그러한 주권을 넘어서는 다중의 능력에 입각한 절대적 민주주의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반(反)주권, 반(反)신학의 사상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스피노자는 평생 칼뱅주의자들의 선동 아래에서 “예속을 욕망하던”4) 대중에 의해 시달렸음에도, “다중”을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발리바르의 표현처럼 스피노자에게 진정한 “자유의 당파”는 정무관파가 아니라 다중의 능력에 기초하여 형성되어야 할 것이었다.5)6)

이어지는 논의에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완숙기의 세 저작 - <윤리학>, <신학정치론>, <정치론> - 을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정치사상을 그의 “다중” 개념과 관련하여 고찰해볼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그러한 정치사상의 근거가 되었던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먼저 고찰해보려 한다.  


1) 추영현. 앞의 글, 432쪽


2) 추영현. 앞의 글, 444-446


3) “야생적 별종”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스피노자에게 붙인 별명이다.


4) TTP 서문


5) 당시 네덜란드의 정무관파는 자신들을 “자유의 당파”로 지칭하며 권위주의적인 오란녜 파와 대립했다.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19쪽, 45쪽 참조 


6)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스피노자는 오란녜파[칼뱅파]의 “권위주의적 복지국가”와 정무관파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자율주의적 꼬뮨주의” 사상을 전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