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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민중신학, 스피노자를 만나다

II-1. 존재의 일의성: 신은 어떤 존재인가?

(1) 신을 사랑한 무신론자

스피노자를 사랑한 슐라이어마허

스피노자는 당대에 이미 ‘무신론자’, ‘유물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또 한편 그는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 F. 노발리스에 의해 “신에 취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스피노자의 진정한 모습은 이러한 상반된 두 평가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 개념을 거부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신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사상가였다.1)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자신이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한 논고(<신학정치론>)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 성서를 고려하는 방식에 관한 논고를 쓰고 있습니다. 그 논고를 기획한 동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신학자들의 편견들. 실제로 제 생각으로는 바로 이 편견들이 사람들이 철학에 정진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편견들을 폭로하고, 그것들 때문에 사람들의 성찰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 저를 무신론자로 계속해서 비난하고 있는 대중이 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 저는 최선을 다해서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철학의 자유와 우리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자유. 나는 이러한 자유를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확립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의 과도한 권위와 경솔한 열정은 이러한 자유를 없애려고 하고 있습니다. (<서한집> 30, 1665년 가을)



 

즉 스피노자는 분명히 당대의 주류적인 유신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또 가차 없는 비판을 행함으로써 성직자들과 대중에 의해 ‘무신론자’, ‘유물론자’로 공격받았지만, 그 스스로는 결코 신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유로운 탐구를 통하여 신을 제대로 알고 사랑하는 것을 인간의 지복으로 생각했다.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스피노자를 오히려 “충만한 종교”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여러분, 나와 함께 경건히, 성스럽게 추방당한 스피노자의 영혼에 양털의 공물을 마치자! 저 높은 세계정신이 그를 감화시켰으며 무한자가 곧 그의 시작과 끝이었고, 우주는 그의 하나뿐인 사랑이었다. 그는 성스러운 무흠함과 깊은 겸손으로 자신을 영원의 세계 속에서 비추어 보았으며, 그 또한 이 영원한 세계의 가장 사랑스러운 거울이었음을 주목해 보았다. 그는 충만한 종교였으며, 그것도 충만한 성령의 종교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가 이르지 못하는 곳에 홀로 서 있다.2)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자 한 신은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그 신은 세계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을까? 아래의 소절에서 우리는 고전적인 신학의 신 개념과 스피노자의 신 개념을 비교하여 볼 것이다.


(2) 긍정신학, 부정신학, 표현의 신학

스피노자는 흔히 ‘범신론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그의 신론이 슐라이어마허 등의 독일 낭만주의 철학과 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3) 하지만 스피노자 이전의 신학과 그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찰된 바가 없다. 스피노자는 곳곳에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용어들(자기원인, 실체, 속성, 양태, 능산적 자연, 소산적 자연, …)을 참조하여, 스콜라 신학은 물론 당대의 개신교도들 역시 의존하고 있는 초월적 신 개념을 내재적 신 개념으로 혁신하고 있다.

특히 이 지점에 주목한 주석가로는 질 들뢰즈를 들 수 있다.4) 그는 스피노자가 중세의 ‘긍정신학’(유비신학)과 ‘부정신학’5) 모두를 넘어선 “표현의 신학”을 전개했다고 주장한다. 표현 개념은 <윤리학> 1부의 정의 6에서 신을 정의할 때 등장한다. “내가 말하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다시 말해 그 각각이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의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히 많은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이다.”(강조는 필자) 들뢰즈에 따르면 이 “표현” 개념은 스피노자의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표현은 “감쌈”과 “펼침”을 나타내는 말로서, 신 곧 실체는 “표현”됨으로써 속성과 양태들로 자신을 펼치고 전개함과 동시에 그것을 감싸고 함축한다.6)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이 표현개념을 통하여 부정 신학과 긍정 신학의 신 개념 모두를 넘어선다고 주장한다.  

부정 신학들은 일반적으로 신이 세계의 원인이라는 것을 긍정하지만 세계의 본질이 신의 본질이라는 것은 부인한다. 즉 세계는 신의 표현(창조)이지만 신의 본질은 언제나 표현의 본질을 능가하고 초월한다.7) 실체 혹은 본질로서의 신은 가장 먼 이름(속성)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이름들까지 차례로 부정되는 초월성의 규칙에 따라 부정적으로만(“신은 ~이 아니다”)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긍정들은 부정들로 지양되고, 긍정들과 부정들은 베일에 쌓인 탁월성으로 지양된다.8) 따라서 부정신학의 신은 어떤 본질적 유보를 둔 채 표현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긍정신학들은 신을 원인이자 세계의 본질이라고 긍정한다. 이들은 유비(類比)에 기대어 신과 세계의 연속성을 파악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에서 신에게 귀속된 속성들은 신과 세계의 피조물들 사이의 유비적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피조물들 속에서 “선(善)”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신 안에 선재하는 속성이다.9) 신은 ‘최고선’을, 피조물들은 그에 못 미치는 ‘선’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 역시 피조물과 신의 연관을 말하면서도, 둘 사이의 간극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은 모두 존재의 양의성equivocity(신과 세계의 구분) 위에 세워져 있다.

문제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항상 어떤 권위 - 성서의 권위든, 사제의 권위든 - 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부정신학이든, 긍정신학이든 선이나 악,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이미 어떻게든 전제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나름의 위계에 따라(신학자와 교회의 견해에 따라) 질서 지어져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을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선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일로 보이며, 어떤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추한 것으로 보이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아주 자주 벌어지는 일들이다.10) 스피노자는 선, 아름다움, 질서, 전능 등의 개념들은 그저 인간이 자기에게 유용한 것을 부르는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이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했다고 말함으로써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표상을 신에게 귀속시킨다.11) 이런 상상에서 미신이 발생하며, 이 미신을 통해 성직자들과 그들과 결탁한 권력자들은 대중을 지배하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관점에 선다면 긍정신학과 부정신학 모두가 동등하게 잘못된 것들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신의 ‘고유성’과 ‘속성’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소론』에서 보통 신의 속성이라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신에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을 정의하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상상의 산물인 ‘고유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보통 신에게 돌려지는 ‘속성들’을 논의해 볼 생각인데, 이는 사실은 신에게 속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이것들을 통해 신을 정의하려고 무익한 노력을 기울인다. (<소론> 1부 7장 1절)


첫째, 우리는 그들이 여기서 우리에게 그것들을 통해 실재(신)가 무엇인지 알려지는 어떤 속성들을 제시해주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고유성들, 곧 어떤 실재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결코 설명해주지 않는 것들만을 제시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실존한다는 것, 만물의 원인이라는 것, 최고선, 영원성, 부동성 등은 신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말해지기는 하지만, 이러한 고유성들로서는 우리는 이것들이 속하는 존재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소론> 1부 7장 6절)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신에게 귀속시키지만 속성도, 고유성도 아닌 것들이 있음을 말한다. “전지성, 긍휼함, 현명함 […] 이것들은 단지 사유하는 실재의 특정한 양태들이기 때문에…”12) 즉 우리가 신에게 돌리는 거의 대부분의 ‘속성’들은 사실은 신에 대해서 어떤 것도 참되게 말해주지 않는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표현신학’은 신을 어떻게 말하는가?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이 모두 존재의 양의성 위에 세워져 있다면, 스피노자는 ‘존재의 일의성univocity’을 제시한다. 신은 기호들(이름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도, 고유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신은 그의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며13), 속성들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양태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14) 즉 속성들(표현들)을 통해 실체(신, 표현하는 것)는 양태들(피조물, 표현되는 것)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내재한다. 신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표현되어지며, 어떤 것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 스피노자의 신은 아무런 유보 없이, 세계 속에 완전히 표현된다.15) 우리가 보기에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세계의 모든 것들은 곧 신의 표현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보면 세계 속에 선, 악, 아름다움, 추함, 죄, 의 등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일의성의 존재론을 순수 긍정의 철학이라고 말한다.16) 모든 것은 존재하고 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신의 표현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사상을 이 존재의 긍정성 위에 세우고 있는 것이다.


(3) 실체(신), 속성, 양태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속성’은 무엇일까? 영원성, 최고선, 전지전능, 아름다움, 자비로움, 은혜, 예지 등이 신에 대해서 어떤 것도 참되게 말해주지 않는 것들이라면 신의 속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스피노자가 의인화된 신을 거부했다는 것을 앞에서 이미 밝혔다. 그는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신 개념은 그들이 주장하는 ‘신의 전능성’과 사실상 충돌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의 권능을 그의 자유의지에서 찾는다. 그들의 말을 따르면 신은 “자신의 본성을 따르며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사물들”(피조물들)을 그 자신의 의지에 의해 생기지 않게도 할 수 있는 존재다. 말하자면, 신은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세 각의 합은 2직각(180゚)과 같다는 것이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렇다면 신은 무한히 많은 창조 가능한 것들을 인식함에도, 결코 그것을 창조할 수는 없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것이 되며,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신의 권능’은 ‘신의 무능력’과 동의어가 되어버리고 만다고 주장한다.17) 또한 스피노자는 신의 자유의지 자체가 신의 무능력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이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필연적으로 욕구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8)

따라서 스피노자는 신의 완전함을 다른 방식으로 논증한다. 신의 완전함이란 “신의 최고 능력 또는 무한한 본성에서부터 무한히 많은 것이 무한히 많은 방법으로, 즉 일체의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생겨나온다는 것”이다. 즉 삼각형의 본성 그 자체에서 그 내각의 합이 180゚라는 것이 영원으로부터 영원히 귀결되듯이, 신의 전능은 영원에서부터 항상 현실적으로 존재하며(잠재적인 것이 아니며), 영원히 동일한 현실성에 머무른다.19) 신의 능력은 그의 본질 자체이므로, 신의 능력 안에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존재하며 현행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즉 신으로부터 생산(표현)되는 자연은 ‘신의 관점’에서는 언제나 완전하다.20)

신의 속성이란, 바로 신이 그렇게 무한히 많은 것들을 생산하며 실존하는 “무한히 많은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21) 따라서 그것은 자비로움, 질투, 자유의지와 같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객관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신의 ‘지성’을 예로 들어보자. 초월적 유신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의 ‘지성’과 ‘의지’가 분리되어 있다. 신은 그가 아는 것(지성)을 창조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의지)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서 신의 지성은 곧 신의 의지와 같다. 신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펼치며 생산한다. 이것이 신의 ‘사유 속성’이다.22)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관념, 사상, 영혼, 정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이 사유 속성의 변용 affectio23)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신에게는 ‘연장 속성’이 속한다. 이것은 신이 공간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으며, 모든 물체들은 이 연장 속성의 변용이라 할 수 있다.24) 실체의 정의상 속성은 무한히 많지만, 스피노자는 우리의 삶과 관련하여 연장과 사유 속성만을 주 고찰대상으로 하여 <윤리학> 전체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속성에 의해 변용된 모든 관념과 물체들을 스피노자는 ‘양태modus’라고 부른다.25)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 세계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같은 세계(자연)가 생산하는 자연(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생산되는 자연(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으로 구분하여 고찰될 뿐이다. 생산하는 자연은 “그 자체 안에 존재하며 그 자신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 혹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실체의 속성 곧 자유로운 원인으로 고찰되는 신”이며, 생산되는 자연은 “신의 본성, 혹은 신의 각 속성의 필연성에서 생기는 모든 것, 즉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는 그러한 것으로 고찰되는 신의 속성의 모든 양태”이다.26)


(4) 자기원인

스피노자는 이러한 ‘생산하는 자연’으로서의 신(실체)을 자기를 원인으로 하는 존재로 제시한다. 그리고 “자기원인이란, 그 본질이 실존을 포함하는 것, 또는 그 본성이 실존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이해한다.”27) 그런데 이 자기원인causa sui 개념은 철학사에서 매우 논쟁적인 개념으로서, 이 개념을 자칫 잘못 이해할 경우 또다시 스피노자의 신(실체)를 ‘생산된 자연’에 대하여 ‘외부적인 원인’으로서의 상상하게 될 위험이 있다.

자기원인 개념은 플로티누스에게서 기인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가 주로 참고하면서 넘어서려고 했던 것은 데카르트의 자기원인 개념이었다.28) 데카르트의 ‘자기원인’ 개념은 실존하는 모든 것은 그 작용인(作用因)이 있다는 점에서 요청된 것이었다. 즉, 어떤 것도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없다면, 원인을 끝없이 찾아 들어가는 무한 소급에 빠지게 되며, 따라서 무한 소급을 멈추기 위해 ‘최초의 원인’, 즉 원인 없는 원인인 자기원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자기원인을 곧 만물의 선행적 원인인 초월적인 신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다.29) 그에게 신은 곧 모순율이나 수학의 법칙 같은 영원진리들을 자유롭게 창조하고, 또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창조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이며, 이러한 자유롭고 무차별적인 결정의 능력으로 정의되는 자기원인이다.

반면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은 데카르트와 완전히 반대의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스피노자는 신의 능력과 신의 본질을 동일시한다.30) 또한 능력은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현실적으로 생산된다.31) 또한 신은 만물의 외부적이거나 타동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내재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에서 ‘원인’은 데카르트에게서처럼 작용인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신의 본질로서의 능력[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은 실체가 외부의 초월적 원인에 의존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힘에 따라 실존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자기원인 개념은 자연이 어떠한 초월도 없이 스스로를 생산하고 실존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헤겔

그러나 이렇게 이해된 자기원인 개념은 여전히 실체를 하나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같은 자기모순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될 위험이 있다. 실제로 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하나의 독단론(獨斷論)으로 비판한 바 있다.32) 진태원은 이러한 오해는 자기원인에서 ‘자기sui’를 주어/주체로 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 말한다. 즉 내재적 인과관계를 통해 원인과 결과 사이의 외재적 ․ 초월적 관계는 넘어섰지만, 여전히 자기원인 개념을 궁극적 정초, 자기 정초의 문제로 이해함으로써 초월성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33) 그러나 자기원인 개념은 이러한 정초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진태원은 이 개념이 “어떤 실재의 근거정초적인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있음)이라는 사태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자기원인 개념의 독특성은 스피노자의 존재/비존재 이해를 라이프니츠의 그것과 비교할 때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1의 신존재증명 과정에서 “모든 사물은, 그것이 실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원인 또는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 […] 그것의 실존을 방해하는 아무런 이유와 원인이 없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존하게 된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자연과 은총의 원리>의 7절에서 이렇게 묻는다.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이 두 사람은 존재에 대해서 정반대의 지점에서 출발한다. 스피노자는 ‘있음’에서 출발하고, 라이프니츠는 ‘없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진태원은 라이프니츠의 원리와 대비할 때 스피노자의 논의의 고유성은 ‘무’(없음)와 ‘실존’(있음)이 동등한 두 개의 항이 아니라 무를 이미 실존의 한 양태로 포섭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즉 무는 어떠한 실정성을 지닌 사태가 아니며, 인과성의 원리는 항상 이미 일어난 ‘있음’이라는 사태 이후에나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자기원인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무’라는 가설을 따로 두지 않는 ‘있음’만의 실정성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존한다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그저 실존하는 것”이며, 실체의 본질은 실존이다.34)

따라서 스피노자의 세계는 이제 신과 자연의 어떠한 분리도 허락하지 않는, 어떠한 신과 자연 간의 주객 도식도 없는, 창조와 종말, 혹은 어떤 목적도 없이 오직 수많은 양태들이 서로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수많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표현되는 ‘있음’의 세계로 나타난다.35) 이제 이러한 양태들이 빚어내는 세계의 모습을 ‘관개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볼 때이다._김강기명


1)  E V 정리36주석, “이상에서 우리의 행복이나 지복(至福) 또는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는 명료하게 이해한다. 즉 그것은 신에 대한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 또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에 있다.”


2)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 <종교론>, 최신한 옮김(서울: 한들, 1997), 60쪽, 강조는 필자


3)  슐라이어마허와 스피노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휴즈 로스 메킨토시, <현대신학의 선구자들>, 김재준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김승철, <역사적 슐라이에르마허 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목창균,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를, 낭만주의 철학과 관념론 철학의 스피노자 수용에 관한 연구로는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진태원 옮김(서울: 이제이북스, 2004), Jean-Marie Vaysse, “Totalité et subjectivité”, <Spinoza dans l'idealisme allemand>virin, 1994)  참조


4)  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진경 ․ 권순모 옮김(서울: 인간사랑, 2003)


5)  긍정 신학과 부정 신학은 신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길, 또는 방법의 논리들이다. 이 둘의 구별은 위(僞)-디오니시우스에 의해 발전되어 중세 기독교 철학과 신학에 전해지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집대성된다. 긍정의 길은 피조물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완전성들, 즉 신의 영적인 본성과 양립가능한 완전성들을 신에게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이 긍정의 길을 따라서 선, 생명, 지혜, 능력과 같은 이름들이 어떻게 초월적인 방식으로 신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또 어떻게 그것들이 신으로부터의; 파생에 의해서만, 신 안에 발견되는 질들의 다양한 분유(分有) 정도에 의해서만 피조물들에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준다. 부정의 길은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예컨대 술취함이나 격노 등을 신에 대해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초-본질적 암흑”에 이를 때까지 피조물들의 속성들과 질들을 신에 대해 부정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F.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박영도 옮김(서울: 서광사, 1988), 132-135 참조


6) 질 들뢰즈, 앞의 책, 24쪽


7) 마이클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김상운 양창렬 옮김(서울: 갈무리, 2004), 192쪽


8) 질 들뢰즈, 앞의 책, 74-75쪽


9) 질 들뢰즈, 앞의 책, 76쪽


10) E I 부록


11) E I 부록


12) KV I 7장7절


13) E I 정의6,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한다.”


14) 질 들뢰즈, 앞의 책, 83쪽


15) 마이클 하트, 앞의 책, 193-194쪽


16) 질 들뢰즈, 앞의 책, 91쪽


17) E I 정리17주석


18) E I 부록


19) E I 정리17주석


20) E I 부록, “만일 모든 것이 신의 최고 완전한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겨났다면, 자연의 많은 불완전성 - 부패, 추악함, 혼란, 죄악 등 - 은 대체 어디서 생겨났단 말인가? 그것이 그들의 반론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그들에게 반박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완전성은, 그것의 본성과 능력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이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하든 괴롭게 하든 또 인간의 본성에 접합하든 부적합하든 그 완전성이 증감되지는 않는다.”


21) E I 정의4, “나는 속성을, 지성이 실체에 관하여 그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고 지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22) E II 정리1


23) 변용 affectio이란 어떤 것이 자극되거나 촉발됨으로써 원래의 상태와 다르게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24) E II 정의1, 정리2


25) E I 정의5, “나는 양태를 실체의 변용으로,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에 의하여 생각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양태란 보통 존재의 양식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지만, 스피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신에 의하여 산출되는 유한한 실재들을 의미한다. 실체가 그 자신을 원인으로 존재하고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반하여 양태는 다른 것을 원인으로 하여 존재한다.


26) E I 정리29주석


27) E I 정의1, 강조는 필자


28)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논문, 2006), 45쪽


29) 진태원, 앞의 글, 46쪽


30) E I 정리34, “신의 역량은 신의 본질 자체이다.”


31) 각주 50 참조


32) G.W.F. Hegel, <Werke in Zwanzig Bänden>(Frankfurt: Suhrkamp, 1970), 20권, 168쪽, “사유와 실존의 통일은 곧바로 동시에 정립된다. 영원히 문제가 될 것은 바로 이 통일이다. 자기원인은 중요한 표현이다. 결과는 원인과 대립한다. 자기원인은 결과를 산출하고 타자를 분리시키는 원인이지만, 이것이 밖으로-내놓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밖으로-내놓음에서 자기원인은 또한 차이를 지양한다. 자기를 하나의 타자로 정립하는 것은 퇴락임과 동시에 이 퇴락의 부정이다. 이는 철저하게 사변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원인은 어떤 결과를 산출하며, 결과는 원인과 다른 어떤 것이라고 표상한다. 반대로 여기서는 원인의 외출은 곧바로 지양되며, 자기원인은 자기만을 산출한다. 이는 모든 사변에 근본적인 개념이다. 이는 원인이 결과와 동일한 무한한 원인이다. 만약 스피노자가 자기원인 안에 포함된 것을 좀더 정확하게 발전시켰다면, 그의 실체는 부동적인 것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진태원, 앞의 글, 37쪽에서 재인용


33) 진태원, 앞의 글, 55쪽


34) E I 정리7


35) 목적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에 대해서는 E I 부록과 E IV 서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