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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민중신학, 스피노자를 만나다

III. 다중의 무능력의 전개

III장과 IV장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사상을 다루어볼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윤리학, 정치론 세 권에서 어떻게 다중이 무능력의 상태에 빠져서 폭정과 미신을 옹호하고,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지를 서술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이 어떻게 공통개념의 형성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특히 우리가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 핵심적으로 고찰할 개념은 ‘다중multitudo’ 개념이다. 이 개념은 스피노자에게 이중적으로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스피노자는 17세기 정치철학과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전통에 서서 다중을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파악한다. 다중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치사상에서는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시민이 아닌 정념에 사로잡힌 우중volgus의 무리로 그려진다.1) 17세기 당시, 홉스는 이러한 고전적 개념을 이어받아 다중을 정치적 주체인 ‘인민people’과 대비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다중은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도 없으면서 불법적인 소요와 폭력으로 정치적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홉스는 이러한 다중을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하고, 이들이 계약을 통해 하나의 정치체를 구성하도록 함으로써 다중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서 그리고 있는 다중의 모습 역시 홉스와 거의 유사하다. 그는 다중을 우중과 다르지 않은 존재, 즉 예속을 욕망하며 정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제어할 효과적인 지배가 필요한 존재로 보았다.2)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인 <정치론>에 오면 사태가 바뀐다. 우선 <신학정치론>에서 단 여섯 번 사용되었던 다중 개념이 <정치론>에서는 매우 빈번히 등장하며, 스피노자 정치철학의 핵심개념으로 나타난다. 다중은 여전히 직접적인 자기 통치를 하지 못하며 제도적인 매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또 한편 스피노자는 그러한 정치적 매개를 뚫고 합력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로서 다중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양가적인,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혁의 주체로 그려지는 다중의 개념은 민중신학의 ‘민중’을 사유함에 있어서 중요한 참고점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학>, <신학정치론>, <정치론> 세 권의 내용을 다중의 ‘무능력의 전개’와 ‘능력의 전개’라는 관점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I장에서는 먼저 다중의 무능력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고찰해볼 것이다. <윤리학>을 통해서는 어떻게 다중이 부적합한 인식에 빠지는지, 어떻게 수동적인 열정에 따라 무능력한 예속에 빠지는지를 탐구하며, <신학정치론>을 통해서는 그러한 예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적으로 펼쳐지는지를 종교와 정치의 결탁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정치론>을 통해서는 다중의 이러한 예속이 불러오는 내란과 폭정의 끊임없는 악순환을 분석해 볼 것이다._김강기명


1) multitudo는 헬라어의 oklos와 같은 뜻을 나타낸다. 이 표현이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사용될 때는 기본적으로 어떤 ‘무리’에 대한 경멸과 멸시, 혹은 모종의 공포가 담겨 있다.


2) 진태원,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철학사상, 제17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