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체와 정신의 평행론
앞 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개체는 곧 ‘관-개체’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에서 이 개체를 각각 정신과 신체(혹은 관념과 사물)라는 두 질서의 통일체로 정의한다.1)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성립된다. (<윤리학> 2부 정리 13 보충)
이 정신과 신체는 1절에서 살펴보았던 신의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변용이다. 때문에 인간만이 정신과 신체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태들은 정신과 신체로 성립되어 있다. 인간이라고 해서 다른 양태들과 다른 심급에서 - 이를테면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와 같은 - 논의될 수 없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들은 신의 변용이며, 신의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변용인 정신과 신체로 성립되어 있는 양태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정신과 신체를 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실체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의 동일한 개체를 서로 다른 속성을 통해 파악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념의 질서와 관계는 사물의 질서와 관계와 동일하다. (<윤리학> 2부 정리 7)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로, 우리는 이것을 때로는 사유의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의 속성 아래에서 생각한다. (<윤리학> 2부 정리 21 주석)
즉 각 개체는 사유 속성에서 고찰했을 때는 정신이고, 연장 속성에서 고찰했을 때는 신체이다. 그리고 정신이란 하나의 관념이고, 그 개체의 신체는 관념의 대상이다. 신체들 각각은 또한 외부 물체의 변용에 의해 산출되므로, 그러한 신체의 변용에 대해서도 그에 해당하는 관념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앞 장에서 보았듯이 모든 개체는 ‘관-개체’이기 때문에, 신체의 변용들에는 항상 “외부 물체의 본성”과 신체의 본성이 함께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변용의 관념 역시 외부 물체의 본성과 함께 우리 신체의 본성을 함축하게 된다. 또한 인간 신체의 변용이 외부 물체의 본성도 함축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은 매우 많은 물체의 본성 역시 지각하게 된다.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인간 신체의 각각의 방식에 대한 모든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 물체의 본성을 함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학>2부 정리 16)
(2) 부적합한 관념
이 분이 갖고 있는 내 아내에 대한 관념은 내가 갖고 있는 아내에 대한 관념과 같을 수 없다. 왜? 신체가 다르고, 맺고 있는 관계가 다르기에!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의 인식이란 기본적으로 이러한 상상에 기초한 것이라 말한다. 인간은 모든 사물을 본질과 참된 원인에 의해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의 변용에 따라 지각하며 상상한다. 이러한 인식을 스피노자는 타당하지 않으며 혼란스러운 관념, 1종 인식이라고 말한다.4)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사물들을 지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해,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진다. (<윤리학> 2부 정리 29 보충)
윤리학과 신학의 여러 개념들, ‘선’, ‘악’, ‘목적론’,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신’ 등의 이 개념들은 스피노자가 비판하는 1종 인식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어떤 초월적이거나 보편적인 척도에 의해 판단되는 선악의 개념은 한 개체의 신체의 이미지만을 고려한데서 도출되어 나온 부적합한 인식을 마치 보편적인 것인 양 내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선과 악이란 사실은 각 개체가 느끼는 유용함의 표현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5)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도덕적 판단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단 두 가지 사실만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사물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며 동시에 이것을 의식한다는 것”6) 사물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것들을 제 방식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또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든 행동을 어떤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에 맞추어 행동하려 한다.(이것은 코나투스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인간은 외부 물체보다 자기 신체에 대한 개념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외부 물체들을 자신의 신체에 대한 개념에 입각해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모든 사물들이 존재하는 목적에도 적용시킨다. 그리하여 각각의 사물들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심지어 세계 자체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으며 또 그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인간들을 지배한다. “보기 위한 눈, 씹기 위한 이, 영양 공급을 위한 식물과 동물, 비추기 위한 태양, 물고기를 기르기 위한 바다…”7) 선과 악, 질서와 혼란, 아름다움과 추함 등은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서 평가된 것이다. 모든 사물들의 존재 이유를 자기 목적에 끼워 맞추었으므로, 그런 것들이 누군가 인간들을 위해 창조해준 것이라고 믿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의 창조 신화는 바로 이런 식으로 1종 인식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상상 속에서 우리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기에 창조주 역시 인간의 기질과 성품에 맞게 그려졌다. 그리하여 인간처럼 선한 일에 기뻐하고 악한 일에 분노하는 신의 모습이 미신을 통해 퍼져 나간다. 이러한 신에 대항 상상이 등장함으로써 ‘선’과 ‘악’은 신에 의해 정의된 ‘보편적 ․ 초월적 규범’으로 나타나고, 인간 삶의 유용성에 대한 인식보다, 초월적인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II장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신과 양태의 일의성, 양태들 사이의 관개체성에 입각하여 참되게 인식할 때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이란 사유의 양태나 사물을 비교함으로써 우리에게 형성되는 개념일 뿐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 양자와 무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픈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기 때문이다. (������윤리학������ 4부 서문)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매우 쉽게 증명된다. 왜 어떤 종족은 일부일처제를 선하다고 하고, 다른 종족은 일부다처제를 선하다고 하는가? 왜 어떤 이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다른 이들은 못생겼다고 하는가? 이것은 그것들이 객관적인 정신적 실체들이 아니라 관계 속에 놓인 인간 신체의 변용에 따른 인식임을 보여준다.
연장선에서 스피노자는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인간의 정신이 신체와 별도로 존재하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신체를 작용한다고 보았던 것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의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의지가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다고 장담하며 영혼의 안식처 따위를 생각해 내는 사람들은 흔히 조소나 구토를 자아내게 한다. (<윤리학> 2부 정리 35 주석)
사람들은 신체는 오직 정신의 명령을 통해서만 때로 운동하거나 때로 정지하며, 그 활동들 대부분은 정신의 의지와 사고 기술에 의존한다고 아주 굳게 믿고 있어서, 이를 숙고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 따라서 사람들이 신체의 이러저러한 활동은 신체에 대한 지배권을 지니고 있는 정신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며, 자신들의 무지를 허풍 떠는 언어로 고백하는 데 불과하다. […] 이들은 젖먹이는 자유의지로 젖을 욕구한다고 믿으며, 성난 소년은 자유의지로 복수를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의지로 도망친다고 믿는다. 또 술주정뱅이는 […] 자유로운 정신의 결단에 의해 주사를 부린다고 믿는다. (<윤리학> 3부 정리 2 주석)
스피노자가 보기에 그들은 인간이 마치 자연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절대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무능력은 매우 자주 목격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8)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무능력을 자연의 법칙에 비추어 알 능력이 없기에 인간이 가진 어떤 본성9)의 결함, 혹은 ‘죄’에서 그것을 찾게 된다.10)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간 역시 자연의 양태로서 고찰해야 한다고 보았고, 또한 신체의 능력과 정신의 능력이 결코 구분될 수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는 인간의 부적합한 인식이 관계 속에서의 신체의 부적합한 운동에서 생겨났다고 보았으며, 반대로 신체의 부적합한 운동 역시 관계 속에서의 인간의 부적합한 인식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일치한다. […] 경험은 또한 정신의 결단이란 충동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정신의 결단은 신체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각각의 인간은 자신의 정서를 근거로 모든 것을 조절하며, 상반된 정서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욕구하는지를 알지 못하며, 아무런 정서에도 매여 있지 않은 사람은 하찮은 것에 의해서도 쉽사리 이리저리 흔들리기 때문이다. (<윤리학> 3부 정리 2 주석)
이렇듯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정서’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11)
(3) 수동적 변용과 정념
스피노자에게 정서는 신체와 정신을 연결하여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를 각각 독립된 실체로 판단하고 그 둘의 연결을 ‘송과선’이라는 가상의 인간 기관을 통해 모색했다면,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으며, 신체에 대한 가장 1차적인 관념이라 할 수 있는 정서가 그 둘을 연결시킨다고 보았던 것이다.12) 정서는 신체의 활동 능력의 증대나 감소라는 두 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변용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가, 타자에게 있는가에 따라 능동과 수동이라는 두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두 방향과 두 양상이 스피노자의 정서 이론의 근간을 구성한다.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변용의 어떤 충분한 원인일 수 있다면 이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으로 이해한다. (<윤리학> 3부 정의 3)
적합한 원인으로 되어 있는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나 외부에 생길 때 […] 나는 우리가 “작용한다”(능동)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단지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의 내부에 생기거나 우리의 본성에서 생길 때, 나는 우리들이 “작용을 받는다”(수동)고 말한다. (<윤리학> 3부 정의 2)
정서의 이론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인간이 뿌리 깊게 가지고 있는 정신과 신체의 분리라는 관념, 정신의 신체에 대한 지배라는 관념을 뒤집는다. <윤리학>에서 정서는 무엇보다도 신체의 능력과 관련해서 정의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정서들, 우리가 욕망하고, 기뻐하며 슬퍼하는 모든 일들은 일차적으로 신체의 활동 능력과 관계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를 통해 신체의 능력에 저해되는 것에 대한 관념은 정신의 능력, 즉 사유 능력에도 저해되는 것으로 경험된다.13)
스피노자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정서를 제시한다. 우리 신체가 가지고 있는 실존을 지속하려는 노력, 즉 코나투스는 정서의 차원에서는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것이 가장 첫 번째의 정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기에, 코나투스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증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 인간 활동의 능력이 감소하는 방향으로 변용되었을 때 우리의 정신은 그것을 슬픔의 정서로 경험하며, 인간 활동의 능력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변용할 때 우리의 정신은 그것을 기쁨의 정서로 경험한다. 이 세 가지가 스피노자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정서이며, 나머지의 수많은 정서들은 이 세 가지 정서에서 생겨난다.14) 선과 악의 참된 인식은 이러한 기쁨과 슬픔의 정서를 부르는 다른 말에 불과하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기쁨의 정서를 선으로, 우리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슬픔의 정서를 악으로 부름으로써 선과 악이 초월적 척도나 규범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15)
II장에서 설명했듯이 코나투스는 다른 개체와 합하여 존재를 지속하려 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실존하기 위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즉 우리의 활동능력을 증대시켜주는 만남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능동적인 변용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양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외부의 신체가 우리와 합하여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아니면 우리를 파괴하는 존재인지를 미리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한한 개체에게 완전한 능동, 즉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만 작용하는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적 상황에서만 이론적으로 고찰될 뿐(완전히 독립된 자유의지), 현실은 늘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용되고 변용하는 것이 우리가 처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약한 개체일수록 그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운’이다. 능력의 증대와 감소는 내게 다가오는 외부 신체와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때의 변용은 자신을 원인으로 하지 못하고 타자를 원인으로 하는 수동적 변용일 수밖에 없다. “노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행하지만, 자유인은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따르지 않고 그가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다고 아는 것, 그러므로 자기가 가장 욕망하는 것만을 행한다.”16) 이러한 수동적인 변용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부적합한 관념을 갖도록 하며, 따라서 이는 다시금 수동적인 신체의 변용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예속 속으로 빠져들며 자신의 능력을 상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동적인 변용의 정서들, 즉 정념 passion들 때문이다. 우리는 이어지는 절에서 이러한 인간의 무능력이 역사적 ․ 정치적 장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검토해볼 것이다.
1) 이러한 이해는 통상 “심신평행론”으로 불린다.
2) “Sequitur secundo quod ideæ quas corporum externorum habemus, magis nostri corporis constitutionem quam corporum externorum naturam indicant; quod in appendice partis primæ multis exemplis explicui.”
3) E II정리17보충의 증명
4) 스피노자가 타당한 인식, 적합한 인식이라고 부르는 2종 인식과 3종 인식에 대해서는 IV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5) E IV정의1,2
6) E I 부록
7) E I 부록
8) 로마서 3장 10절
9) 더 정확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 즉 내재적으로 고찰된 본성이 아니라 초월적으로 부과된 본성을 말한다.
10) 우리는 이러한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을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죄인’을 인간 보편의 정체성으로서가 아니라 체제가 민중을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것과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11) 이러한 스피노자의 연구는 인간의 삶의 모습, 특히 정치적 행동의 근거를 어떤 독립적 “주체”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20세기 후반 일단의 (탈)구조주의 철학과 좌파 정치철학에 의한 “스피노자 르네상스”는 이런 점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들은 서구 근대철학에 지배적이었던 “인식과 행위의 기초 내지는 기준으로서의 주체” 대신 구조 안에서 구성된 주체라는 관점을 내세웠다. 이러한 입장을 따를 때 인간 해방의 정치는 어떤 독립된 주체가 억압에 대해 저항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민중신학의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을 탈주체론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한 참고점을 준다. 민중신학도 서구 근대 학문의 “주-객 도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주체 민중”은 결코 그러한 주-객 도식에 입각한 ‘주체’일 수 없다. 우리는 이점을 V장에서 다루어 볼 것이다.
12) 스피노자의 정서 이론을 현대의 신경과학의 입장에서 분석한 글로는 안토니오 다마지오,<스피노자의 뇌>, 임지원 옮김(서울: 사이언스북스, 2007) 참조
13) E II정리11
14) E III정리11주석, <윤리학>의 3부는 이러한 세 가지의 기본 정서와 능동/수동의 변용이 만들어내는 각종 정념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우리는 이것을 상세하게 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다.
15) E IV정리8
16) E IV정리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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