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범신론을 넘어
20세기 초반까지, 스피노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그를 ‘대륙 합리론’철학의 하나로, 특히 ‘범신론’적인 일원론을 통해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극복한 사상가로 평가했다. 이러한 스피노자 해석은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를 지나며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범신론적 해석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려 한다. 범신론적 해석은 실체와 양태 사이의 위계를 재도입하여 양태들의 실재성과 능력을 폄하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철학에 내장되어 있는 혁명적 가능성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1942~ ): 이 부분은 이 양반의 논문 덕에.... 뭐 석사논문이 다 그렇지.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스피노자의 존재론에는 이러한 위계가 없다. 실체가 자신을 표현하고 생산하는 것은, 자연의 수많은 양태들이 서로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수많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변용하(되)는 것과 결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된 자연’은 단지 구분하여 고찰될 뿐인, 동일한 사태를 일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신을 만물의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라고 말한다.3) 즉 ‘실체’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실체 자신의 충만함이나 유일성이 아니라 실체로 표현되는 자연 이외의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즉 자연이 내재적인 실존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며 초월적인 근거나 목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연의 양태들은 결코 어떤 실재성 없이 전체에 복속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며 관계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양태의 이론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2) 관개체성의 존재론
<윤리학> 1부 정리 26과 정리 28에서 우리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두 명제를 만나게 된다.
정리 26. 어떤 작용을 하도록 결정된 것은, 신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하게끔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을 작용하게끔 결정할 수 없다.
정리 28. 모든 개체, 곧 유한하고 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것은, 역시 유한하고 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용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용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용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정리 26은 신이 모든 것들을 작용하도록 하는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정리 28은 반대로 모든 유한한 개체가 다른 유한한 개체에 의해 작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서로 부딪히고 있는 이 명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방법을 상상할 수 있다.
하나는 정리 28과 정리 26을 각각 다른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신과 양태 사이의 ‘내재적 인과관계’와 양태들 사이의 ‘초월적[타동적 ․ 외부적] 인과관계’라는 ‘이중의 인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 후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한한 차원의 원인과 결과의 순차적인 연쇄에 대한 설명이며, 전자는 무한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범신론적 인과에 대한 설명이다.5) 그러나 우리는 ‘내재적 인과’가 그러한 신비적 인과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정리 28을 순차적인 인과관계로 보게 되면 스피노자가 비판하는 목적론적 사유가 돌아오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이 요구된다. 그것은 정리 26과 정리 28이 같은 사태를 다른 방법으로 고찰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로 스피노자 자신이 정리 28의 증명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실존하고 작용하도록 결정된 모든 것]은 신의 어떤 속성이 일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유한한 양태적 변용으로 양태화한 한에서 신 또는 신의 속성에서 생기거나 아니면 실존과 작용으로 결정되어야 한다.”6) 즉 유한한 양태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곧 ‘신의 양태적 변용들’ 사이의 인과관계라고 스피노자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 26과 28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정리 28의 서술이 단지 유한한 개개 양태들끼리의 타동적이고 순차적인 인과관계가 무한히 이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점에 주목한 주석가는 발리바르이다. 그는 정리 28이 선형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독특한 변용 affectio들의 무한한 연관망을, 또는 변용하면서 동시에 변용되는 활동들의 동역학적 통일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7)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관개체성 trans-individuality’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관개체성은 개개의 양태들, 즉 개체들이 일종의 원자처럼 다른 개체들과 독립해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정리 28에서 보여주는 인과관계는 “A의 원인은 B이고, B의 원인은 C이고, C의 원인은 D이고…”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과정이 아니라 “어떤 A의 작업에 대한 B의 변용은 어떤 C들의 활동에 의해 변용되며, C들은 어떤 D들의 활동에 의해 또한 변용되고…”라는 관계적이고 동역학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그림 2.)8)
그림 .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217쪽
: 만물은 이런 식으로 무한히 얽힌채로 변화하며 존재한다.
또한 관개체성은 단지 어떤 개체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넘어 개체 자신도 하나의 관계라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앞선 인용문에서 C와 D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묘사되어 있듯이, 스피노자에게 있어 개체는 어떤 ‘원자’가 아니라 이미 ‘복합체’로서 존재한다.
내가 이해하는 개체는 유한하며 제한된 존재를 갖는다. 만일 많은 개체가 모두 동시에 하나의 결과의 원인이 되게끔 한 활동으로 협동한다면, 나는 그러한 한에서 그 모두를 하나의 개체로 여긴다.(<윤리학> 2부 정의 7)
<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의 「자연학 소론」에 따르면 모든 개체는 각각의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따라 서로 구분되어 관계를 맺으며, 또한 각 개체는 또한 다른 개체들의 공통된 운동과 정치, 빠름과 느림의 리듬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체들은 다른 복합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각자의 부분을 교환하거나, 어떤 부분을 잃거나, 어떤 부분이 덧붙여지거나, 다른 복합체와 합쳐지거나, 그것과 갈등을 겪으며 파괴되거나 하는 등, 다양한 관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하여 무한히 나아간다면, 우리는 자연 전체가 하나의 개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부분들 즉 모든 물체가 전체로서의 개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미치지 않고 무한한 방식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9)
그런데 여기서 “아무런 변화도 미치지 않고”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다시금 전체와 부분의 위계를 도입하고, 또 전체를 불변하는 정태적인 것으로 파악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변화를 미치지 않는다”는 표현을, 부분들의 분리와 보충을 다루는 보조정리 4에서는 “개체는 형태의 변화 없이 이전처럼 자신의 본성을 유지할 것이다.”라고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여기서 ‘형태의 보존’은 ‘본성의 보존’과 같은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형태와 본성의 보존은 부분들의 어떤 변화 없이 정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이 분리되고, 보충되는 것, 즉 다른 개체들 또는 외부 환경과의 교류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형태의 보존이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역학적 과정이며, 어떤 물체가 내장한 특성이나 개별적인 동일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오히려 이러한 변화가 있음으로 해서 개체의 본성이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인간 신체[라는 개체]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매우 많은 수의 다른 물체들을 필요로 하며, 이들 물체에 의하여 계속해서 재생된다.”10)
그런 점에서 개체는 곧 ‘개체화’이다. ‘인간’이라는 한 개체, 특히 그의 신체적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의 몸속에서 끊임없이 세포가 죽고, 다시 태어나지만 우리는 하나의 개체로 실존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 없이는 오히려 우리는 실존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비롯한 자연 안의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지 않으면 결코 실존을 계속할 수 없다. 단지 인간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 관념, 공동체, 국가, 생물, 무생물… 그리고 자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체들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 존재하며, 변용 즉 ‘개체화’ 속에서 개체로서 실존한다.
따라서 자연 전체라는 ‘개체’가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연 안의 개체들의 무수한 변화와 변용을 통해서 그 본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에는 부분과 전체의 어떠한 위계도, 또한 자연 전체나 자연 속의 개체들에 대한 어떠한 정태적인 파악도 없다. 관개체성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의 자연은 끊임없이 마주치며 변용되는 양태들의 관계에 기초한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관개체적인 존재 이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태들의 주체성과 능력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된다. 개체가 관계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유지한다고 하면, 개체 자체는 어떤 주체성이나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관개체성 이론은 관계에 의해 개체가 결정되는 일종의 결정론이 아닌가? 따라서 이제 양태들이 가진 ‘능력’이 고찰되어야 한다.
(3) 개체의 능력: 코나투스
우리는 앞서서 신의 속성을 “신이 무한히 많은 것들을 생산하며 실존하는 무한히 많은 방법”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러한 속성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는 신의 능력을 ‘신의 의지’라는 가상으로부터 분리하여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실존과 생산의 능력으로 제시한다. 실존할 수 없는 것은 무능력 impotentia이고, 반대로 실존할 수 있는 것은 능력 potentia이다.11) 따라서 신의 전능은 그의 실존과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의 마지막 정리들에서는 신의 본질을 ‘능력’으로 정의한다. “신의 능력은 신의 본질 자체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신은 자기 원인, 그리고 만물의 원인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12) 우연이나 임의적인 성격이 모두 배제된 객관적인 실존의 능력, 이것이 곧 신의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 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자연의 양태들이 무한한 방법으로 변용되며 실존한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본질이 신의 능력이라면, 양태의 본질 역시 양태의 능력이 된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특정하고 규정된 방식으로 신의 본성 혹은 본질을 표현한다. 즉 실존하는 모든 것은 모든 사물들의 원인인 신의 능력을 표현한다.”13) 즉 개체의 실존과 생산(변용)은 신의 능력이 표현된 것이다. 물론 신의 능력과 한 개체의 능력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개체의 역량은 신 역량의 부분이다.14) 그러나 이 한 개체 없이 신의 능력을 말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의 만물이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변용을 통해 개체 곧 관-개체들을 생산하는 것이 또한 신의 끊임없는 변용과 같은 것이기에, 특이적인 한 개체의 변용이 곧 신의 변용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특이적인 각 개체들은 관계 속에서 각각 고유의 능력을 가지며 변용하며/되며 실존한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결코 전체주의적 정치학으로 귀결될 수 없다. 과감하게 이야기하자면, 신이 모든 개체들을 근거지우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각 개체들의 끊임없는 변용이 신을 근거지우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개체의 고유한 실존과 변용의 능력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른다. 코나투스는 각각의 개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 하는 노력이며, 이것은 사물의 본질이다.15) 이런 점에서 코나투스는 일차적으로는 관성의 원리와 비슷한 것이다. 이를테면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이 그것을 누군가가 들어 올리거나, 깨뜨리거나 하지 않는 한 테이블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존속하고 있는 그 ‘노력’이 곧 ‘코나투스’이다.16) 이것은 단지 신의 연장 속성의 양태인 물질적인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속성의 양태들, 즉 관념이나 정서 역시 마찬가지로 고유한 코나투스를 갖고 변용하며 실존한다. 그러나 각 개체는 역시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에 어떤 개체가 그것을 파괴하려는 더 힘 센 외부 원인을 만나거나,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게 하는 더 힘 센 원인을 만나면 개체는 다른 모습을 갖거나 파괴된다. 따라서 각 개체가 자신을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개체와 합력하여 복합체, 혹은 공동체를 구성하는constituent 일이 과제가 된다. 즉, 단지 정태적으로 존재하기를 계속하려는 노력이 코나투스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변용해가며 자신의 본성(실존)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코나투스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협력하는 변용, 공통-되기는 단순히 1 더하기 1이 2가 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 개체가 또한 ‘관개체’이기에 구성의 과정은 매우 복합적인 새로운 관계의 창출을 통해 이루어진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통적 관계의 구성을 통한 활동/실존 능력의 증대를 “능동적 변용”으로, 그렇지 못하고 관계 속에서 개체의 힘이 감소되는 것을 “수동적 변용”이라고 말한다.17)
네그리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 “열려 있는 필연성”이라는 역설적인 개념을 도출해낸다. 스피노자의 세계는 능력과 의지를 구분하지 않는 필연성의 세계이지만, 그러나 이 필연성은 또한 “절대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능력과 의지를 분리하는, 즉 “나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이해는 존재와 실존, 행동을 우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러한 우연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상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모든 존재는 독립된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관계와 분리된 채 독립하여 고찰되는 부적합한 인식(원인에 대한 관념을 포함하지 않는 인식) 속에서만 그러한 것으로 상상되는 것일 뿐이다. “의지는 자유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인 원인이다.”(E I 정리32) 그러나 그렇다고 만물이 어떤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것은 내재적인 관계망 속에서 변용하며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필연적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열려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필연성은 어떤 논리적 봉착이나, 미리 구상된 총체성, 규정에 대한 압도적 지배를 행사하는 총체성으로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이런 존재론이 어떠한 ‘매개’를 상정하지 않는 생산적 힘[능력potentia]의 존재론이며, 세계의 구성을 “필연성의 자유로운 구성으로 확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18)
이것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스피노자는 ‘개체에 고유한 역량’과 ‘구성’ 개념을 통하여, 위로부터의 초월적 규범에 의한 권위주의적 국가의 형상이나, 각자가 자신의 자연권을 ‘양도’하는 ‘계약’을 통해 성립하는 자유주의적 국가의 형상을 페기한다. 스피노자 당시의 - 그리고 오늘날에도 ‘보수주의’(혹은 독재)와 ‘자유주의’로서 존속하고 있는 - 이 두 입장은 모두 다중multitude을 각각의 개인privite person으로 분리하고, 또한 각 개인을 그가 가진 자연권, 즉 능력potentia으로부터 분리하는데서 그들의 국가학을 세운다. 따라서 국가와 지배자는 다중에 대하여 외부적이고, 초월적인 매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결국 지배의 이론으로 귀착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있어 다중의 능력은 다중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중이 관계 속에서 실존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지배자가 다중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폭군은 그것에 분노한 다중의 힘의 결집이 폭군의 힘을 능가할 때 그의 권리와 능력을 잃고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는 어떤 가치판단이나 법적 정의, 혹은 계약과 같은 초월적 매개는 없다. 힘과 힘의 부딪힘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서 이상적인 정치체, ‘민주정’은 다중이 능동적으로 협동에 참여하며, 그 참여를 통해 개체들 모두의 능력이 공통적으로 증대하는 국가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네그리 등에 따르면 다중의 협동하는 실천 그 자체가 어떠한 정치체제로 환원되지 않는 비-체제로서의 “절대적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두 장에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존재론으로부터 어떻게 이러한 인간학과 정치학을 구성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_김강기명
1)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의 관계론적 해석”, 12-13쪽
2) 다음의 인용문은 이러한 범신론적 해석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도, 도대체 윤리학이 뜻이 있는 것일까? 당위(Sollen)의 학문은 가능성(Können)을 전제로 삼는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도 자유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필연성과 일치하고 있는 그런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삼각형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존재론에서 인과적인 결정을 존재의 유일한 규정으로 삼고, 목적을 배제해버린 후, 당위의 요구를 지니고 있는 윤리학에서는 <목적>을 다시 끌어들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체계 안에서는 발붙일 곳 없는 자유를 전제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모순이다. 스피노자를 따르자면, 윤리학이란 있을 수 없고, 인간의 정열에 관한 물리학만 있을 뿐이다 […] 모든 것들이 <모든 것의 실체>로부터 기하학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생겨난다면, 우리들이 고쳐야 할 것이 왜 있게 된단 말인가? 질병과 악은 스피노자와 모든 범신론에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로 된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하권>, 강성위 옮김(대구: 이문출판사, 2003[개정2판]), 200쪽
3) E I 정리18
4) 진태원, “옮긴이 해제 -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에 대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서울: 이제이북스, 2005), 279쪽
5) “타동적 인과연쇄의 고리들은 기껏해야 원인들의 집계를 구성하는 반면, 내재적 인과 연쇄의 고리들은 일관된 총체적 체계를 구성한다.” Amihud Gilead, “Spinoza's Two Causal Chains”, 「Kant-Studien 8 1/4」(1999); 진태원, 앞의 글에서 재인용
6) E I 정리28증명
7)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217쪽
8)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217쪽; 이런 식으로 무한하게 이어진다면 우리는 마치 불교 철학, 특히 화엄사상의 “인드라망”의 모습과 흡사한 존재 이해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논증하는 것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9) E II 보조정리7주석
10) E II 요청4, 괄호 안은 필자
11) E I 정리11세번째증명
12) E I 정리34
13) E I 정리36증명, 강조는 필자
14) E IV 정리4증명
15) E III 정리6,7
16) 따라서 이 ‘노력’은 어떤 의지적/의식적 노력이 아니다.
17) E III 정의3,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변용의 어떤 충분한 원인일 수 있다면 이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으로 이해한다.”
18)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이기웅 옮김(서울: 그린비출판사, 2005), 208-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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