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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폭력 비판을 위하여>(1921) 후반부에 대한 한 메모
 
 
발터 벤야민
<폭력 비판을 위하여>가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지점은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서로 얽히고 설켜 구분될 수 없는 지대이다. 바이마르 시대, 의회제의 타락과 보존적 폭력과 정립적 폭력의 복합체인, 즉 그 스스로 법을 제정하고 보존하는 경찰권력의 도래는 목적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도,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도 넘을 수 없는 폭력 그 자체의 논리를 드러낸다. 그것도 가장 ‘민주주의’적인 세계 속에서.
 

비폭력은 철저히 무능력하다. 폭력은 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법이 있는 한 우리는 폭력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오직 법 바깥에 있을 때만 비폭력이 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사적 개인들의 관계에서, ‘진심의 문화’가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고대 로마나 게르만에서는 개인들 사이의 ‘거짓말’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이것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비폭력은 언제나 위태위태한 부패의 위험에 직면해있다. 법은 언제나 이 사적 개인들의 관계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사적 개인들 사이의 거짓말이 낳는 폭력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은 다시 폭력의 질서=법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벤야민은 논의의 주제를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에서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으로 바꾸게 된다. 도대체 이 글러먹은 법의 질서/폭력의 질서는 어디에서 도래했는가? 사실 여기에는 목적이란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립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을 근거 짓는 것은 사실상 ‘신화적 폭력’이다. 신화적 폭력의 이미지는 운명을 거스르려는 자에 대한 신의 분노로 나타난다. 즉 폭력은 수단이 아니라 발현(Manifestation)이다. 신은 피를 본다. 그리고 그 피를 통해 - 죄를 지우며 - 법을 정초한다. 신화적 폭력에서 신은 죄를 지우며, 또한 그 죄를 속죄한다.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모든 법적 폭력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며 법적 폭력의 문제성에 대한 예감을 그것의 역사적 기능의 타락상에 대한 확신으로 만들어준다.” 이것이 곧 모든 정립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이 자리잡은 장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항하는 것, 즉 “이 역사적 기능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신적 폭력’이 나타난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111)
 

이러한 신적 폭력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것은 무엇일까? <폭력 비판을 위하여> 안에 있는 근거들을 탐색해보자면 일차적으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다. 이것은 법정립적 폭력, 즉 입법적이고 제헌적인 폭력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법을 파괴하는, 따라서 국가를 파괴하는 총파업이다. 굳이 벤야민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 하지만 암시하고는 있는 - 예를 들어보자면, 혁명기에 지주나 자본가 계급을 심판하고 몰살함으로써 그 계급에 기반한 국가 전체를 무너뜨리는 폭력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신적 폭력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총파업과 연관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 신적 폭력을 다루는 문맥 속에는 단 한마디도 총파업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벤야민은 어쩌면 ‘신적 폭력’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없는, 즉 폭력이 행사되는 그 순간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폭력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앞서 예로 들었던 폭력은 ‘역사 속에서’ 공산당 일당지배라는 더 잔혹한 국가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결국 벤야민의 서술 속에서 신적 폭력은 여전히 다른 예로 제시될 수 없는 ‘신적 폭력’ 그 자체로 남는다. 신은 내리친다. 그리고 ‘살인하지 못 한다’는 계명까지도 한꺼번에 주어진다. 그리고 “그처럼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 신적인 판단을 사전에 예측할 수도 없으며 판단의 근거도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다.”(115 그러나 여기서 벤야민이 존재론적으로 초월적인 어떤 인격신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신은 이미 신화적 폭력에 대한 비판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은 여기서 ‘살인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되는 ‘생명’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우리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고 있는 듯하다. 벤야민에게 있어 생명은 ‘목숨 그 자체’로 표상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생명은 생명 너머이다. “(‘존재의 행복과 정의보다 […] 존재 자체가 더 상위에 있다는 점을 고백한다’는 문장에 대해) 그 문장이 인간의 비존재는 정의로운 인간이 (반드시:단순히) 아직 존재하지 않음보다 뭔가 더 끔찍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의 단순한 생명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인간 속의 단순한 생명과도, 그리고 인간의 어떤 특정한 상태나 특성과도, 심지어 인간의 신체적 존재의 유일무이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116) 인간의 생명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의 생명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 혹은 동식물조차도 ‘목숨’을 넘어서 성스러워지는 것, 그것은 생명 너머의 어떤 생명이다. 내 생각에는 여기에는 어떤 명시되지 않은 참고문헌이, 즉 니체의 <선악의 저편>, 혹은 <권력의지>가 있는 듯하다. 생명을 넘어선 생명, 그것은 권력의지가 아닌가. 신적 폭력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그것이 단지 목숨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적 폭력은 목숨을 끊어놓는 내리침의 사건 속에서 ‘생명’ 전체를 사하며 살린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의 구원’인 것이다.
 

벤야민은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115) 그러나 벤야민은 그 역사의 결말에 도래할 어떤 것을, 말하자면 ‘국가 없는 사회’의 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살짝 보여주었고, 뒤를 이은 수많은 좌파들이 아주 분명하게 제시했던 것과 반대로. 결국 벤야민은 어떤 실정적인 것으로 이 신적 폭력이 말해지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그것의 퇴락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 “특정한 경우에 순수한 폭력이 언제 실제적으로 있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가능하지도 않고, 똑같이 시급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비할 바 없이 큰 영향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신적인 폭력이 아니라 오로지 신화적인 폭력만이 그 자체로서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폭력이 인간에게 주는 면죄하는 힘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여기에서 전태일과 광주라는 ‘기억’을 다루어보는 것은 어떨까.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에 불을 붙였을 때, 그것은 1970년대 전체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광주도청의 마지막 총성이 울렸을 때 그 역시 80년대의 모든 ‘생명’을 구원하는 폭력이 그곳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물론 이 폭력은 총파업에 다다르지 못한 폭력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규모의 차원에서, 또 승리/패배의 차원에서 신적 폭력을 다루는 것은 벤야민 스스로가 경계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신적 폭력을 통한 구원은 실정적인 방식으로 - 이런 점에서라면 ‘제헌권력’을 말하는 입장과 ‘사회주의 건설’을 말하는 입장은 같은 지반을 공유하고 있다. - 말해질 수 없지만, 분명히 역사 속에 존재했던/할 어떤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것은 반복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촛불이 87의 반복이 아니고, 90년대, 2천년대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이 ‘역사’를 구원하지 못한 것처럼. 아, 그러나 역사의 구원을 바라는 모든 좌파는 찾을 수 없는 이것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떠맡고 있는 것이다._김강기명(비평루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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