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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19장

빌립보서 2장

 

39 유월절에는, 내가 너희들에게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관례가 있다. 그러니 유대인의 왕을 놓아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40 그들은 다시 큰소리로 "그 사람은 안 됩니다. 바라바를 놓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바라바는 강도였다.

 

1 그 때에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으로 쳤다. 2 병사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뒤에, 3 예수 앞으로 나와서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소리 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 4 그 때에 빌라도가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유대인들에게 말하였다. "보라, 내가 그 자를 너희 앞에 데려오겠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 나는 너희들이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5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신 채로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보라, 바로 이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

 

6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이 예수를 보고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이 자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으니" 하고 말하였다. 7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8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9 다시 공관 안으로 들어가서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래서 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냐? 내게는 너를 놓아 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형에 처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나를 해할 아무런 권한도 네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사람의 죄는 더 크다." 12 이 말을 듣고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놓아 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하고 외쳤다. 13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14 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들의 왕이다" 하고 말하니, 15 그들은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인가?"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의 왕은 가이사뿐입니다."

 

16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17 그들은 예수를 넘겨받았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 ‘대속’,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죄를 지었다면 속죄해야 해, 큰 죄는 크게, 작은 죄는 작게 속죄해야 해”
-영화 <친절한 금자씨> 中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
-영화 <밀양> 中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룬 속죄제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 이해를 신학에서는 흔히 대속론(=대리적 속죄론)적 이해라고 부릅니다. 복음주의 기독교로 지칭되는 대중적 신앙운동이야말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이 대속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선전하는 대표적인 집단 혹은 경향일 것입니다. 우리 한숨결교회 가족들 역시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러한 관점으로 예수를 알았고, 또 그런 예수상에 적잖이 감동받았던 경험들이 다들 있을 줄로 압니다.

암튼 일반적인 기독교의 신앙체계에서 예수의 대리적인 속죄의 죽음은 하느님이 미리 계획한 것으로서, 예수 삶의 목적 그 자체로 간주됩니다. 예수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죽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는 오로지 이 땅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므로, 그의 생애에서 구원사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단지 ‘죽음’, 즉 십자가 사건 뿐이며 나머지 그의 행적과 말씀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신학의 그리스도론은 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거의 절대적인 신학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반대로 이러한 예수 이해에 의문을 제기하며, ‘과연 예수에게서는 죽음 이외에 아무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근대를 거치면서 기독교 안팎으로 대속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근대 계몽주의의 영향과 더불어 인간의 주체성과 도덕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기독교의 구원론은 인간의 참된 인간성, 그 본래적 실존에 관한 문제와의 관련 속에서 토론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신교 정통주의신학의 핵심이 되는 대속론은 일차적인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철학의 기초를 놓은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죄란 주체적 인격의 문제와 결부되기에 타인에게 양도될 수 없다는 것을 천명합니다. 칸트적 도덕의 본질은 자신의 오류를 타인에게 전가하고, 또 그로부터 변상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덕의 현안 속에 대속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죄는 당연한 것이지만, 대리적 속죄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속죄는 고대인들의 인과응보의 논리 아닌가, 그러한 논리가 과연 적절한 것인가?”, “속죄의 방식이 왜 하필 대리적 속죄여야 하는 것인가?”, “성서가 말하는 죄가 과연 우리 시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시대에서 죄란 무엇인가부터 다시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등등의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예컨대, 박찬욱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나 이창동의 <밀양>이 바로 이러한 속죄, 즉 대리적 속죄론이 과연 구원론이 될 수 있는가를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문제 제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신학계 내부에서는 대속론적 이해가 맹목적인 신앙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그리스도론, 왜곡된 하느님 표상의 근원적 출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 같은 이는 대속론을 초자연주의적인 마술적 속죄론이라 비판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죄란 하느님에 대한 의식의 결핍이었습니다. 따라서 속죄란 하느님 의식의 온전한 출현이 됩니다. 결국 인간의 구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외려 그의 전생애를 통해 드러난 바 하느님 의식으로 충만한 그의 인격 전체에 대한 인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이후 수많은 현대신학자들이 슐라이에르마허의 길을 따랐습니다.

대체로 신학계 안팎을 포괄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예수 한 사람의 무죄한 죽음으로 다른 모든 인류가 속죄를 얻는다는 기독교 교리는 거의 (이성을 포기해야만 믿을 수 있는) 사실상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로 간주됩니다. 니체에서부터 불트만까지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기독교에 여전히 적을 두고 있는 온건한 신학자들의 경우엔, 대속론은 버리더라도 예수는 버리지 않으려고 예수의 죽음의 의미에 관해 다양한 대안적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진정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다가, 하느님보다 자기들의 전통 종교와 기득권을 더 사랑하고 인간보다 율법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처형된 것이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됩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죄 없는 자기 아들로 하여금 인간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도록 한 연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는 그런 계산적인 하느님, 대가를 요구하는 야박한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진상이라고 한다면, 그런 천박하고 잔인한 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됩니다.

한편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성서를 통해서 대중적 기독교의 대속론을 극복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성서학자들 가운데는 대체로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납니다. 먼저 성서해석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부류입니다. “하느님은 예수의 죽음을 원했는가?” “예수의 죽음은 그 자신의 목적이었는가?”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처음부터 구원 사건으로 이해했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명료한 주석학적 연구가 선행될 때 대중적 이미지로 채색된 대속론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래의 성서적 맥락에서 예수 죽임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한데, 위의 질문들에 대해 성서학자들의 답변은 대부분 ‘No’로 수렴됩니다. 성서의 기록들이 이러한 질문에 일견 ‘Yes’로 대답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해석해선 안 되고 그러한 해석을 취하고 있는 성서기록의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본문의 문맥을 넘어서 역사적-사회적 문맥까지도 고려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컨텍스트를 중시하는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죽음이 복음서 문맥상 그의 하느님나라 운동의 역사적 귀결임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가난하고 억압당하던 갈릴리 및 유대사회 주변부의 오클로스들을 위한 연대와 투쟁의 결과로서 중앙(헤롯-대제사장)과 지방(바리새인 및 지방 토호세력)을 연결하는 권력의 카르텔과의 갈등으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자신들의 죄를 사하기 위한 유일회적 속죄제물이라고 선언했던 것은 당시 죄용서를 독점한 성전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으며 하느님과의 분리를 초래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이미 처리하셨다는 일종의 구원의 민주화 선언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신약성서를 보자면,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임은 자명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그의 죽음에만 배타적으로 한정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약성서 내에서 다양한 구원론적 그리스도론 혹은 예수론의 모델들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팔복선언으로 시작되는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 어디에서도 우리는 대속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비단 산상수훈뿐이겠습니까.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많은 선언과 이적들에서 우리는 (대속적) 구원론 이전의 구원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속죄와 거리낌, 그 메울 수 없는 간극

일단 복음서의 예수는 그렇다 쳐도, 사실상 대속론의 창시자라 해야 할 바울에게서조차도 예수 죽음의 구원적 의미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그에게서 예수 죽음은 분명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죽음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대속론이 아닌 또다른 것이 바울의 십자가 해석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서신학도로서 바울에게 있어 예수 죽음의 의미가 대리적 속죄의 의미를 띠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해서, 신약성서에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대속론을 무조건 외면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저는 대속론을 그리스도론의 전부로 혹은 우리의 구원론의 전부로 받아들이는 복음주의자들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속론 이외의 또 다른 예수 죽음 해석을 편파적으로 지지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예수에게서 죽음 이외에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혹은 상호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 나름의 개별적인 가치가 있고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설령 그의 죽음을 특별히 강조한다손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대속적 의미로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려 저는 예수 죽음 사건에 결합되어 있는 두 층위 사이에 존재하는 그 간극을 중요하게 여기며,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직시하는 힘을 신앙적 성찰의 동력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저는 그것이 신앙의 본질적 형식이라고 봅니다.

자, 이제 그렇다면 바울에게서 예수 죽음의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리적 죽음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의적 상징으로 보면 속죄제물이고, 법률적 상징으로는 대리이고, 외교적 상징으로는 화해입니다. 죄의 극복이 유대적 신앙 전통의 구원론의 근본 목표이므로 예수 죽음에 깃든 구원의 의미의 핵심에 속죄가 있는 것입니다. ‘죄사함=구원’이라는 것이지요.

속죄로서의 예수 죽음의 해석은 로마서 3장 21~5장 11절에 걸쳐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3:25)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7-8)

이처럼 예수의 대리적 속죄 죽음은 하느님의 의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과의 평화”(5:1), “하느님과의 화해”(5:9, 11)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화해의 차원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화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죽은 자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면, 이제 예수가 다시 살아나고 그로 인해 우리도 다시 살아나야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침없이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은즉 화헤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

죽음이 극복되었을 때 비로소 화해는 완성됩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이 속죄적 죽음, 그것은 명백히 대리적 속죄이고, 또한 화해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유대교 신앙에서는 단순히 죄사함의 극복이 구원의 목적이었는지 모르지만, 바울에게는 전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인간과 창조주의 화해가 대속적 구원의 궁극적 목표였던 것입니다. 전우주적 차원에서의 인간과 창조주의 화해를 위한 예수 개인의 대속적 죽음, 그로 인해 모든 민족들의 죄가 단번에 제거되었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의 십자가 신학의 한 면일 뿐 전모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스캔들’(거리끼는 것, σκανδαλον)이고, 이방인에게는 ‘모리안’(미련한 것, μωριαν)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유대와 이방인을 막론한 당대의 상식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의 약함을 드러내고 그의 실패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성공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이미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무능함 및 무력함을 보여준, 말 그대로 구원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인간의 구원이 예수의 처참한 패배와 살해당함으로 인해 실패했다는 것. 이 역시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 사건의 또 다른 진실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즉 유대인과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스캔들이고 모리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과 연관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음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최후에 외치는 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입니다. 수많은 현대신학자들이 이 외침 속에서 무신론적 신앙의 절규, 나아가 신 부재 경험의 원형을 읽어냈습니다. 이미 예수 자신이 기독교가 범할 수 있는 궁극의 죄, 곧 고통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부재 혹은 무력한 침묵을 발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어떤 면에서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라는 예수 자신의 처절한 확인이기도 합니다. 속죄제물의 당사자로서,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 정작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이 부재한다는 느낌으로 인해 절규했다면, 우리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에 관해 다각도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아들이 지극히 높여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들을 위하여 죽었기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의 동등성을 포기하고, 오히려 종들과의 동등성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를 통해 그는 모든 낮춰진 제물들, 그 시대의 종들(servants)과 같이, 즉 그들과 연합했다는 데 십자가 사건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인류학자이자 문학이론가인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개념이 그 의의를 획득합니다.

지라르가 말하는 예수는 (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기 이전에, 한 사회가 통합을 위해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희생양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앞서 바울에게서 십자가가 ‘스캔들’(거리낌)이라고 말했는데, 지라르는 사회 전반에 걸쳐 거대하게 얽힌 대결구조를 가리켜 ‘스캔들’이라고 일컫습니다. 고도로 응축된 스캔들은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갑니다. 벼랑 끝에 몰린 사회는 방향 전환을 위한 ‘희생양’을 찾게 마련입니다. 사회의 다수는 갈등의 원인을 개인 혹은 소수자에게 집중시킵니다. 갈등의 원흉으로 지목된 소수는 다수의 폭력에 의해 애꿎게 희생되며 사회의 모순을 일시적으로 분출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홀로코스트의 유대인들이 2차 대전 당시 유럽에서 그러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그와 같은 희생양메커니즘의 가장 생생한 예인 동시에, 그 희생양메커니즘을 극복한 유일한 사례라고 지라르는 주장합니다. 민중신학자들, 해방신학자들, 흑인신학자들이 바로 이러한 지라르의 해석과 더불어 십자가의 예수가 오늘 자신들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민중의 상징이요, 민중은 예수의 상징이라고 하는 예수사건의 역사적 계열화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십자가 해석에 힘입어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으로서 예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 현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현장에 서게 될 때, 이제 신앙은 희생양의 고통과 더욱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스캔들의 사건으로서 십자가 현장 앞에 서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박혀 있는 예수와 같은 내 주변의 희생자들의 고통과의 만남이며, 동시에 그러한 기억을 통한 희생양과의 동일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거리낌으로 해석하는 이와 같은 예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죽음이 속죄해석에 종속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속죄 혹은 대속과는 무관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해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서 십자가는 어떠한 속죄의 기능도 갖지 않는, 단지 낮아짐과 학살과 폭력과 실패와 패배의 재현일 뿐입니다. 그래서 속죄의 십자가와 스캔들로서의 십자가는 사실상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련 없는 정도가 아니라 둘은 서로 강렬하게 모순되며 충돌하는 것입니다. 스캔들로서의 십자가 앞에서 개인이 속죄함을 얻을 혹은 구원을 받을 가능성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일뿐이니까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이 양극단을 오락가락합니다. 거리낌(사회를 향한 것이든, 하느님을 향한 것이든)으로서의 십자가가 속죄로서의 십자가만큼 성서적/역사적 전거를 갖고 있고 또한 신앙적 의의를 충분히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은 그것이 십자가에 대한 불순한 무신론적, 혹은 정치적 관점으로 편향된 왜곡이라 단정 짓고 거부하기 바쁩니다.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이 말하는 속죄로서의 십자가가 갖는 우주적 화해의 의미를 간과하고 그것을 계몽되지 못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폄하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 가운데는 분명 속죄론이 유의미한 국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역기능만 주목하고, 그것이 순기능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탐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 역시 저는 불만스럽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대속론을 자신의 신앙고백의 핵심으로 받아들이는 복음주의자들을 존중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속론이 아닌 다른 해석, 즉 거리낌으로서 십자가를 이해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신앙도 존중합니다. 흔히 제가 민중신학도라고 할 때 저는 후자의 관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저는 성서신학도로서 전자의 관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풍부한 성서적 전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제가 둘 다를 인정한다고 하니, 마치 절충주의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저는 이 두 층위 사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을 만들어서 둘을 종합하거나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할 생각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절충주의자가 아닙니다. 물론 속죄로서의 십자가론과 스캔들로서의 십자가론은 결코 종합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요.  

 
3. 보십시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저는 복음주의자든 진보주의/자유주의자든 성서가 함께 드러내고 있는 예수 죽음의 여러 층위들 사이의 시차(視差)적 간극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더 나아가 동일한 사건 속에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그 대립적 의미들이 하나의 사건, 같은 윤곽 속에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관점이 바로 신앙의 태도라고 봅니다. 설교자로서 제게 주어진 신성한 권위에 의지하여 감히 말씀드리건대, 민중신학이 되었건, 자유주의가 되었건 혹은 복음주의가 되었건 여하간 그 무엇이 되었건 간에 최소한 자신의 신앙과 구원의 핵심적 전거를 성서로부터, 즉 십자가로부터 끌어오길 원한다면, 십자가가 그 내부로부터 드러내는 간극, 차이, 모순, 긴장, 충돌,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양극 그 자체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모든 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대상 혹은 신앙의 내용이 서로 같지 않아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신앙을 실천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성서를 통해 다양한 예수상을 제시할 수 있고, 또한 예수 죽음의 상에 관해서도 다양한 그림들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각자가 그 중에 어떠한 것에 더 흥미를 느끼고, 또 감동을 받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떠한 것이 되었건 다 좋습니다. 다만 피해야 할 것은 꽉 막힌 독단주의와 손쉬운 절충주의입니다. 내가 아는 복음의 의미가 유일한 것이고 전부라는 그런 착각, 그 무식한 오만함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서의 대속론이 현대적 사고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마냥 거부하는 불성실한 태도 역시 버려야 합니다. 성서의 가치를 중시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대속론을 결코 에둘러 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속죄로서의 십자가와 거리낌으로서의 십자가, 둘 중 어느 하나만 보는 것, 혹은 둘 사이에 놓인 간극을 무시하고 둘을 억지로 하나로 종합하는 것, 그 어떤 것도 올바른 신앙의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저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속죄론이든 희생양이론이든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둘 중 어느 것이 되었든 간에 우리가 하나를 취하더라도, 반드시 그 이면의 다른 것이 존재함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사이에 놓인 그 긴장의 거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합니다. 사실은 바로 그 차이와 간극 자체가 신앙의 실재적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신앙고백의 내용을 하나로 통일할 수도 없고, 또 애써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아닌 형식의 관점에서는 보편적 진실에 함께 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진정한 보편성과 개별성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서로 다른 신앙고백의 내용을 갖고 있는 이들이 함께 하고 있는 우리 한숨결교회에서 만들어나가는 신앙의 보편적 태도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속죄와 거리낌이라고 하는 상반된 진실이 공존하고 있는 십자가 사건의 실재, 다시 말해 나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의 이동에 따라 드러나는 그 시차적 간극 자체로서 십자가 사건을 볼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시각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자신의 시점에서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의 전환이자, 그 전환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는 서로 다른 관점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긴장, 비일치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십자가의 진실을 견뎌낼 수 있는 시각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둘 이외에 또 다른 십자가 해석을 지지하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무리와 고발자들을 향해 보라고 외쳤던 그 사람, 예수는 그 내부로부터 수많은 해석의 차이를 내장하고 있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차이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현장을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신앙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하느님이 빌라도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예수를 보시겠습니까? _정용택

 

Caravaggio, <Ecce Homo>, 1606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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