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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민중신학, 스피노자를 만나다

IV-3. <정치론>: 절대적 민주주의



(1) 이성과 복종

앞선 장에서 우리는 <정치론>의 다중이 처한 비관적인 상황을 서술하였다. 다중은 증오와 시기, 복수심, 사치와 방종과 같은 여러 수동적인 정념에 사로잡혀 지속적인 능력의 감소를 경험하며, 마침내는 서로 적대하게 된다.1) 이 적대에서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두려움이 나타난다. <신학정치론>과 마찬가지로, <정치론>에서도 이 두려움을 정치체의 구성으로 추동하는 것은 바로 ‘상상’이다. “공포와 증오, 공동으로 피하려고 하는 나쁜 일에 대한 또는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다른 선을 추구하는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나쁜 일에 대한 것”2)에 대한 상상 또는 그것의 동전의 뒷면 같은 것으로서 “자연권의 보존과 확장을 위해 인간이 공동의 권리를 가지고 살고 일구어 놓을 땅을 서로 같이 지니고 자기를 지켜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배제하며,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의지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상상.3) 이러한 상상은 개인들로 하여금 국가에게 복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게끔 작동한다.


자연상태의 극한 대립을 피하기 위해 형성된 사회. 이러한 정치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려면 확립된 법규범의 준수나 주권자에 대한 복종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종은 능동적인 인간 이성과는 양립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4) 오히려 그것은 또 하나의 예속은 아닌가? 자연상태에서의 위험과 주권자의 항상적인 지배라는 두 극 말고 다중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스피노자는 개인의 이성과 정치체에 복종하는 것이 아무런 모순이나 긴장을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한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이성을 가진 인간이 정치체의 주권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중은 정치체를 구성하여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 이 자유는 욕망을 억제할 수 있을 만큼 크고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성은 무엇보다도 평화를 찾도록 가르치는데, 평화는 국가의 법률이 지켜질 때 보유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인일수록 오히려 더 국가의 법률을 지키게 된다.5) 더욱이 국가상태에서는 자연상태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도 해 낼 수 있다. 이는 더 적극적으로 국가에 복종6)할 이유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스피노자는 국가에 대해 언제나 복종해야 한다거나, 자연상태보다는 국가상태가 나을테니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피노자의 이런 주장을 <정치론>의 다른 부분과 연결하여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 따르면, 복종의 의지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복종의 대상이 되는 국가가 참된 국가, 이성적 국가여야 한다.7) 그런데 단지 전쟁의 부재 혹은 신민의 무기력함 때문에 이어지는 평온은 평화가 아니며, 희망보다는 공포에 의하여 모인 것과 같은 삶은 제대로 된 국가 상태가 아니다.8) <정치론> 5장에서 스피노자는 “최선의 국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최선의 국가”란 “인간이 화합하여 생활할 수 있는 국가” 곧 “이성과 진정한 정신력과 정신 생활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 생활”이며9), “자유로운 다중들이 세운 국가”이다.10) 바로 여기에서 “최선의 정치”로서의 “민주주의”가 등장한다.


(2) 정치체제의 분석

스피노자는 <정치론>의 후반부에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 등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국가의 영속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찰한다. 이 부분은 일견 더 낳은 ‘체제’를 모색하는 제도 분석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각 ‘체제’는 결코 어떤 정적인 시스템 위에 놓여 있지 않다. 그는 군주정과 귀족정의 제도를 분석하며, 각각의 정치체가 최선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통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의회는 많은 수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의회에 학식이 그리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열심히 행해 왔던 일에 대해서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우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론> 7장 4절)

 

더욱이 모든 사람들이 통치 받는 것보다 통치하고자 할 것은 분명하다. (<정치론> 7장 5절)


그리고 이를 위해 국민은 평등해야만 한다.


논밭과 전체 토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집도 공공의 소유로 해야 한다. 그리고 도시민이건 농민이건 간에, 그것들에 대해서 시민에게 매년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이것들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세금을 없애거나 평화 시에 모든 종류의 세금을 면제한다. (<정치론> 6장 12절)


땅과 다른 부동산들은, 국가의 공동의 재산임에 틀림없다. 즉 그것들은, 연합해서 그것들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람들이 그의 권리를 주장하도록 권한을 주었던 사람에게 속한다. (<정치론> 7장 19절)


가능한 한 시민이 평등한 관계 - 이는 국가에 있어서 첫 번째로 필수적인 요소인데 - 를 갖기 위해서, 왕의 후손들 외에 누구도 귀족이 될 수 없다. (<정치론> 7장 20절)


즉 그는 어떤 형식의 정치체이건, 그것이 영속적으로 생존하며 번영할 수 있는 근거를 “민주주의”(로 향함)에서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군주정을 분석하면서, 한 개인에 의한 통치는 본래 불가능한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군주국가라고 믿고 있는 국가가 실제의 운용에 있어서는 귀족국가”이다. 왕은 통치가 한 사람에게 위임되게 만드는 “국가기밀”을 거부해야 하며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자문기구들이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군대와 친척들이 필요하고,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고 이것이 실행되는지 여부를 감독하기 위해서는 관리들”11)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이것이 과두제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중들의 의견이 충분히 표현되고, 하나의 결정이 이루지는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왕은 일체의 과두주의를 거부하고 대중의회[민회]에 심의권을 부여하면서 최종 결정의 통일성만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 “국가 기밀”12)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왕은 사실상 이를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군주제는 마치 현대의 대통령중심제, 그것도 대통령의 권한이 매우 약한 대통령제와 유사하다.13)
 

귀족정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 모델은 처음부터 집합적 결정의 합리적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군주정과는 달리 별도의 고문관이 필요 없으며, 왕이 죽거나 병약한 것과 상관없이 회의체의 힘은 항상 동일하고 영속적이다. 만일 하나의 통치성을 위해 회의체가 지도자를 선출할 경우 권력이 집중되고 군주제로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귀족정에는 맞지 않다. 귀족정에서는 왕이라는 중심이 없는 대신, 토론과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충분히 큰 회의체에 위탁되는 통치는 절대통치이거나 절대통치에 가장 가까운 통치”14)이며, “인간의 정신은 모든 것들을 단숨에 통찰하기에는 너무나도 둔하며, 오히려 그것은 협의하고 경청하며 토론하는 것으로서 예리해지기 때문”15)이다. 때문에 스피노자는 귀족제에 있어서는 갈수록 귀족의 수나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다중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귀족제의 회의체가 다중의 모든 의견을 잘 반영하기 위해 최대한 확장될수록, 절대통치에 더욱 가까워지며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열정만으로 마음을 쏟아 모든 일을 결정하는 동안, 자유와 공공의 선을 잃기도 한다. 인간의 자연적 능력은 너무 무뎌서 한 번에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의하고 청취하고 논의하는 것에 의해서 그들은 더욱 훌륭하게 성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동안,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원하는 것, 즉 모든 사람이 승인하고 누구도 처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발견한다. (<정치론> 9장 14절)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군주제와 귀족제 모두에서 정치체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는 다중에 의한 민주주의이다. 안정성과 영속성을 위해서는 그 정체의 성립과 지속이 얼마나 다중에 의한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각각의 정치체가 ‘완전성’을 향해 갈수록 각 정치체는 사실상 민주주의를 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극한으로 나간다면 “군주제”, “귀족제”라는 법적 구분 자체가 단순한 이름의 문제가 된다.16) 이것은 스피노자가 미완의 작업으로 남긴 민주정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적인 군주정이 있을 수도 있고, 예속적인 민주정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다중의 의견이 ‘대의’되는 민주주의, 즉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관한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형태의 정치체라기 보다는 다중이 능력을 획득하고, 그 능력이 표현되는 끊임없는 이행의 과정인 것이다.


각각의 정치체의 한계와 몰락의 징후를 드러내는 서술 속에서 이러한 이행으로서의 민주주의와 다중의 형상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마키아벨리를 인용하여, 국가는 “때때로 정화하여야 할 어떤 불순물”이 모여 위기를 맡게 되고, 이것이 적절히 제거되지 않는 한 정치체의 해체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런 붕괴의 진정한 원인은 보통 외적이라기보다는 국가 내부에 있다. 군주정에서는 세습 귀족들의 존재(7장 10절)나 용병들에 대한 의존(7장 12절), 왕족들끼리의 경쟁(6장 37절)으로부터 소요가 발생하며, 귀족정에서는 귀족 의원들 사이의 불평등(8장 11절)이나 공무원의 타락(8장 29절), 도시들 사이의 경쟁 관계(9장 3절,9절), 그리고 구원자를 꿈꾸는 인민들의 비참한 상황들 때문에 조장되는 군대 지휘관들의 야심으로부터(8장 9절; 10장 1절), 그리고 귀족 의원들과 평민들 - 도시 안에서 이방인들처럼 존재하는 - 사이의 계급투쟁으로부터 소요가 발생한다.(8장 1-2절, 11절, 13-14절, 19절, 41절, 44절; 10장 3절)17) 이러한 소요 속에서 정치체가 다중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참주정으로 타락하여 공포에 의한 통치를 할 때, 정치체를 파괴할 다중의 분노를 산출하게 된다. 이 한계 지대에서 절대적 통치로서의 민주주의, 즉 다중 스스로에 의한 집합적 통치가 대두된다.


(3) 공포스런 존재: 자유로운 다중

<윤리학> 4부 정리 54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군중이 두려워하지 않을 경우, 군중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이 진술은 마치 군중이 공포나 다른 어떤 수단에 의해서 최고권력, 혹은 국가에 복종하지 않을 때의 무정부적 상황에 대한 서술처럼 보인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국가 내의 한 개인이나 집단이 자의적으로 국가의 결정이나 법을 해석하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한다.18) 그렇게 될 때 국가의 존립은 유지될 수 없고, 각자가 자신의 자연권에 따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자연상태로 되돌아가고, 이것은 예속상태를 낳을 뿐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국가 상태에 있어서도 개인들의 자연권은 없어지지 않는다. <정치론> 3장 3절에서 스피노자는 자연권이 국가 상태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의 규정에 의하여”라는 단서를 단다. 그리고 뒤이어 그 단서의 이유를 “사람들의 자연권 상태를 올바르게 생각해 본다면, 국가 상태 안에서도 없어지지 않기 때문”으로 제시한다. 즉, 자연권은 국가 상태에서 ‘명목적’으로만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상태나 국가 상태 모두에서 자기 본성의 법규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상태에서 개인의 자연권이 공포 등에 의해 예속되지 않고, ‘이성에 의해’ 덕과 복종으로 나타날 때, 그것을 최선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공포와 예속에 의해 평화를 누리는 국가는 사실상 국가라기보다는 “황무지”에 불과하다. 국가 상태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에서 인용한 문장 - “군중이 두려워하지 않을 경우, 군중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 을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최선의 국가”에서 다중은 더 이상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다중의 두려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 문장에서 기존의 정치체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위기의 징후로서 다중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정치론> 7장 27절에서 이 문장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군주와 신민을 분리하여 우중과 다를 바 없는 신민의 무지와 적개심을 비판하는 고전적 언술들을 반박하고 있다. “우중volgus이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때 두려운 존재가 된다.”는 말은 바로 이 비판자들의 주장이다. 스피노자는 이들의 말을 반박하면서 이러한 무지와 적대의 본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지배자나 신민이나 인간은 똑같이 이성보다는 정념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오만함은 통치자의 고유한 속성이다. […] 그러나 그들의 오만은 중요한 지위, 사치, 낭비, 악덕과 조화를 이루는 것들, 일종의 세련된 어리석음, 우아한 비열함 등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군중이 두려워하지 않을 때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이유에 대해 스피노자는 자유와 예속이 손쉽게 뒤섞이지 않기 때문이라 말한다. 즉, “신민의 예속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다중을 공포로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뒤이어 신민들이 무지로 인해 국가의 판단과 결정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그것이 군주와 귀족들의 비밀정치와 정보독점에 의한 것이라 비판한다. 그리고 “만일 평민들이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고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거나 또는 극히 적은 정보만으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줄 안다면, 그들이야말로 복종하는 대신 지배할 만한 자들일 것이다.”19) 


네그리는 <윤리학>과 <정치론>의 이 문장을 해석하면서 이것이 문맥상 ‘이성의 성향’ 아래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중은 조야한 상태로 태어났으며, 짐승들의 무리처럼 행동하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존재의 변신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그 종족의 집단적 충만함 속에서 수행하는 변신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다중의 욕망의 힘과 그 긍정적 경향이라는 것이다.20) 그러므로 “공포스러운 존재”로서의 다중이란 예속을 거부하고 자유를 택하여 기존의 정치체를 위기로 이끌며, 더 나아가 절대적인 통치, 즉 최선의 정치체인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능력자들인 것이다.


(4) 혁명: 영원하게-되기, 신-되기

우리는 앞선 논의에서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행하는 각 정치체에 대한 분석이 그 자체로 완결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민주주의로 향하는 이행의 과정임을 살펴보았다. 각 정치체의 몰락의 징후에 대한 서술을 통해 스피노자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통치로서의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을 열고 있다. <정치론> 4장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일종의 ‘혁명론’을 마주하게 된다.


‘혁명’이란 다중이 가진 ‘자연권’에 입각한 것이다. 국가가 무능력해졌을 때, 그래서 국민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공포에 의해 예속될 때, 다중은 자신들이 가진 자연적 권리로서 “전쟁의 권리”를 발동시킨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행동이자, 다중이 가진 힘만큼의 운동이다. “전쟁의 권리”는 본래는 최고권력이 가진 힘이다.21) 국가 자체의 존립의 근거는 바로 최고권력이 가진 전쟁의 권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거슬러 공공복리를 파괴할 때 다중은 자신의 권리를 최고권력에 위임하는 계약이나 법률을 파기하고 국가 상태는 적대상태(내전)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다중은 바로 이 혁명의 과정 속에서 “전쟁의 권리”를 가진 자, 즉 최고권력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문맥 속에서 긍정적으로만 서술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혁명은 언제나 정념적 혼란 상태의 위협을 안고 있다. 때문에 스피노자에게서 혁명론을 찾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폭력과 파괴의 운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중이 발동한 전쟁의 권리(힘)는 다른 한편으로 구성하는 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치체’를 구성함으로써만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론>에서 우리는 때로는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다중을 견제할 수단을 찾고 있는 스피노자를 발견한다. 그는 다중이 기존 정치체에 대한 불만을 그저 폭력과 파괴로 터뜨릴 때에, 우매한 군중으로 화한 다중은 다시 군주에 의한 예속생활로 돌아가게 된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정치론>의 분석에서 청교도 혁명과 크롬웰의 예를 통해 고찰한 바 있다.


따라서 자유로운 다중에 의한 다중의 통치, 즉 절대적인 통치로서의 민주주의란 혁명과 구성의 끊임없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네그리는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를 다른 유사한 통치 형태들 중 하나로 간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론>에서 미완의 기획으로 끝난 ‘민주정’에 대한 서술을 <윤리학> 5부의 지평에서 분석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적 정의야 말로 통치 형태에 관한 전통적 분류의 관점에서 볼 때는 “비-통치”의 정의라는 것을 밝힌다. 민주주의는 곧 다중의 “구성하는 힘”, 즉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죽음으로 특징지어지는 현재의 상황을 타파하는 실제적인 힘이며, 더 나아가 “영원하게-되기”인 것이다.22) 다중의 민주주의적 운동은 이제 신의 영원성의 전망 안에서 펼쳐지며, 더 나아가 이 민주주의의 운동 속에서 다중은 신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민주주의와 소수자의 문제: 여성 참정권 불가론에 대한 재해석

<정치론>에 대한 분석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주제는 ‘소수자’에 대한 것이다. 미완으로 끝난 민주정에 대한 분석인 11장에서 스피노자는 현대의 독자들을 매우 불편하게 할 주장을 펼친다. 그것은 “여성 참정권 불가론”에 대한 논증이다.


사람들은 분명 “여자가 남자의 권력 아래 있는 것은 본성에 연유한 것인가, 아니면 법제에 기인한 것인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법제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자를 정치에서 제외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을 토대로 이 문제를 살펴볼 때 우리는 그것이 여자의 무력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런데 만약 여자가 본성적으로 남자와 동등하고 정신의 강인함이나 지능에 있어서 같거나 비슷하다면, 여러 많은 민족들 사이에 양성이 함께 지배하고 있는 민족이나, 남자가 여자에게 지배되거나 여성이 교육을 받아 남성이 정신적으로 여자보다 뒤떨어진 민족이 몇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디에서도 그렇지 않으므로 우리들은 확실하고 명백하게 주장하게 된다. (<정치론>, 11장 4절)


이러한 논의는 단지 여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피노자가 자연권을 “능력 만큼의 권리”고 규정한 것을 살펴본 바 있다. 이 논의를 따르면 “자신의 권리 아래에 있지 못하는”, 즉 시민으로서의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나, 장애인, 여성, 노예 등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는 소수자들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 어떤 위치도 점하지 못하고 단지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논증 방식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주제가 다른 정치체가 아니라 ‘민주정’에서만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민주정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배”이기 때문에 최고권력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민주정의 논리적 위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23) 따라서 스피노자는 민주정에서 정치적 권리를 갖는 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소수자들의 참정권 배제에 대한 논지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민주정에서 지배자들은 누구인가? 곧 현실에서 공통-되기의 능력을 발휘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들은 “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힘의 원리에 입각해서 지배를 받는 자들이 된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본성에 연유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우리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본성”의 용례가 결코 어떤 고정불변하거나, 초월적으로 규정된 개체의 본질이 아님을 이미 논증하였다.24) “본성”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개체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복합개체를 만들면서 ‘다른 본성’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여성의 참정권 불가론을 논증하면서 “경험적으로 고찰해볼 때”라는 한정적인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이 본래적으로 ‘남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경험 상, 여성이 남성보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스피노자가 예로 든, “여자가 본성적으로 남자와 동등하고 정신의 강인함이나 지능에 있어서 같거나 비슷한” 경우나, “여러 많은 민족들 사이에 양성이 함께 지배하고 있는 민족이나, 남자가 여자에게 지배되거나 여성이 교육을 받아 남성이 정신적으로 여자보다 뒤떨어진 민족”, 혹은 그런 공동체의 모습을 익숙하게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18세기 이후 지속적인 여성 해방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능력과 권리를 가진 존재로 대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논의를 더욱 밀어붙이면, 오히려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소수자들이 가진 능력에도 불구하고 “법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차단하고, 공통-되기의 관계 속에서 소수자들이 능력을 발휘하는 만큼 그들의 지배권 역시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소수자 문제에 대한 이러한 결론은 <윤리학>에서 스피노자가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더 많은 것으로 변용되는 신체”의 주제에 비추어볼 때도 명백하다. 스피노자는 신체를 인간에만 국한하여 분석하지 않는다.25) “정치체” 역시 하나의 신체이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 어린아이, 여성 등이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정치체는, 그들이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 정치체보다 더 적은 변용의 능력만을 가지며, 그런 점에서 무능력한 정치체이다. 이러한 논지를 따를 때 우리는 고정된 척도 - 재산, 체력, 신체발달, 지능, 성, 도덕관념 - 나 제도 등에 의해 소수자를 규정하고, 그래서 그러한 규정된 소수자들을 지배의 대상이나, 다수자들의 ‘배려’나 ‘동정’, ‘보호’에 의해 사회에 통합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관개체성과 ‘변용’의 차원에서 고찰할 수 있게 된다. 즉, 소수자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재구축하는 투쟁과 구성의 과정 속에서 정치적 주체로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역사적인 경험과 지극히 합치한다. 모든 ‘인권’의 역사는 곧 피흘림의 역사가 아니었던가._김강기명(CAIROS 연구원)


 


1) TP 2장13절, “인간은 노여움과 질투, 또는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힐 때 여러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가고 서로 대립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더 교활하고 기만적이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 더구나 인간은 본성이 대개 이러한 여러 감정에 종속되고 있으므로, 인간들은 본성으로 볼 때 서로 적이다.”


2)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131쪽


3) TP 2장14절


4) TP 3장6절, “(이에 대한 반대가 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판단에 스스로를 전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은 이성의 명령과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회상태는 이성과 양립할 수 있는가?”


5) TP 3장6절, “이성은 자연에 반하는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온전한 이성은 사람들이 정념의 변화에 종속되어 있을 때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도록 명령할 수 없다(2장 15절). 즉 이성은 그러한 독립에 반하여 명령한다(1장 5절). 더욱이 이성이 평화를 추구하도록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공동의 법이 깨진다면, 평화는 유지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성의 인도를 받으면 받을수록, 즉(2장 2절) 그가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그는 언제나 국가의 법을 더 잘 지키고 그가 속해 있는 최고 권력의 명령을 더 잘 준수할 것이다. […] 두 개의 악 중에 더 적은 것을 택하는 것이 이성 자체의 법칙이다.


6) 스피노자는 이러한 ‘복종’을, 국가의 공동 결정에 따라서 행하여야 하는 것을 실행하려는 항상적 ‘의지’로 정의한다. TP 5장4절 참조.


7) TP 5장1절, “이성에 의해 세워지고 인도되는 국가가 가장 힘이 강력하고 가장 독립적이라는 것…”; TP 5장2절, “소요, 전쟁, 법에 대한 경멸이나 위반을 신민들의 사악함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그것들은 국가의 가장 나쁜 상태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8) TP 5장4절, “신민들이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공포로 밖에는 막을 수 없는 국가에 대해서, 그 국가는 평화롭다기보다 전쟁을 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평화는 전쟁의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마음의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덕이기 때문이다.”


9) TP 5장5절


10) TP 5장6절


11) TP 6장5절


12) TP 7장29절


13)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113쪽


14) TP 8장3절


15) TP 9장14절


16)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112쪽


17)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104쪽


18) TP 3장 4절


19) 스피노자의 이러한 언급은 지난 2008년의 촛불집회를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난 “집단지성”을 떠올리게 한다.


20)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298쪽


21) TP 4장5절


22) 안토니오 네그리, 앞의 책, 202쪽


23) 군주정이나 귀족정에선 애초에 지배자들이 소수임으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24) II장 2절의 “관개체성” 개념과 IV장 1절의 “공통-되기” 개념 참조.


25) E II정리13이하의 「자연학 소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