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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포스팅/trans-post-christianities

교회와 세상, 그 코드적 동일성에 관한 묵상

- “기독교인만의 문화적 문법”의 세속적 기초와 교회적 기능 -

* 2007년 10월 25일 '교회의 날-교회 다시 보기' 토론회에서 발표문



정정훈ㅣ카이로스 회원, 수유+너머 연구원 



문제는 교회의 게토화일까 세속화일까?

 

대학생 시절 교회 친구에 들었던 에피소드 하나.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던 내 친구는 대학에 들어가서 과 친구들과 나름 잘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기들과 모임이 있어서 나갔는데 동기 여학생들이 안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과 친구에 이렇게 물었단다. “그런데 우리 과 자매들은 어디 있어?” 형제와 자매라는 말은 교회에서 흔히 듣는 칭호다. 남성 대명사는 형제고, 여성 대명사는 자매인 셈이라고 할까. 그리고 형제와 자매라는 가족 관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을 일상적으로 이렇게 부르는 집단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밖에 없다. 이 처럼 한국 교회는 세상(교회 밖)에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들을 가지고 있다. 가령 다 큰 어른들이 아이들이나 부를 법한 노래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부르며 율동을 하며 노는 모습이라던가, 조금만 비판적인 논쟁을 접하면 바로 상처받아버리는 정서 등은 정말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교회문화의 독특성을 형성한다.

 

교회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국은 나에게 ‘기독교인만의 문화적 문법’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요청하면서 아마도 이런 현상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요구한 듯하다. 그리고 조금 더 추측해보자면 ‘기독교인만의 문화적 문법’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하나의 문화적 징후로 읽힐 수 있고, 이 징후를 분석함으로서 세상과 분리된 교회의 문제, 다시 말해 자신들만의 게토에 매몰되어 타자(교회 밖)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타자의 비판에 성찰적으로 응답할 수 없게 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를 고민해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나 역시 현상적으로 본다면 한국 교회가 게토화되어 타자와 소통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있는 독단주의적 집단이 되었다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되고 고립된 것이 그러한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흔히 복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원론이 교회를 독단주의에 매몰되게 만든 주범이었다고, 다시 말해 교회가 자기들만의 문화적 문법에 함몰되어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고 파악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비껴가는 인식이라고 나는 본다. 사태의 본질은 교회와 세상의 분리에 있지 않다. 기독교인이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독단주의적 집단이 된 것은 세상과 교회가 분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교회가 심각하게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표층적 문화는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게토적인 것이 되었으나, 그 심층적 문화는 세상의 패러다임과 정확하게 상동(homology)적 이라는데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 한국 교회의 문화적 습속을 구성하는 심층적 조건으로서 교회의 조직과 프로그램(교회의 활동)의 패러다임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기독인들의 독특해 보이는 문화적 문법은 그들의 천성이 아니라 교회라는 현실적 제도 속에서, 그것의 조직과 활동(그것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나타난다) 속에서 습속화된 것이다. 그들의 말하는 방식, 정서적 태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 등과 같은 문화적 습속들과 성향들은 교회 조직과 프로그램을 통해서 수행된 주체화의 산물인 것이다. 이 교회의 조직방식과 활동방식/프로그램이 변화되면 이런 문화적 습속들 역시 변화된다. 그래서 나는 이 이 글에서 기독교인만의 문화적 문법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주체화-장치인 교회의 조직과 프로그램을 그것의 패러다임의 측면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교회 조직 패러다임의 계보학 : 제국, 대의제 국민국가, 계발독재 국가

 

기독교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기독교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제도들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표현되는 양상은 역사와 사회, 문화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본질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양상이 다양하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현실 속에서 표현하기 위하여 세속의 논리에 기초한 다양한 제도들을 자신의 조직과 활동의 모델로 삼아 왔다는 것이다. 즉 교회가 조직되는 방식, 운영되는 원리, 교회의 다양한 활동방식에서 세속의 기존 제도가 교회의 모델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가령 장로교의 ‘헌법’이 보여주는 바가 그런 것이다. 장로교는 종교개혁의 산물로서 교회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도 로마제국의 제정을 모델로 형성된 카톨릭과는 다른 모델을 추구했고, 그래서 채택된 모델이 바로 대의제에 기반 한 의회제 모델이었다. 장로교회의 조직구성에 있어서 장로란 대의제에서 대표(representative)의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종교개혁의 확대, 전파 시기가 근대국민국가의 형성시기와 겹치며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장로교가 근대국민국가를 자신의 조직모델로 삼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이 로마제국을 자신의 조직모델로 삼았다면 장로교는 의회제 국민국가를 자신의 조직모델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민국가라는 정치체의 조직 및 운영 패러다임을 교회의 조직 및 운영 패러다임으로 삼아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장로교의 조직구성 및 운영방식에서 종교개혁의 주류 가운데 한 종파인 장로교가 콘스탄틴주의의 또 다른 형태임을 예감할 수 있다.

 

교회가 세속적 제도의 조직 패러다임을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인 것은 한국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의 조직과 운영의 방식은 한국 사회의 중심적 제도들의 조직과 운영 방식을 그 모델로 삼아 왔다 있다. 한국교회가 양적 측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는 한국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성장하던 시기와 맞물려있다. 70년대에서 80년대를 거치면서 급속히 성장한 한국 자본주의는 강력한 권위주의적 정부가 중앙집권적으로 산업발전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사회과학적으로는 이런 시스템을 ‘발전국가’라고 부르며 그 한국형 모델을 흔히 ‘개발독재’라고 지칭한다. 한국교회의 비약적 성장 시기는 한국 사회의 개발독재시기와 겹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조직화 및 운영 방식은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삼았다.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리더를 중심으로 위계화된 조직이 형성되고, 중앙 집권적 계획에 따라 전체 조직이 운영되는 방식은 70-80년대 개발독재 시스템이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개발독재국가를 자신의 조직 패러다임으로 삼은 대형교회들이 주로 강북에서 시작되어 포진되었음에 착안하여 그런 대형교회들을 나는 강북형 대형교회라고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양적성장은 바로 개발독재국가를 자신의 패러다임로 삼아 조직을 형성하고 운영하였던 대형교회들이 이끌었다. 이 대형교회들이 한국 사회의 산업화시기에 교회의 기본적인 조직 패러다임을 제공한 것이다.

 

패러다임 쉬프트 : 포스트포드주의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면서 강북형 대형교회와는 다른 조직 패러다임을 가진 대형교회들이 등장하게 된다. 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는 소위 복음주의 교회들을 나는 강북형 대형교회와 대비하여 강남형 대형교회라고 부르고자 한다. 물론 강북형 대형교회가 반드시 강북에 위치한 교회만을 지시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 교회가 존재하는 지역과 관계없이 개발독재국가 패러다임을 받아들인 교회 일반을 의미하듯, 강남형 대형교회 역시 지역과 상관없이 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새로운 조직과 활동 패러다임에 기초한 교회들을 지칭한다. 강남형 대형교회는 강북형 대형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며, 강북형 대형교회의 성장전략과는 뚜렷한 차이를 가지는 성장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강남형 대형교회들, 혹은 복음주의 대형교회들은 어떤 조직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일까? 연일 신문과 방송뉴스의 사회면을 민망한 소식들로 장식하고 있는 강북형 대형교회들과 달리 성서에서 제시된 조직모델을 자신의 그것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남형 대형교회의 조직 패러다임 역시 세속의 제도들이 기초하고 있는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강남형 대형교회들이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식은 소위 포스트포드주의라고 불리는 기업의 그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포스트포드주의란 1980년대에  기업들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도입한 자본축적 모델을 말한다. 포스트포드주의가 어떤 축적체제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는 포드주의 축적 패러다임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2차대전 이후 서구 자본주의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결합에 근거한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미국의 포드자동차로 대표되는 이 패러다임은 흔히 포드주의라고 지칭된다. 생산전략에서는 기능과 성능을 강조하는 표준화된 제품(포드의 T형 자동차가 대표적이다)을 대량 생산하여 시장에 공급하였고, 판매 전략은 노동자에게 고임금을 지불하여 대량 생산된 제품을 대량 소비할 수 있게 하였다. 포드주의 패러다임에서는 생산되는 제품은 기능을 중심으로 표준화되어 있었고, 개성이나 스타일이 강조되지 않았으며 소비 역시 소비자의 취향 보다는 제품의 성능과 가격에서 우위를 점한 제품이 동질적으로 소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시작된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더 이상 포드주의를 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한 효과적인 모델로 남아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포스트포드주의란 바로 이러한 자본의 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도입된 축적 패러다임이다. 포스트포드주의의 핵심은 다품종 소량 생산에 있다. 포드주의적 대량생산 시스템은 소비자들에게 필수적인 상품을 공급해주었지만 그들의 다양한 취향에 따른 소비의 스타일화에 대한 욕구는 해결하여 주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기에 포드의 T형 자동차는 소비자들이 대중적으로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자동차가 대중적으로 공급된 이후에는 소비자들은 디자인, 색상 등 자신의 취향에 따른 차별화된 자동차를 원하게 된 것이다. 포스트포드주의는 제품의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감소된 이후의 상황에서 다양한 취향에 따라 분류될 수 있는 소비자군의 욕구에 따른 차별화된 제품을 생산하여 맞춤형으로 공급하는 전략을 선택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토요타 자동차의 JIT(Just-In-Time) 전략이다. 토요타 자동차는 공장의 생산라인을 수퍼마켓의 진열대 식으로 바꾸었다. 소비자가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수퍼마켓 진열대에서 고르듯, 한 생산라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품만을 이전 생산라인으로부터 고르는 것이다. 모든 생산라인은 다음 생산라인을 위한 수퍼마켓이 되는 셈이었다. 토요타는 이러한 생산라인을 바탕으로 소비자의 구매요청이 있는 즉시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품을 생산하여 공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것이 JIT 시스템의 요체이다. JIT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타겟 소비자의 취향, 욕구, 스타일, 소비 주기 등 소비 패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이런 소비 패턴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후 소비 패턴을 예측하고 그에 걸 맞는 생산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 공정에서도 다양화된 소비자의 취향에 부합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창의력과 혁신능력이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 기업은 소비자들과의 상호작용을 중요한 경영전략으로 채택하였고 창의력과 혁신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노동자의 꾸준한 자기계발과 평생학습을 중요한 노동력 관리 전략으로 삼았다. 토요타 자동차의 JIT모델은 이후 많은 기업들에 퍼져나갔고 포드주의를 대체할 축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국내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시작한 신경영 선언 이후의 삼성그룹이나, 요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대항마로 주목받고 있는 문국현 전 사장이 주도한 유한킴벌리가 이 모델을 수용한 대표적 기업이다.

 

 

강남형 대형교회의 조직 모델 : 포스트포드주의적 기업

 

90년대 이후 한국교계에는 복음주의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복음주의 운동은 성속이원론을 극복하고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공히 강조하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리더쉽을 중시하고 평신도 훈련과 사역을 강조하였다. 잡지 <복음과 상황>이 90년대 초반에 창간되었고,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비롯한 기독교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청년들이 교회의 일꾼에서 양육과 훈련 그리고 주요한 선교 대상으로 변화되어 청년대학부가 튼실하게 조직되고 학원선교단체들에 대한 지원이 지역교회의 강화되기도 하였다. 부흥회 대신 사경회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고,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보다 영성이라는 용어를 선호한 것도 복음주의 운동의 자장 안에 있는 교회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을 펼쳐온 교회들은 주로 강남구, 서초구 등과 같은 강남지역에 위치하였다. 복음주의 운동을 펼쳐온 이 교회들은 분명 강북형 대형교회들이 보여주는 재정불투명성, 목회세습, 목회자의 비윤리적 행태 등과 같은 한국대형교회의 역기능적 면모와는 달리 개혁적이고 윤리적인 모습을 보여 오면서 한국교회가 혁신되어야 할 모델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이러한 복음주의권의 대형교회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세상의 제도, 특히 기업의 조직 패러다임을 자신의 조직 패러다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세속적 원리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한에서 강북형 대형교회와 마찬가지로 세속주의적 경향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면 복음주의권의 대형교회들을 강남형 대형교회라 이름 붙이고, 그 교회들이 포스트포드주의라는 현대 기업의 조직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래서 세속주의적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강남형 대형교회들은 교인들을 더 이상 주일예배나 수요예배 혹은 금요철야기도회와 같은 교회의 정기모임에 동원되어 목회자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수용해야할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강남형 대형교회들은 교인들의 삶 전반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요구들과 필요들에 부합하는 특화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부모에게는 자녀 양육의 방법과 부모의 역할을, 신혼부부에게는 부부간의 의사소통법과 제테크 전략을, 청소년과 대학생에게는 비젼과 자기계발을 위한 동기부여를, 노인에게는 여가활용법을 제공하고 있다. 강남형 대형교회의 모델을 따르는 많은 교회들이 교회 공간에 카페와 같은 문화공간을 만들어 비교인들에게까지 친화적 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며, 어떤 교회들은 조기유학과 원정출산의 시대분위기에 맞추어 영어예배와 영어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취향과 필요에 따른 다양한 소비자 그룹에게 각각 맞춤형 서비스와 상품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포스트포드주의 기업의 전략과 매우 닮아 있다. 이제 기업은 소비자의 취향과 스타일 그리고 필요에 적극적으로 부합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듯이 교인들의 다양한 문제들과 필요들에 적절한 해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교회들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암묵적으로 강남형 대형교회 모델에 포함된 교회에 공유되고 있는 것 같다.

 

교회의 리더쉽에서도 강남형 대형교회 모델은 포스트포드주의 기업의 리더쉽의 성격과 많은 면에서 상동적이다. 강남형 대형교회들은 제왕적 담임목사의 리더쉽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교회의 조직들은 전문적인 사역을 담당하는 부서나 팀들로 이루어져있고 각 부서나 팀의 리더는 교회의 전임사역자들이 아니라 해당 분야에 전문적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평신도들이 맡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리더쉽이 분점되는 경향이 강남형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평신도의 사역자라는 개념이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는 포스트포드주의 기업이 상시적으로 고정된 역할만을 담당하는 부서제 보다는 필요한 과제에 따라서 유동성있게 대처할 수 있는 팀제를 선호하는 양상, 조직의 의사결정에서 팀의 권한을 확대하는 경향, 팀 내에서도 팀장의 일방적 결정보다는 팀원들 간의 상호 토론과 협의를 통해 결정하게 하는 리더쉽의 분점화 현상과 정확히 상동적이다.

 

포스트포드주의가 양질의 노동력 관리를 위해서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기계발과 평생학습이다. 다양하고 변화하기 쉬운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고 유동적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며 변화되는 경쟁환 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창의력, 혁신능력, 지식습득과 정보처리 등의 능력을 갖춘 노동력이 기업에게는 중요해진다. 기업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학습하는 노동자를 원하고 이를 위해서 평생학습을 도입하며,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요구한다. 그래서 자기 인생에 있어서 분명한 비젼과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다양한 동기부여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자기관리를 위한 노하우를 가르치고 있다. 기업의 이런 요구는 기업 내부의 노동자들을 뿐만이 아니라 예비 노동자들인 학생들, 미취업 청년들에게도 관철되고 있다. 외국어 능력검증, 금융관련 자격증, 컴퓨터관련 자격정, 인턴쉽 경험, 해외 연습 경험, 각종 공모전 입상경력 등등에 요즘 대학생, 미취업자들이 열을 올리는 현상이 보여주듯이 포스트포드주의의 노동력 관리 기법이 단위 기업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인생에 대한 비져닝과 목적 진술 그리고 이를 성취하고 실행하기 위한 동기부여 작업은 강남형 대형교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강북형 대형교회들은 인생의 성공을 강조하면서 주로 하나님의 일방적 축복을 강조하였다. 흔히 기복주의라고 비판되는 축복담론이 그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성공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 자기 노력 보다는 일종의 운과 비슷한 외부적 힘에 의한 것으로 가능하다고 선전했으며, 이 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기복행위를 제시했다. 그러나 강남형 대형교회는 그런 단순화된 기복주의를 인생의 성공을 위한 방법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강남형 대형교회들도 인생에서 성공을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공을 강조하는 방법은 대단히 세련되어 있다. 강남형 대형교회들은 비젼이라는 이름으로 성취동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비젼이란 곧 직업과 동일시되며 그때 직업은 주로 의사, 변호사, 비즈니스맨, 교수, 교사, 정치인, 고위공무원 등과 같은 전문직이다. 그리고 이런 전문직종, 다시 말해 세상에서 영향력있는 위치에 올라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할을 하라고 동기부여한다. 비젼은 다시 권력의 다른 표현인 리더쉽과 연결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이다.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축복만을 일방적으로 구하는 기복주의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기복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관리와 자기계발이 요구되는 것이다. 강남형 대형교회의 이런 비젼, 리더쉽 담론, 다시 말해 성공담론은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력 관리의 기독교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외에도 한국의 강남형 대형교회들이 포스트프드주의 기업과 닮은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도행전 29장을 쓴다는 명분하에 본 교회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을 지방의 지교회에서도 그대로 시행하여 지방의 교인들도 서울 못지않은 좋은 프로그램을 누리게 하겠다며 지교회를 개척하는 온누리 교회의 행태는 대표적인 포스트포드주의 프랜차이즈 기업 스타벅스의 매장관리 전략과 닮아 있다. 스타벅스의 매장관리 전략은 전 세계의 고객들이 시애틀 본점과 같은 맛, 향, 색깔, 소리를 느끼게 하는 것 이다. 그 외에 요즘 유행하는 교회 성장학 서적들이 포스트포드주의적 경영학 기법에 기초해 있으며, 『긍정의 힘』과 같은 책들이 정확히 자기계발담론의 자기경영론에 기반해 있는 등 오늘날 교회의 주류적 조직구성과 운영의 패러다임이 세속의 제도인 기업, 그것도 포스트포드주의 기업과 동일한 현상은 매우 많다.

 

우리에게 다른 나라들과 같은 왕을 주소서

 

나는 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개혁모델로 떠오른 주로 강남에 포진한 대형교회들, 즉 복음주의 교회들의 조직 및 활동의 기초가 포스트포드주의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강남형 대형교회, 복음주의 교회를 오로지 포스트포드주의라는 경제적 문제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 한국에서 복음주의교회의 등장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에 대한 신실한 반응의 맥락에서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교회가 조직되고 운영되는 방식 근저에 흐르는 원리와 에토스 그리고 무의식적 습속들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 없다면, 어느덧 교회를 개혁하고 쇄신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세속의 논리가 깊숙이 침투할 가능이 크다. 그리하여 어느덧 우리는 우리를 보존하기 이하여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이스라엘이 사무엘게에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알에서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다”(삼상8:19)라고 말하며 세상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의 조직패러다임이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길, 이스라엘의 활동 모델이 다른 나라들과 같은 것이 되길 그들은 원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욕망하는 것도 사시시대 말기의 이스라엘이 욕망하던 것과 똑 같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 없다. 과거에는 교회가 국가와 같이 되길 원했다면, 이제는 기업, 그것도 포스트포드주의 기업처럼 되길 원하는 것은 아닐까? 교회는 늘 세상의 지배적 기구에, 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에 자신을 동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세상과 교회의 분리를 교회의 문제로 삼아야 할까? 실제로 교인들의 문화적 습속을 생산하는 교회의 조직과 프로그램은 세상과 전혀 단절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교회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동화되어 있으며 세상과 공모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이 세상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세상과는 다른 원리에 의해서 운영되는 곳이라고 주장해왔다. 교회의 정체성은 세상과의 구별됨/거룩함 속에서 확인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세상의 질서와 논리에 의해 구축된 세상의 패러다임을 자신의 조직과 활동의 패러다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독특한 문화적 습속들, 가령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거나 서로에게 친절하고 따듯한 어투와 표정으로 대하려고 애쓰거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유아적 감수성으로 가득한 노래를 율동과 함께 부르거나 하는 행태들은 바로 교회와 세상의 상동관계, 공모관계를 은폐하는 하나의 기술이며 장치인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교회는 자신이 세상의 패러다임에 뿌리 밖고 있다는 것, 자신과 세상이 별반 다를 바 없는 질서와 원리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된다는 현실을 가리기 위한 장치로서 세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문화적 행태들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문화적 습속은 세상과 똑 같은 교회의 현실을 감추고 교회가 마치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환상을 갖도록 만드는 장치는 아닐까? 그리고 교회의 독단주의란 이런 환상을 깨트리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교회의 독특한 문화적 습속들, 감수성들, 행태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교회의 게토화라는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세상과 동화된 교회의 세속화라는 문제를 봐야하지 않을까? 마치 이방과 동일해진 이스라엘이 더욱 율법조항 나아가서 장로의 유전에 집착했던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