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집실

비평루트를 다시 시작하며(6호)

"…고난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시편 9:12)

"가장 선한 자들에게는 완전한 확신이 부족하나, 가장 악한 자들에게는 강한 열정이 충만하구나."(예이츠, 『재림(The Second Coming)』)


인간은 더 나은 시대를 꿈꾸며 진보한다고 여겼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시 뒷걸음질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보게 되는 현재입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를 완비하면 누구에게도 침탈되지 않고 제도 자체로서 기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87년 항쟁 이후 힘들게 만들어진 민주주의 제도는 여기저기 고장 났다는 신호와 더불어 제도의 실질적 의미가 붕괴하고 껍데기만 남은 세상이 되었다는 징후가 농후한 시대입니다. 절차적 정당성은 무너지고 권력을 쥔 결과가 절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시대입니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충성해야 하는 국가기관은 ‘정권’에 충성함으로써 민주주의 수호보다 기관의 보존과 개인의 입신양명을 쫓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부끄럽고 불법적인 일들이 법의 허점을 파고들, ‘모른다’와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단 두 마디로 도덕적 책임과 법적 책임 그리고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다 못해 정당화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익의 추구에는 강한 열정이 충만한 광기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기 마련 입니다(마가복음 4:22, 누가복음 8:17, 12:2, 마태복음 10:26) 그러나 드러난 것과 밝혀진 비밀조차 이념적 공격에 휩싸여 버립니다. 인간이 동물이 되지 않게 했던 개인차원의 양심과 사회차원의 정의는 무너지고, ‘동물이 된 인간’으로 살아가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위선과 거짓, 권력과 탐욕, 불법과 이익, 그리고 추함이 가득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선한 이들은 아직도 확신이 꺼져가는 가운데서도 확신을 버리지 않고 붙잡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의 강한 열정을 연약한 확신이 맞서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확신은 열정과 잇대어 존재하지 않고, 확신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의 견딤을 통해 확신은 언젠가 열매를 맺게 될 것 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비평루트>는 복간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비평루트>는 창간호2010, 2월 “‘속물’의 시대와 한국 기독교”, 3월 제2호 “그 신화들 너머의 기독교”, 4월 제 3호 “욥을 생산하는 경계도시”, 8월 제4호 “전태호의 오타쿠 이야기” 등 4호까지 발간되었다가 내부 사정으로 휴간 이였습니다. 이에 비평루트가 발간되지 못함을 계속 아쉬워 하다가 2013년 진영을 새로이 꾸리어 복간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헤르메스(Hermes)라는 제우스의 말을 전해주는 신이 있습니다. <비평루트>도 서로의 말을 나누는 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따라서 <비평루트>는 여러 편집위원들과 고정필진 그리고 자유기고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대화의 생성 또는 대화의 말걸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활동은 어떤 한 입장에 서서, 증명하기 보다 막무가내의 주장만 하는, 또는 설명하기보다 단순히 훈계하는 식의 글을 지양하고 대화의 참여자로서 다른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이야기 해보려는 시도입니다. 대화로서의 소통은 단순한 주장과 반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과 반론의 근거가 되는 출처를 밝히는 것에서부터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번 복간호의 몇몇 글들은 각주 달기를 시도하였고, 앞으로 좀 더 많은 글에서 그렇게 해보려고 합니다. 또한 각주 달기는 또 한명 스타 작가나 명망에 힘입은 글이 아니라, 글의 민낯을 보여줌으로써 훈계에서 대화로, 말함에서 들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평루트>에서는 말입니다. 따라서 <비평루트>는 각주를 다는 글과 비교적 각주에서 자유로는 에세이나 칼럼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운영될 예정입니다.


이번 복간호에서는 비평루트의 복간을 알리고자 몇몇 편집위원분과 몇몇 고정필진분들을 중심으로 글을 실었습니다. 복간호가 통일된 주제 하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부활했음”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글들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주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주제가 없다고 해서 낙서장에 끄적이며 한 번 보고 버리는 수준의 글들은 아닙니다. 기독교를 배후에 두고 현재의 한국 사회를 전방에 두고 살아가는 위원들의 고민과 시각이 담긴 글들입니다. 이 고민을 우리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홀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과 함께 대화하기를 소망합니다. 또 어떤 분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진 것이라 그 당연함 밖에 있는 또 다른 당연함의 세계(그 분에게는 이것이 낯설음이 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와 조우하는, 그 분에게 대화를 거는 말짓과 몸짓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글 한 두 편으로 타자의 인생이 축적된 어떤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하겠다는 허상도 아니며, 상호이해라는 거창한 이상도 아닙니다. 다만 서로의 시점교환 교환을 통해 서로가 이해를 추구하던지, 아니면 자신의 입장을 굳건히 하던지, 그 어떤 입장에서 서더라도 자신의 진실성에 대한 성찰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김승수님은 “신자유주의 시대, 어느 개신교 청년의 회심과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제목하에 자신의 M선교단체의 경험을 바탕으로, 회심자가 된 이후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정체성을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빌려 이야기 합니다. 통치성을 주체와 연결 지으며 M선교단체로 대표되는 개신교 담론과 신자유주의를 대비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정체성 구성을 주목합니다. 이를 통하여 자아의 정체성 중 잃어버리는 것과 신자유주의에 의해 채워지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선교단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다음에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되하는지 살펴봅니다. 울타리가 사라진 건 졸업한 대학생 뿐만이 아니라, 교회생활을 하지만, 교회 없이 살아가는 많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삶이라는 “행위”의 문제이기 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16:15)처럼 그리스도인의 “본질” 문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습니다. 우선 본고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 공개하지 않고, 연구방향과 방법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일정한 시간을 두고 계속 올라올 연재물이기 때문에 하나 하나 읽어보는 재미를 선사해 줄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김승수님의 글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먹보에 술꾼님은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불편한 진실, 무엇이 닭튀김을 거룩하게 만드는가?”라는 제목하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써주셨습니다. 로잔언약에 따른 기독교세계관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 축을 지향하고 있지만, 기실 복음전도가 사회참여를 배제하거나 은폐한다는 주장을 통해서 현실에서 기독교세계관이 오작동 되고 있는 지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세계관이 무엇이냐는 정의(definition)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세계관은 현실의 신앙체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기술(description)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작동을 지적함으로써 오작동이 단순한 개념적용상의 오작동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현실 신앙체계에서 성립불가능함의 반증을 보여주는 오작동인지, 즉 기독교세계관이란 진정으로 가능한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이는 1991년 「복음과 상황」의 창간 이후에 20년 넘게 복음주의 담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세계관을 돌아보게 하고, 기독교세계관을 수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인지 자문하게 해 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한국에서는 기독교세계관이 칼뱅주의에 치우진 면이 없지 않은데, ‘기독교세계관의 실패는 칼뱅 재현의 실패인지, 아니면 칼뱅주의는 교회의 신학으로는 충분하지만 과연 창조 세계의 신학으로도 충분한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세계관을 칼뱅주의를 넘어 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건 저에게 든 의문입니다. 이 글이 여러분에게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질문을 주었으면 합니다. 글의 자세한 이야기는 먹보에 술꾼님의 글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박치현님은 “신념, 냉소주의, 망상 그리고 기회주의”라는 글을 통해 현대 사회의 모습을 기회주의라는 키워드로 간략히 스케치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기회주의의 대립으로 신앙의 역할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짧은 쪽글이니 읽기에 부담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글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과 이를 둘러싼 사회의 자리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글의 분량과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자아와 사회의 편린을 반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Father Brown님은 체스터턴Chesterton, Gilbert Keith이 쓴 『The Book of Job』(1916?)을 번역해 주셨습니다. 체스터턴은 영국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작가에 머무르지 않고 토지분배를 옹호하는 『세상의 잘못된 점』(1910)등 여러 사회비평을 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종교분야에서 『정통주의』(1909), 『영원한 인간』(1925), 『성 토마스 아퀴나스』(1933)등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체스티턴은 욥기에서 철학적 문제를 발견하고, 문학적 서술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체스티턴의 표현에 따르면 욥은 “최악의 운명을 만난 최고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욥은 삶의 모순적인 모습을 극대화시켜 보여줍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은 기계적 낙관주의자인 비관주의자들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은 근대 이성의 열매인 낙관론과 비관론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임동식님의 글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태호님은 “한국교회의 키워드”라는 글을 통해 일본 기독교 잡지 <Ministry>의 2013년호 여름에 실린 ‘이웃나라의 기독교-한국편’에 실린 한국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지식으로서 “기복신앙”, “군목”, “사모님”, “민중신학”, “단기선교”, “이단”등 6가지 키워드를 번역해 주셨습니다. “민중신학”이란 단어를 제외한 나머지 단어들은 한국의 교회들이 교회의 본질인 일치, 거룩, 사도, 보편이라는 것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줍니다. 다섯 단어들은 한국교회가 서 있는 자리를 외부의 시점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짧은 단어들이지만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키워드로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꼽고 있고, 어떤 단어들이 꼽혀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갱님은 “자기 계발을 넘어 만남의 계발(啓發)로 춤추다 — 그래픽노블 <폴리나> 평론”이라는 제목하에 현 시대에 유행하는 멘토링을 통한 자기계발에 대하여 일침을 놓고 있습니다. <폴리나>의 주인공 폴리나는 춤을 배우는 학생입니다. 이 춤은 폴리나에게 말로 하는 대화와 더불어 자신을 표현하는 대화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대화-춤은 한 쌍을 이룹니다. 또한 그래픽노블은 그 작품의 특성상 그림-말풍선이 한 쌍을 이룹니다. 그래픽노블의 독해는 바로 이 쌍들을 “왔다 갔다”하는 방법으로만 제대로 독해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갱님은 세밀하게 폴리나의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에 감추어진 쌍을 독해해냅니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멘토링을 통한 자기계발이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자아의 편린을 어떻게 상실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 자아의 상실과 대체를 성공이라고 여기고 있는 멘토링 담론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래 계발(啓發)이란 단어는 『논어』의 「술이편」에 나오는 말로 “배우는 사람이 발분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불분불계(不憤不啓), 애태워 갈구하지 않으면 펼쳐주지 않는다: 불비불발(不悱不發)”의 끝자를 따와서 만든 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계발(啓發)은 멘토라는 타자보다 본래 주체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갱님의 글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Francis님은 “영·미 법철학에서 법개념 소고: 하트(H.L.A Hart)의 『법의 개념』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통해서 ‘법이란 무엇인지?’ 라는 법개념 자체에 대한 하트의 이론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식의 차원에서는 법 없는 듯 살면서 동시에 현실에 차원에서는 법 없이 살수 없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묻기 전에는 안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인지 물으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법 역시 우리는 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법이 무엇인지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법의 정치적 기능 등 법현상을 법이라고 이야기 하곤 합니다. 프랜시스님의 글을 통해서 법의 기능적 이해가 아니라, 법의 개념이란 무엇인지 들어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편집위원들의 여러 글을 통해 <비평루트>가 복간함을 여러분에게 고합니다. <비평루트>는 제기되는 문제에 답을 내는 장이 아니라, 대화의 구성으로, 말 걸기의 주체로, 들음의 주체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이들의 말할 수 있는 사랑방으로 그렇게 여러분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며 동행하는 사회소통의 장이 되고 싶습니다. 글과 말의 홍수가 넘쳐나는 시대에 또 하나의 글을 더하는 것은 아닌지, 읽지 않아도 될 글들을 읽으라며 또 다른 홍수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한편으로는 걱정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소망 가운데 여러분 앞에 섭니다. 함께 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3년 9월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 보며,

비평루트 편집장 오민용

salt73@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