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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비평루트 제9호를 발간하며




막스 베버가 탈주술화라는 근대의 합리성을 주장했을 때 종교에 터 잡은 사고가 아닌 이성에 터 잡은 사고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사고의 핵심 중 하나는 계산 가능성입니다. 이 계산 가능성으로서의 합리성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현대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홉스가 인간을 본성상 서로에 대한 늑대라는 투쟁상태라고 묘사한 사상 역시 현대인의 내면에 자리 잡았습니다. 모두 근대 이성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서로에 대한 친구라고 바라보았습니다. 따라서 현대에 강조하고 있는 연대의 개념, 환대의 개념은 새로이 창발 되었다기보다, 이성 세계의 구축에 따른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대가 전제하는 계산가능성으로서의 이성과 서로 적대하며 투쟁하는 인간상은 이성적 언어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언어를 배제한 언어입니다. 이성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정복을 당연시 해온 서구의 역사를 반추해 볼때 근대의 서양사적 측면은 일종의 이성의 제국주의적 활용이었던 셈입니다.

 

현대 사회의 종교와 사회의 문제 역시 이 지점에서 일어납니다. 종교의 언어로 이성의 언어를 압제하는 것과 이성의 언어로 종교의 언어를 압제하는 것 이 두 가지(정확히는 종교의 언어이고 세속의 언어이지만,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만, 두 체제의 밖에서 서로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종교는 비합리성의 영역에 있고, 세속화된 현대성은 이성의 영역에 있다고 여깁니다. 이 부분에서는 생각해 볼 것이 많이 있지만, 사회의 통속적 용법에 따라 이렇게 표시합니다. 세속화라고 쓰면 언어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뜻으로 받아들여 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는 언제나 현실을 비참한 모습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사회의 분화도 사회의 통합도 아닌 영역전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배제해야할 타자가 만들어지곤 합니다


비평루트는 이성(세속)의 언어와 종교의 언어 둘 다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부담이 큽니다. 이성의 언어를 사용 할 때는 종교의 언어를 사용하는 그룹에 대해서 평소 보다 조금 더 많은 논증의 의무를 지며, 그 반대 일 때는 종교의 언어를 조금 더 많이 논증해야 하는 의무를 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화자가 이 논증의 의무를 조금 더 부담할 때 청자 역시 조금 더 깊게 경청해야 하는 의무를 부담하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발화가 대화로 성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버마스가 말한 대화의 성립요건 중 논증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양 쪽에 다 부담을 강하게 더 지우는 이런 대화방식을 비평루트가 포기 할 수 없는 이유는 이성과 종교의 각기 고유한 언어 사용을 포기 하지 않을 때,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를 통해 세계를 열어 보이는 언어의 세계 개시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가 이성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서로 각기 존재하고 있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이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들이 서로의 지평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한 세계가 다른 한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심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약 반세기 전에 말한 동일성의 강제는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상태입니다.

 

편집장으로서 비평루트를 통해 두 세계의 지평이 소통할수 있는 다리 놓는 작업을 시도해 보곤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비평루트를 준비할 때마다 부담감은 갈수록 커집니다. 비평루트가 이제 계간지로서 정기적인 발간은 자리를 잡았지만, 다루는 주제가 다양해질 때마다, 발행되는 호가 늘어날 때마다, 말함의 자유 보다 말함의 책임에 대한 부분이 더욱 그렇습니다. 비평루트 제9호 발간이라는 기쁜 마음 속에 이런 부담감을 한쪽에 안고 세상에 내놓습니다. 많이들 읽어 봐주시고 애정 어린 충고도 주시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6월 더운 어느 여름날

주님의 평화.

비평루트 편집장 오민용 드림.

salt73@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