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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최경환

우리는 어디에서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가? :본회퍼와 대항공론장



                                        (작전명 - 하얗고 차가운 것을 위하여_옥인콜렉티브_2011)


우리는 어디에서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가?

:본회퍼와 대항공론장

 

최경환

 

예수 그리스도: 현실과 책임이 만나는 곳

 

본회퍼의 윤리학기초’(foundation)구성’(construction)이라는 두 개의 큰 주제로 나뉠 수 있는데, ‘기초현실개념과 상응하고, ‘구성책임개념과 상응한다.[각주:1] 따라서 현실책임은 본회퍼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제이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다. 본회퍼는 책임적으로 행동하는 자의 행위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현실에 적합하다고 말했다.[각주:2] 그는 윤리의 근거를 항상 구체적인 현실에 두었다. 윤리는 어떤 가능성이나 잠재력, 혹은 보편적인 형식이나 토대가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인 계시”(concrete revelation)로 나타난다. 이 구체적인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의 현실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현실에 적합한 모든 행동의 근원이다.[각주:3]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와 현실의 매개자이자, 인간과 자연과 역사의 중보자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타자를 위해 책임을 지는 삶이었다고 한마디로 평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하나가 되었다면, 책임을 지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이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고 형성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분의 모든 생애, 행동, 수난은 대리다.”[각주:4]

 

본회퍼의 대리행위개념은 다양한 윤리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각주:5]. 우선, 본회퍼는 대리행위를 통해 사랑자유를 연결했다.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발견한다.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책임의 내용은 사랑이며, 그 형태는 자유다.”[각주:6]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존재다. 몰트만이 지적했듯이,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는 어떤 윤리적 규범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이다.[각주:7] 그러므로 예수의 대리행위는 본회퍼의 사회윤리에 있어서 궁극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행위가 모든 인간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계명을 완성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타자의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도록 부름 받았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책임있는 행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리행위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윤리적 함의는 바로 타자의 죄를 짊어지는 것이다.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타자를 향한 자유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기에, 책임있는 행동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본회퍼의 책임 개념을 이해함에 있어 타자를 위해 기꺼이 죄를 짊어지신 예수의 행위는 기독론적 근거로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또한 타자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본회퍼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글에서 책임 개념을 고통을 짊어진다는 것과 연결해서 설명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보호하시며 자신의 완전한 능력을 계시하시는 분은 세상 안에서 묵을 곳을 찾지 못하시는, 세상에서 추방을 당하신 말구유와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시며,[각주:8] 우리는 그분을 불의와 조직적인 사기와 비인간성과 폭력가운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각주:9] 따라서 본회퍼는 이 땅에서 정의와 진리, 인간성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게 되며,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도 받게 된다고 말한다.[각주:10] 본회퍼는 심지어 우리가 정의와 진리와 인간성을 위해 투쟁하고 고난을 받는 자들처럼 의로운 자가 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각주:11] 따라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이웃은 단지 책임적 행동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바로 책임적 행동을 위한 근원이자 근거이다.[각주:12]

 

책임은 반드시 ‘~를 향한책임이기에, 그것은 항상 외부를 향한 역사성을 담지한다. 퇴트(Tödt)가 말한 것처럼, 윤리의 과제는 이러한 사랑, 자유, 책임을 내면화한 새로운 인류에 참여하는 것이고, 대리행위를 계속해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다.[각주:13] 따라서 우리는 항상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구체적인 이웃과 타자를 향해 실천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책임있는 응답을 방해하는 이원론적 사고와 사회문제를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내면적이고 사적인 신앙에 저항해야 한다.

 

그래서 본회퍼에게 있어서 윤리학의 과제는 다름 아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도록도와주는 것이다.[각주:14] 홈즈(Holmes)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윤리학에서 본회퍼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는 바로 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는 장소이다.[각주:15] 본회퍼에게 윤리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이고, 그것은 스스로 한계선을 설정하며, 자신을 청종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각주:16] 이렇게 타자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본회퍼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다면, 그가 오늘날 우리들의 정치적 사유에 공헌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공론장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일 것이다.

 

공론장: 새로운 상상력을 만드는 곳

 

공론장’(public sphere)에 관한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하버마스의 영향력 있는 저서인 공론장의 구조변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공론장은 어떤 특별한 공적 장소나 실행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공적인 의견들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공간을 뜻하며, 동시에 정치세력이나 시장에 저항할 수 있으며, 동등한 참여자들이 어떠한 협박이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서로 비판적인 논의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각주:17] 하버마스가 비록 그의 후기 저서에서 이러한 공론장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이러한 개념들을 보다 확장해서 발전시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사회의 합리화에 대한 규범적 관념들, 인간의 삶이 함께 구성된다는 의사소통 행위론, 정치와 법과 도덕성, 그리고 공공선, 수용과 배제의 공적 실천들의 근간이 되는 공적 담론의 윤리를 강조한다. 한마디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토의를 통한 공적 담론의 형성과 정보의 보존, 다름과 타자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공적 의견 교환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공론장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로 압축되는데, 하나는 하버마스가 제시한 공론의 정당성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유효성에 대한 것이다. 프레이저(Frazer)공론장에 대한 재사유를 통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을 비판한다.[각주:18] 그녀는 시민사회 내에 존재하는 불평등이 공론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다. 공론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유보하고 모든 이들이 마치 동등한 사람인 것처럼 토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판한 것이다. 그녀는 시민사회 내에 존재하는 계급적 불평등과 신분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배제하거나 주변화하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분석했다. 프레이저는 불평등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 발언권의 불평등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르주아 공론장의 근본적인 특징들에 도전하고, 이에 대한 저항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하위주체인 저항적 대중들의 확산이 계층화된 사회 속에서 새로운 대항공론장을 창출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진정한 공론장은 참여 당사자들이 비록 출신과 주어진 조건이 다르다 할지라도 마치 그들이 사회적, 경제적 동료인 것처럼 여겨주는 것이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각주:19] 대안적인 공론장은 주변화된 여성,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 빈곤층, 종족적-인종적 소수자, 종교적 소수자들을 수용하고, 그들을 동등한 동료로 공론장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공론장을 서발턴 대항공론장”(subaltern counterpublics)이라 부르고, 이들을 통해 기존에 논의되고 있는 공론장과 대등한 대항담론을 창출하고자 한다. 이 대항담론은 자신들의 정체성, 관심, 그리고 필요에 대한 새로운 의제를 제시함으로 정식화된 논의들을 전복시킨다.[각주:20] 서발턴 대항공론장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기존의 공론장으로부터 후퇴해서 이를 재결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보다 넓은 공론장을 만들기 위한 여론을 훈련하고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이 두 기능의 변증법이 해방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프레이저에게 참여란 바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공론장에서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공론장은 어떠한 문화적 표현의 형식도 용인되고 수용될 수 있는 호혜의 공간이어야 한다.[각주:21] 궁극적으로 그녀가 제시하는 공론장은 사회적 평등,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참여적인 민주주의가 결합된 공간이다.

 

프레이저는 흥미롭게도 대항적인 공론장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브룩스-히긴보탐(Brooks-Higginbotham)의 연구를 소개하는데, 그녀는 1880년부터 1920년까지 미국에서 흑인 여성들이 자신의 공론장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분석한다.[각주:22] 브룩스-히긴보탐에 의하면 그 시기에 흑인들은 투표권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백인들로부터 배제를 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대안적인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흑인교회였다는 것이다. 공론장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흑인들은 교회에서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었고, 다양한 목소리를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암울했던 미국의 공론장의 역사에서 교회가 한 줄기 희망을 제공했고, 흑인들의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교회: 낯선 자들을 맞아들이는 곳

 

본회퍼의 윤리학이 제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윤리적 행동이 일어나는 장소는 어디인가?”로 집약된다. 그는 항상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윤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구체적인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윤리이며 책임이라고 말한다. “책임적 인간은 구체적 현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이웃을 지향한다. 그의 행동은 처음부터, 그리고 영원히, 원리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주어진 상황과 더불어 생겨난다.”[각주:23] 그래서 본회퍼는 지속적으로 다른 장소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신학적인 사유를 구성했다. 실재를 관통하는 이 모든 구체성’(concreteness),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흔적이다. “궁극적 현실에 대한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계시의 현실 한복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각주:24] 하나님의 계시가 세상 안에서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계시의 본질인데, 이 계시는 바로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를 통해 가시화된다.

 

만약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세상 안의 영역을 요구하신다면, 하나님은 이 좁은 공간 안에서 동시에 세상의 모든 현실을 포괄하시며, 세상의 궁극적 토대를 계시하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증언되고 선포되는 세상 안의 장소, 곧 영역이다.[각주:25]

 

따라서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을 넘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고, 하나님의 은총(선물)을 세상에 증언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서 낯선 자로 존재하며, 동시에 낯선 자들을 맞아들이는 장소가 된다.[각주:26] 교회는 구체적인 장소를 점유하는 특수성을 고수하면서도 세상을 향하고 모든 세상의 현실을 끌어들이는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배제에 눈을 감아버리는 교회는 가장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임이며, 배제된 자들과 목소리를 잃어버린 자들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교회는 자신들의 목소리만을 반복하는 자폐적인 공동체일 것이다. 갈등과 투쟁의 공론장에서 슬그머니 뒤로 빠져 자신들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머물려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본회퍼의 일갈은 오늘날 우리를 향한 충고일 것이다.

 

공공연한 논쟁을 회피한 인간은 개인적 미덕이라는 피난처에 도달한다. 그는 도둑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힘을 다해 선을 행한다. 하지만 공공성을 임의로 포기한 그는 자신을 갈등에서 보호해주는 한계선을 정확하게 지킬 줄 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의 앞에서 눈과 귀를 닫을 수밖에 없다. 세상 안의 책임적 행동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순수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반드시 자기기만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비록 그가 온갖 일을 행하더라도, 자신이 행하지 않은 일 때문에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안 때문에 파멸하거나, 가장 위선적인 바리새인이 될 것이다.[각주:27]

 

교회는 타인이 처한 박해와 고난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발견한다. 우리는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은 인간실존을 위한 공공의 영역을 피해 사적이고, 개인적인 장소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이 세상과 다른 또 하나의 영원한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남은 고난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없이 모든 이들에게 확장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랑의 빛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현실을 증언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맥브라이드(McBride)는 세상의 죄를 온전히 감당하고 수용하는 것이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이라고 말한다.[각주:28]고백회개라는 공적 증언을 통해 교회는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변혁에 참여하게 된다. 교회의 공적 역할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고 인간들과 연대함으로 기독론에 근거한 회개와 죄 고백의 윤리를 만드는 것이다.[각주:29]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걸어간 길에 참여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타인의 죄를 짊어져야만 한다.

 

공론장은 다양한 환경과 상황 가운데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시당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의사소통 합리성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유연하고도 넉넉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론장의 중요한 정치적 가치는 바로 배제에 대한 저항이다. , 공론장은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공간이며, 사회가 만들어 낸 은밀한 배제의 구조로부터 밀려난 자들을 위한 자리까지 마련해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각주:30] 자신의 필요에 대해 외부로부터 부여된 해석을 문제 삼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의문시하며, ‘정상이 아니다,’ ‘열등하다는 식으로 폄하되어 왔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으로 다시 설정하는 것, 다시 해석하고, 다시 정의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대항적 공론장의 역할이다.

 

공론장에서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의견에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준다는 경험, 적어도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지 않는 경험이 중요하다. 자기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는 수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 시대에 필요한 공론장이다. 암울하고 우울한 한국사회에 교회가 이런 희망과 대안적인 장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찾아주고, 그들이 다시금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새로운 상상력을 꿈꿀 수 있고, 사회에서 배제되고 밀려난 이들이 편하게 안식할 수 있는 교회, 누구도 자신들의 편이 되어 싸워주지 못할 때 그 짐을 대신 지고 함께 싸워 줄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를 기다려 본다

  1. Larry Rasmussen, “The ethics of responsible action.” ed. John W. de Gruchy. The Cambridge Companion to Dietrich Bonhoeff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215. Hans Pfeifer, “Ethics for the Renewal of Life: A Reconstruction of Its Concept,” ed. John W. de Gruchy, Bonhoeffer for a New Day: Theology in a Time of Trans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7), 143. [본문으로]
  2. 본회퍼, 『윤리학』, 265. [본문으로]
  3. Ibid., 275. [본문으로]
  4. [/footnote] 본회퍼에게 책임적 행동은 대리적 행동(vicarious representative action)이다.” 대리적 행동의 핵심은 바로 전적으로 다른 인간들을 위해 사는 삶이다.

     

    대리적으로 책임지는 모든 행동은 이렇게 죄 없이 죄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런 행동은 책임적이다. 이런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다른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현실적 인간을 향한 이타적 사랑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인간의 죄책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들의 죄책을 친히 감당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적으로 행동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footnote]Ibid., 279. [본문으로]

  5. Ulrik Becker Nissen, “Responding to Human Reality: Responsibility and Responsiveness in Bonhoeffer’s Ethics,” ed. Jens Zimmermann and Brian Gregor, Being Human, Becoming Human: Dietrich Bonhoeffer and Social Thought (Oregon: Pickwick Publications, 2010), 202f. [본문으로]
  6. 본회퍼, 『윤리학』, 276. [본문으로]
  7. Jürgen Moltmann, Herrschaft Christi und soziale Wirklichkeit nach Dietrich Bonhoeffer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59), 23. [본문으로]
  8. 본회퍼, 『윤리학』, 417. [본문으로]
  9. Ibid., 415. [본문으로]
  10. Ibid., 416. [본문으로]
  11. Ibid., 418 [본문으로]
  12. Ibid., 322. [본문으로]
  13. Heinz Eduard Tödt, “Conscientious Resistance: Ethical Responsibility of the Individual, the Group, and the Church,” eds. J. D. Godsey and G. B. Kelley, Ethical Responsibility: Bonhoeffer’s Legacy to the Churches (New York: Edwin Mellen, 1981), 24. [본문으로]
  14. 본회퍼, 『윤리학』, 445. [본문으로]
  15. Christopher Holmes, “‘The Indivisible Whole of God’s Reality’: On the Agency of Jesus in Bonhoeffer’s Ethics,” International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12:3 (2010), 301. [본문으로]
  16. 본회퍼, 『윤리학』, 467. [본문으로]
  17. Dirkie Smit, “Notions of the Public and Doing Theology,” 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Theology 1, 2007, 433. [본문으로]
  18. Nancy Fraser, “Rethinking the Public Sphere: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Actually Existing Democracy,” ed. Craig Calhoun, Habermas and the Public Sphere (Cambridge, MA: MIT Press, 1992), 117-129. [본문으로]
  19. Nancy Fraser, Justice Interruptus: Critical Reflections on the “Postsocialist” Condition (London: Routledge, 1997), 77. [본문으로]
  20. Ibid., 81. [본문으로]
  21. Ibid., 83. [본문으로]
  22. Ibid., 75. [본문으로]
  23. 본회퍼, 『윤리학』, 311. [본문으로]
  24. Ibid., 40. [본문으로]
  25. Ibid., 58. [본문으로]
  26. Ibid., 64. [본문으로]
  27. Ibid., 79-80. [본문으로]
  28. Jennifer M. McBride, The Church for the World: A Theology of Public Witnes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13. [본문으로]
  29. Ibid., 82-83. [본문으로]
  30.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사이』, 서유경 역 (푸른숲, 2005), 1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