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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공동체의 ‘르상티망’(ressentiment)

 

최경환

 

 

그 어떤 신학자도 스탠리 하우어와스(Stanly Hauerwas)만큼 세속적인 정치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원한감정(resentment)을 불태웠던 사람은 없다.”


Jeffrey Stout, Democracy and Tradition, p. 140.

 

 

I.

니체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정서를 르상티망’(원한감정; ressentiment)이라 명명했다. 이 감정은 약자의 질투와 패배자의 시기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승자를 마음속으로 인정치 않는 원망의 뜻이 그 속에 담겨 있다. 그럼으로 약자는 자신이 증오하고 미워하는 상대방의 표상을 배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다흔히 우리는 가난이 싫어서공부가 싫어서부모님이 싫어서, 이를 악물고 성공하려고 하고부자가 되려고 하고, 좋은 부모가 되려고 한다한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이라는 정서도 이런 원한감정에 다름 아니다어쩌면 이러한 정서적 에너지가 타자의 아픔과 고통을 인식하는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가 이런 원한의 감정을 해소하는 방식은 안타깝게도 근대화의 부정적인 요소들, 즉 지나친 경쟁의식과 승자독식의 세계관과 결합되었고, 이는 개인과 사회를 철저하게 타자와 분리하면서 배제시키는 무서운 폭력성으로 드러냈다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지역주의와 민족주의는 그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세속화와 근본주의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샴쌍둥이가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서로의 원한감정을 자양분 삼아 상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한감정은 최근에 대안적인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신학자들에게도 발견된다. 근대성의 폐해를 낱낱이 파헤치면서 세속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자신들만의 순수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교회론적 윤리학자’(ecclesial ethicist)에게는 일종의 원한감정이 숨어있다.

 

어쩌면 대안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신학의 출발점은 ‘르상티망’이 아니었을까그들에게 신학의 출발점과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치 ‘어떻게 하면 세상과 다른 이질성을 드러내는 공동체를 세울 것인가?’에 매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세상세속성근대성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세상과 다른 그 무엇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를 고집하고 ‘우리’를 내세우는 가운데그러한 ‘자기’와 ‘우리’를 왜곡하고 모욕했던 논리에 매몰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계속해서 세상과 다른 대안 공동체를 세우고순수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하우어와스의 욕망 속에는 스타우트가 지적한 것처럼 원한감정이 자리잡고 있다. 만약 우리가 타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자신의 주체성도 건강한 방식으로 확인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우리의 자기주장은 타자를 증오하는 분노의 표출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어쩌면 이러한 증오 표출은 역설적으로 그가 그토록 닮기 싫어하는 근대적 식민주의의 한 효과일 수 있다.

 

 

II.

근대성 비판이 하나의 유행처럼 인문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연구주제로 부상하면서, 이에 기대어 섣불리 ‘근대성=서구적=제국적’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통해 근대성을 단선적으로 비판하는 신학자들도 늘어나고 있다모든 문화와 사상이 그렇지만 근대성이 가져온 결과와 성과는 일방적으로 긍정되거나 비판될 수 없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사유체제이다몇 가지 단순한 논리로 근대성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도 경솔한 태도다근대화를 단순히 경제적 발전과 물질적 풍요로 환원시켜 이해하고서구 제국주의의 동일성의 논리그리고 자본주의 산업화의 이데올로기로만 이해하게 되면우리는 근대화가 가지고 온 소중한 가치들예를 들어 찰스 테일러가 복원하고자 하는 인민 주권공론장진정성의 윤리를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물론짧은 시간 한국에서 보여준 근대화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귀결되는 속물 유물주의와 통속적인 공리주의적 이념과 가치관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래 근대화가 이루어낸 인간의 자유와 인민주권그리고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은 그 발생이 단순히 서구의 제국주의와 함께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그리고 한국의 근대화가 가져온 수 많은 부작용과 폐해들로 인해 무조건 비판해야만 할 것들이 아니다

 

동일성의 철학 위에 세워진 근대의 어두운 그림자는 타자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논리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 나갔다. 사실 이는 서양의 오래된 전통 속에 내재되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성의 원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는 동일한 것은 단지 동일한 것에 의해서만 인식된다고 말했으며, “진정한 친구관계는 동일성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한마디로 유유상종이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인식의 딜레마는 우리가 동일하지 않은 것, 타자를 도무지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모든 인식은 본래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하거나 재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이런 인식의 원리를 확대해서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에 의해서만 인식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해 나갔지만, 결국 이 모든 인식의 근거와 출발점은 자신의 내부 세계에 대한 공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유유상종의 인식의 원리는 안전하고 편안하다. 우리는 다른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상이한 것과 이질적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회피한다. 굳이 모험을 감행하면서까지 타자를 인식하려고 하질 않는다. 우리는 자신과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확보할 때라야 비로소 조심스럽게 자신을 개방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친구는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런 친구관계는 당연히 폐쇄적인 친구들로 구성된 동일집단의 증식이며, 패거리 문화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갚는다는 인과응보의 정의론이 도출되기도 한다. 결국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노예는 동일집단이 아니기에 동일한 정의와 인권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동일한 집단은 자신들과 다른 타자를 배척하고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신들은 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한다. 동일집단은 이렇게 끊임없이 적을 규정하고,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자신들의 순결을 지켜 나간다. 결국 이렇게 동일성의 인식은 새로운 지식을 얻기 보다는 자신이 아는 것만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나르시스적인 자폐적 인식이다. 하지만 이렇게 동일성의 원리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서운 것은 타자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든가, 억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무시 무시한 감시의 눈으로 검열하기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같은 동일집단끼리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함으로 자기파괴의 길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마치 한 마을에 사는 이웃집 사람들끼리 서로를 간첩으로 의심하면서 살아가야만 했던 반공세대의 어두운 시대처럼 말이다.

 

하우어와스를 위시한 대안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교회가 이 세상 가운데 있는 인간 사회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면교회는 세상과의 건강한 소통과 대화를 통해 비판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야만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세상과 똑같아졌다는 위기의식 아니라, 교회가 건강한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교회의 세속성과 세상의 거룩성’을 동시에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지고 있을 때오히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세상이 싫어서세상처럼 되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 나라의 이념을 온전히 담아내는 교회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일면 고상하고 숭고한) 교회론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세상에 대한 원한감정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교회를 세상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증오의 감정에 기초한 평화주의 공동체라는 괴물을 만들 수도 있다.

 

Last Supper, by Sieger Köder


III.

건강한 교회론은 세속성이라는 반대자의 초상이 우리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이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때 만들어진다세상을 향한 비판만큼이나 교회 내부를 향한 비판에 항상 열려 있어야 교회는 자정능력을 갖출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세상의 현실을 교회의 현실로 끌어안아 품어낼 수 있어야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교회를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회퍼의 교회론은 우리에게 새로운 빛은 던져준다일반적으로 대안적인 교회론의 이론적 근거로 본회퍼가 자주 언급되곤 하는데, 이는 본회퍼의 한 모습만을 부각시킨 것이다물론 본회퍼는 기존의 교회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양식과 형태를 제시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나중에 비종교적 해석과 성숙한 세계에 대한 급진적인 사고를 통해 기독교가 세속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변형되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그의 교회론은 창조의 선함을 지나치게 긍정하는 신칼빈주의자들과도 다르고세상의 타락과 세속성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한 대안공동체의 교회론과도 다르다그는 세상을 그리스도의 현실로 해석하고세상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실천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서구의 근대성과 이에서 비롯된 문화 제국주의를 긍정하고 수용하자는 이야기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우리의 투쟁은 이러한 세계화와 근대화의 잘못된 표상과 결과들을 구속하고 회복시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이 과정에서 ‘우리’도 ‘그들’도 새롭게 변화되고 변혁되어야 한다. ‘그들’만의 과오를 비판하고 지적하면서 ‘우리’를 그와 다른 순혈주의적 공동체로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뒷모습에 감추어진 반대자의 표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성서의 말씀은 완전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론이 어떻게 원한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교회와 세상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우리의 인지기관이 쉽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우리의 인식과 감각들이 다른 것, 이질적인 것,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되면 가장 먼저 고통이 생겨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질적인 것에 대한 저항을 감지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른 외부세계에 대해서 반감을 느끼며 반대의사를 드러낸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변화의 소용돌이에 내맡기겠다는 것이고, 이는 잠재적인 위험과 모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겠다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앎과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고통을 감내하고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한 사람은 새로운 인식의 차원에 접어 들면서 인식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배움의 과정은 이러한 변화의 아픔과 새로운 통찰의 기쁨을 수반한다.

 

순수한 하나님의 대안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은 그 고상한 이념과 가치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타자성을 모두 벗겨내자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역사와 문화 속에 깊숙이 내재화된 교회가 폭력적인 세계화와 물질주의에 저항하는 방식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세속성)를 배제하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정체성의 형성은 이미 타자와의 긴밀한 관련 속에서 형성되어 있으며결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세상의 현실과 소통하면서 교회의 존재양식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대안공동체의 비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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