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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자아에 대한 사회적 통념

연예인들이 토크쇼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는 모습은 대중들에게 이제 꽤 익숙한 장면이다. 근래의 세월호 참사와 6.4 지방선거 과정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몽준 전 서울 시장 후보의 눈물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고승덕 전 교육감 후보는 "딸아 미안하다!"라는 눈물어린 (헤비메탈!) 외침으로 그 (잠정적)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했다. 공적영역에서 유명인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감정을 노출할 때, 대중들이 느끼는 감정은 대체로 양가적이다. 저 이의 가장 진실된-흔히 '인간적'이라 일컬어지는-내면을 엿봐버린 같은 묘한 희열, 어느덧 다가오는 친밀감, 그러나 혹시 연출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 유명인사들의 감정 노출을 미디어 앞에서의 작위적인 이미지 연출로 보는 쪽도 있고, 강력한 감정의 추동이 제어되지 못한 채 그 이의 진실된 내면이 드러난 것으로 보는 쪽도 있으나, 양자 모두 감정이야말로 가장 강력하면서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개인 내면의 '진짜배기'라는 어떤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ies)을 공유한다. 감정과 자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통념은 관료제, 시장, 종교 기관 등과 같은 사회 체제에 의해 부과된 공적/사회적 규범이 인간 내면의 진정하고 자연스러운 자아의 표현(주로 '감정'으로 이해되는 그것)을 억누르고 있다는 생각과 한 쌍을 이룬다. 

감정에 대한 위와 같은 사회적 통념은 몇몇 근대적 이분법들에 기반하고 있다. 감정을 제어해야만 하는 '공적영역'과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것이 허용되는 '사적 영역.' 문명화와 사회화를 거스르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이해되는 '감정'과 공적 영역에서 합리성을 갖기 위해 그러한 동물적 본능을 제어하고 관리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성.'[각주:1] 사회적 역할 수행을 요구하는 '외적 형식들(outward forms)'과 아직 사회의 통제와 억압에 손상되지 않은 채 개인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감정과 거의 동일 시 되는- '내적 자아(inner self)'와 같은[각주:2], 가히 근대적 신념이라 불릴만한 이분법들이다. 이 때, 감정은 학습된 것이라기보다 인간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동물적 본능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개인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 '사이에' 존재하기 보다는 개인 '안에' 갇혀진 내적 상태 혹은 개인에게 '소유된'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이해 가운데, 종종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우리 안에도 그와 비슷한 감정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을 내적으로 느낄 때, 서로 공감하고 있다고 느낀다. 더 나아가 그러한 감정의 공유를 깊은 내면의 만남으로 이해한다. 


 

감정노동 개념이 전제하는 것 

학계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개념이 되어가고 있는 '감정노동'이란 용어는 감정에 대한 위와 같은 통념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어떤 부분은 문제 삼지 않는다. 주류언론이나 대중매체들은 특히 무례한 소비자나 가혹한 관리자 때문에 고통당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의 사회적 경험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본래 헉쉴드(Arlie Hochshild)가 '감정노동'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을 때(1979)는, 단지 서비스 노동 상황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상품화만을 지칭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상황 속에 있는 개인 주체가 사회적 규범으로서 요구되는 감정법칙들(feeling rules)에 따라 자신의 감정의 질(quality)이나 정도(degree)를 변화시키려는 일반적인 노력들을 일컫는 말이었다.[각주:3] 예를 들면, 결혼식이나 생일파티, 장례식에서 사회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감정의 법칙들에 따르려는 개인주체들의 모든 노력들이 감정노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감정 노동이란 개념은 최소한 어떤 감정들은,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으로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추론된 사회적 전략으로서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게 됨을 전제한다. 또한 공적 영역으로 기대되는 '시장'이 부여하는 고용-노동의 관계가 사적 영역으로 이해되어온 개인 내면의 감정을 구성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성적인 혹은 감정이 지양된) 공적영역과 (감정적인) 사적 영역이라는 통상적 구분을 재고해야할 필요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개념은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는) 감정의 사회적 구성성을 드러내면서도 감정과 자아에 대한 진짜/가짜 구분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는다. 널리 알려진 항공승무원들의 감정노동에 대한 연구(1983)에서, 헉쉴드는 항공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대응하는 가운데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감정노동 함으로써 이들이 진정한 자아를 훼손시키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고 지적한다.[각주:4] 이들의 내면에는 노동 시장에서 요구되는 어떤 사회적 의무들로부터 자유로운(혹은 자유로워야만 하는) 더 '진정한' 자아가 있는 것으로, 동시에 더 '진정한' 감정적 반응이 있을 것으로 상정된다. 즉 개인의 본연적 자아를 억압하며 어떤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외적 규범'으로서의 사회 체제와, 이로부터 자유롭고 손상되지 않은(혹은 그래야만 할 것으로 상상되는) '내적 자아'라는 대립적 이해는 그대로 유지한다.  



종교인의 감정과 경험 이해: 이분법의 외부에 대한 고민

감정과 사회 체제에 관심 갖는 식자들 사이에서 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익숙한 레퍼토리가 되고 있는 '감정노동'이란 개념은, 이렇듯 사회적 기관들이 부여하는 감정관리의 규범들을 기존 사회질서와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진짜' 자아를 제한하거나 억누르는 것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더 '진정한(authentic)' 감정-자아와 '덜 진정한' 외부 형식(사회 체제)의 이분법을 남겨둔다.[각주:5] 나는 (위에서 밝힌) 유명인의 공적영역에서의 감정표현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 '감정노동' 개념에 전제되어 있는, 더 '진정한' 감정-자아와 '덜 진정한' 외부 형식(사회 체제/기관)의 이분법이, 종교인들의 감정 경험과 종교(혹은 사회)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데 있어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접근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회적 기관이나 체제들에 비해 종교는, 그 의미체계가 더욱 진정한 것-신성한 것(the sacred)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한 의미체계들이 반복된 의례(ritual)와 구조화된 일상을 통해 종교인들의 감정-감각에 오랜 시간에 걸쳐 기입된다는 점에서, 어디서부터가 (종교라는) 외부형식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 '덜 진정한' 감정-자아인지, 어디까지가 종교에 길들여지지 않은 '진정한' 내적 감정-자아인지 엄격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즉 종교 주체가 종교기관이나 행위에 의해 신성화된 감정 규범(feeling rules)을 일단 내면화한 후에 느끼게 되는 일상의 사회적 경험과 감정들은, 서비스 노동에서 노동자가 가지는 사회적 경험과 감정에 비해, 훨씬 더 진정한 것(혹은 더 거짓된 것)으로 또한 더 신성한 것(혹은 더세속적인 것)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종교인의 감정 경험들을 종교기관에 의해 구성된 '덜 진정한 것'으로, 즉 다소간 '거짓된 것'이나 '왜곡된 것'으로 볼 때, 종교인들이 스스로의 감정-자아에 대해 느끼는 능동성과 자율성, 진정성(authenticity)과 신성함의 '경험'을 이해할 길은 묘연하다. 둘째, 종교는 (덜 본질적인) 외부의 물질적 형식으로 상정하고, 종교적 주체에 대해서는 순전히 관념적인 것으로서의 자아와 정체성에만 관심갖게 되면, 역설적으로 종교 주체가 가지는 물질성(예를 들어, 종교 주체의 '몸')을 심각하게 간과하게 된다. 종교와 감정, 자아의 상호 형성에 개입하는 미디어, 공간, 몸(의 감각), 의례의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한 일부 인류학자, 역사학자, 미디어학자, 종교학자들의 관심은 관념과 물질, 내용과 형식, 마음과 몸, 본질과 외형, 개념과 감정이라는 서구의 다소 엄격한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각주:6] 셋째, 개신교인들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주로 감정으로 매개되는) 자아에 대한 경험과 정체성의 어느 부분까지가 진정한 것이고 어느 부분부터가 덜 진정한 것이라고 판단할 초월적 위치에 설 수 있는 연구자는 없다. 더 진정한 감정이나 자아의 경계를 상정하는 사회적 혹은 학계의 상상들은 연구의 마침점이 되기보다는 그 자체로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감정과 이성, 몸과 마음, 물질과 관념과 같은 익숙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종교인의 감정과 이들의 종교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는, 한국의 정치경제 영역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보수 개신교인들의 사회적 활동들을 더 이상 '합리성'과 '이성', '의식(consciousness)'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혹은 그러한 층위에서 보수 개신교인들에게 대화를 거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여 거리로 뛰쳐나오거나 디지털 공간과 같은 유사 공론장에 말을 쏟아내는 대중들과 신자들을 향해 보수 개신교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침묵하고 회개하라' 했을 때, 그 기저에 깔린 이들의 감정-감각은 (근대의 조건과 무관하지 않은) 급격하게 흔들리는 권위-사회 질서, 그 사회적 혼돈에 대한 위기감과 불안, 두려움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다수 보수 개신교인들의 혐오 감정 기저에 있는 감각은, 동성애자들의 과시된 노출이나 이들의 성적 행위에 대한 상상에서 유발되는 (타고남과 동시에 개발시켜온 신체적 반응으로서의)'역겨움(disgust)'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불안과 공포, 혐오'로 집약될 만한, 근래의 보수 개신교인들의 사회적 감정-감각이, 가히 자동적이면서도, 무의식적, 비(非)반성적이라는 점이다. 보수 개신교인들의 의식과 마음에 말을 거는 비신자들과 신자들의 합리적 비판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막상 상대하고 있는 것은, 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지 않는, 그리 쉽사리 변하지 않는, 않을, 보수 개신교인들의 '몸'이 아닐까라는 점이다. 



세상과 타자를 지각하는 매개물(Medium)으로서의 몸-감각-감정 

몸은 생각과 의식에 선행하여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또한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감정을 사회로부터 분리/보존된 개인주의적 자아로 혹은 순전히 본능적인 동물적 반응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사회적/집단적 구성성에 주목하면서도, 우리의 몸에 체화된(embodied) 그 물질성, 자동성, 무의식성, 비(非)반성성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감정-감각을 육체와 정신, 개인과 체제, 감정과 이성이 긴밀하게 얽힌 통합적인 어떤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즉 개인적이면서도 체제적인, 즉각적이면서도 축적된(accumulated), 정신적이면서도 물질적인 방식으로서의 감정-감각-몸의 존재와 작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 내에 존재함(Being-in-the world)에 있어, 세계라는 실재를 지각함에 있어, 몸의 중요성을 강조한 메를로 퐁띠(Merleau-Ponty)는 가히 자동적이면서도 비(非)반성적으로 작동하는 보수 개신교인들의 혐오/불안/공포 감정-감각을 논의하는데 있어 유용할 수 있다. 



메를로-퐁띠는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이 '몸'을 통하여 형성됨을 강조하였다. 개인은 자신의 '몸'과 '몸의 감각들'을 매개로 세상을 지각하고 실재(reality)를 경험한다. 몸은 그 자체로 세계를 지각하고, 느끼고, '세계'라는 실재를 갖기 위한 매개물(medium)이다. 그러므로 '몸'과 '몸의 감각들'을 매개하지 않은, 즉 체화(embodiment)로부터 완전하게 독립된, 순전히 내적인 혹은 초월적인 경험은 불가능하다. '나'라는 자아 바깥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들은, 몸이라는 물질로 매개됐기에 순전히 관념적일 수 없는, 체화된(embodied) 지식들이며,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해 축적되어온 감각적 지식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몸은 세상에 대한 매개물임과 동시에 매개된 감각이 축적되어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특정 방식으로 느슨하게 구조화된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ies)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통솔해온 자에게, 그 행동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몸에 차곡차곡 축적된다. 이러한 몸의 행동들은 또한 스스로에게 어떤 감정-감각 경험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축적되는 것은 행동뿐 아니라 행동과 결부된 감정-감각들이다. 개신교인들이 신성한 의미와 상징으로 채색된 예배 행위를 오랜 시간 반복하며 그  신성함과 진리의 감각들을 자신의 몸에 기입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감각과 행위의 축적은 몸을 서서히, 그러나 일정한 방식으로 바꾸어 가는데,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형성된 것을, '몸 틀(le schema corporel)'이라고 한다.[각주:7] 



'생활의 달인'에 소개되는 어떤 직종이나 상황의 장인(master)들과 같이, 특정 행위를 수 십년간 단련하며 그 직종과 상황에 맞는 몸틀을 갖게 되는 것, 즉 특정 상황이 요구하는 행위들을 오랫동안 반복해온 이가 그 상황과 행위에 최적화된 몸을 갖게 되는 것은, 특정 방식으로 구조화된 상황과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몸 틀을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몸 틀을 가진 사람은 '몸'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경험한다. 반면, 몸 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주어진 상황과 타자들의 관계 속에서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 축구를 예로 들면, 공이 골대로 날아올 때 골키퍼가 '생각'하지 않아도 그 궤적을 몸이 미리 반응하여 공이 날아올 위치에 가 있을 수 있는 것은, 골키퍼가 반복된 훈련 속에서 골을 막기 위한 어떤 몸 틀을 이미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기) 근대를 살아가는 개신교인을 예로 들면, 영원한 진리와 절대적 권위에 대한 신성화된 감각을 반복된 신앙 행위를 통해 몸에 기입해온 개신교인들 중 일부는, (후기) 근대의 상황과 사회적 타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축적된 감각대로, 몸 틀대로, 반사적-자동적으로 행동한 결과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비판을 받게 될 때, '생각'을, '반성'을 하게 된다. 교회 내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던 '하나님의 뜻'이라는 수사(rhetoric)의 사용이, 바깥 사회에서 예상치 못한 반발을 가져오자, 개신교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수사가 불러일으키는 거의 자동적인 '신성함'의 감각을 정지시키고, '하나님의 뜻'이란 과연 무엇인가 '생각'을 하고 그에 대한 의미와 감각을 조정하게 된다. 


이렇듯 자동화되고 반사적인 '몸 틀'의 작동을 멈추고 자기 존재와 외부세계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는 개신교인들이 나타나고 있는 반면, 여전히 새로운 상황과 사회적 타자들을 향한 경험에 자신의 몸(의 감각)을 닫고 기존의 '몸 틀'을 유지하며 생각에 이르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후기) 근대의 격변하는 새로운 상황과 타자들 속에서, 자신의 '몸 틀'을, 외부 세계에 대한 몸의 감각들을 전혀 변화시켜 나가지 않는 이들의 집단적 '감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인가? 몸으로 매개되지 않는 순전히 관념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것으로서의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영역을 남겨두지 않는 메를로 퐁티의 생각은, 외부세계와 타자를 지각하는 사고(thought)와 감정, 몸의 반응들이 실은 모두 우리의 몸 틀을 통해 외부 세계가 경험되는,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일 뿐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쉽사리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란 생각에 이르게 한다. 


보수 개신교인들의 혐오/불안/공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모든 감정은, 우리의 몸을 매개로, 피할 수 없는 우리 몸의 물질성을 매개로, 경험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기 다른 사회적 관계들과 상황들 속에서 다른 몸 틀을 만들어 왔다면, 우리는 같은 사회적 대상(object)에 대해서도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주목할 것은, 우리의 몸이 순수하게 자연스러운, 동물적인 상태로 남아있는 몸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의 몸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과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와 상황들을 특정한 지식으로 (느슨하게) 구조화하는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ies)들과 이러한 상상들에 채색된 감정-감각들의 축적을 거치며 형성된다. 즉 우리의 몸, 그리고 몸을 통한 외부세계의 경험들 자체가 사회문화적 과정들에 의해서 형성되고 매개된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의 우리의 몸(의 감각들)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으며 외부 세계에 대한 특정한 정치적, 도덕적 입장으로 존재한다. 감정은 그 자체로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몸 틀이 외부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며, 외부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정치적, 도덕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문재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세계관이자 '세계감'이다.[각주:8] 즉 동성애를 지지 혹은 반대하는 개신교인들의 사이의 대립은, 단순히 의식(consciousness)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동성애에 대한 성서 해석의 차이로 귀결될 수 없다. 그것은 그 근본의 대립에 있어서, 세상은 이래야만 한다는 나름의 지식화되고 규범화된 사회적 상상들이 그러한 상상에 채색된 특정한 감정과 함께 오랜 시간 몸의 감각에 기입되어 온, 외부 세계와 타자들을 향해 동성애 지지자 혹은 반대자들이 만들어온, 전혀 다른 몸 틀의 차이이다.[각주:9]    

몸-감각-감정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보수 개신교인들의 '혐오/불안/공포'의 감정에 관심 갖는 우리의 접근 방식이 더욱 실용적이고 생산적이도록 도울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전해진 영향력 있는 개신교 목사들의 "침묵하고 회개하라"는 메시지나 동성애자들에 대한 보수 개신교의 적대적 입장을, 성경에 대한 다른 해석을 통해 비판하거나 민주주의 공론장의 논리로 비판하는 일은 분명 의미 있고 필요한 지적 작업이다. 그러나 의식과 생각의 변화를 요구하는 이런 성실한 지적 노력들은, 많은 경우 보수 개신교인들이 사회적 혼돈이나 동성애자들에 대해 가지는 집단적 감정, 감각, 몸 틀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개인적인 견해로, 이는 보수 개신교인들이 반대 입장의 글을 안 읽어서도 아니며, 단순히 반지성적이어서, 이성적이지 못해서만이 아니다. 이들이 특별히 더 완고해서도 아니다 (진보적 지식인들 중에도 근본주의자는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는 우리(보수와 진보 개신교인 그리고 비신자 일반)의 사회적 감정-감각 자체가, 외부세계에 대한 체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이자 도덕적 입장으로서 존재하고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화된 지식이자 도덕적 입장으로서의 사회적 감정-감각이 순전히 관념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몸에 기입되어 막강한 물질성(materiality)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련된 지적 노력으로 사회적 통념이나 신성시된 종교적 언설의 비본질성을 규명하고 해체시켜놓은들, 사회적 통념이나 종교적 지식을 자신의 정체성에 긴밀히 끌어안은 채 도덕적 감정-감각으로 체화한 개인 주체들의 몸-그 물질성!-은 쉽게 해체되지 않는 법이다.[각주:10] 즉 보수 개신교인들이 '흔들리는 권위-사회질서'나 '동성애자'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감각은 단순히 의식과 생각, 관념의 차원에서만 존재하지도, 작동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보수 개신교가 권위나 성도덕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체계를 이에 상응하는 종교적 실천과 일상 속에서 '신성한 것-진정한 것'으로 체험하며 보수 개신교인 자신들 몸의 감각으로 새겨온, 체화된 사회적 성향이자 기질(embodied dispositions and temperaments)이다.[각주:11] 


개신교인들의 감정-감각-몸, 그리고 '공부'

다른 사회적 타자들과의 평화적 공존을 위해, 한국 사회의 정치-도덕적 쟁점 수립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주류 보수 개신교인들의 사회적 '혐오/공포/불안'의 감정-감각의 변화가 필수적임을 깨닫는다면, '생각'만이 아닌 '몸'을 변화시키고 수련하는 방식으로서의 '공부'를 주장하는 김영민, 이원석, 도올과 같은 이들의 '공부론'에 특히 더 많은 관심을 쏟을 필요가 있다.[각주:12] 또한 이러한 공부론을 우리 주위의 개신교인 집단들의 사회적 상황과 관계의 특수성에 맞추어 어떻게 적용하고 함께 실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실용적이면서도 지적인 고민들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발적 사회 모임의 결사와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후기 자본주의의 일방향적 급류를 거스르는, 저항적인 삶의 양식과 몸(의 감각과 그 운용)을 함께 개발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인문학 공동체 운동(장미와 주판)을 오랫동안 꾸려온 김영민은 이러한 공동체를 "동무"라 일컫는데, 이는 바로 "몸이 좋은 사람들 사이의 연대"이다. 그가 말하는 "몸이 좋은 사람"이란, 우리가 앞서 논의한 외부세계와 타자들에 대해 가지는 몸의 정치성(도덕적, 정치적 방식으로 존재하는 몸 틀)을 체감하고 그 몸의 주변자리로, 주위의 타자를 향해, 자신의 감정과 인식을 계속해서 넓혀가며 연대하는 이들이다. 체제와의 불화와 관련해서는, "걸으면서 그 걷는 방식만으로, 살면서 그 사는 방식만으로, 그리고 존재하면서 그 존재하는 방식만으로 통속적으로 유형화된 욕망과 열정의 소비/분배구조를 깨트릴수 있는 결기와 근기를 스스로 몸 속에 기입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김영민은 일상을 바꾸는 정치를, 생각이 아닌 '몸'으로써, 신념이 아닌 '생활양식'으로써,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13] 그렇게 우리의 몸과 생활양식은 "세상과 그 체제들을 향한 정치적 선택과 조형, 배려와 기술의 자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몸을 바꾸는 공부는, "몸을 내 이기주의의 텃밭이자 진지로 삼기보다 타인과 세상의 메커니즘을 알아 가는 촉수이자 매개로 삼는 일"이며, 공부의 축을 "무엇보다 기질을, 성향을, 버릇과 몸의 운용 방식을 바꾸어" 나감으로 삼는 것이다 [각주:14] 


특히, (후기) 근대의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타자의 도래가 가져오는 두려움과 공포, 혐오의 감정 속에서 외부 세계를 향해 몸(의 감각)을 '닫고' 자기 심리의 동일성을 반복해나가는 한국 주류 개신교의 '반성하지 못함', '생각하지 못함'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개신교인들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공부가 아니라 '몸(의 감각과 운용)'과 '생활양식'을 변화시키는 공부이다. 동성애 사안을 예로 들면, 동성애자들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가 설령 이루어진다해도, 보수 개신교인들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와 공포의 감정-감각은 쉽사리 변화되지 않는다. "동성애는 죄이지만 동성애자는 사랑한다"는 개신교인들의 말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선, 부단히 동성애자들의 물리적 혹은 디지털 공간으로 찾아가 이들의 존재에 자신의 몸(의 감각)을 온전히 열고 이미 축적된 혐오와 공포 감각을 변화시키는 사회적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 동성애자들을 향한 개신교인의 '몸의 감각과 운용'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분노를 쏟는 대중들에 거부감을 가지고 사회적 질서와 권위의 수호에 더 마음이 기우는 일부 보수 개신교인들을 예로 들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민주주의적 공론장과 민주시민의 역할에 대한 지적 이해와 동의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이들의 사회적 관계/경험의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는 교회의 외부로 나아가, 시민으로서의 감각과 몸을 만들 수 있는 민주적 공론장에서의 사회적 경험의 질과 양을 높이는 것이다. 혹은 가능하다면, 교회 내에서 (주로 체험되는 신성시된 권위주의적 관계가 아니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민주적, 대화적 관계 경험과 갈등 해결의 경험을 축적하려는 용기있고 끈기있는 노력들이 필요하다.[각주:15] 


(후기)근대에서 경험되는 보수 개신교인들의 '혐오/공포/불안'의 감정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타자들과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구조화하는 체제의 작동방식을 온전히 이해함과 동시에, 꾸준히 타자들의 물리적 혹은 디지털 공간에 찾아가 이들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감각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인식(의 전체성)과 실천(의 결기와 근기)을 함께 꾸리는, 그럼으로써 개신교인들 스스로의 몸 틀과 생활양식을 변화시키는, 그러한 '공부(공동체)'가 필요하다. (한국) 근대와 개신교를 함께 고민하며, 한국 교회와 선교단체의 곳곳에서 하나둘씩 피어나고 있는 '독서/공부모임'들은 무궁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후기) 근대를 살아가는 개신교인들 스스로의 '몸'과 '생활양식'을 변화시키는 '동무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아니면. 교회 내 '진보/좌파'라는 나르시시즘적 허울에 만족하며, 체제와 불화하는 어떤 생활양식과 몸도 만들지 못한채, 끊임없이 교회와 세상에 대해 '정신승리'를 이루는, 인문학 '소비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글_ 김승수 (카이로스 회원, 콜로라도 대학 미디어 연구 박사과정, Center for Media, Religion, and Culture 연구원)  


  1.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는 대중들에 대한 일부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의 우려와 불안, 더 나아가 혐호 감정은 이러한 이분법들에 근거하고 있다. '침묵하고 (사적으로)회개하라'는 류의 메시지를 전했던 유력한 보수 개신교의 목사들은, (감정을 제어해야하는) 공적영역과 (감정을 표현해도 되는) 사적 영역, (동물적 본능으로 이해되는 '날 것'으로서의) 감정과 (본능을 제어 관리하는) 이성이라는 이분법 위에서, 자신은 '이성'의 자리에, 대중들은 '감정'의 자리에 두며, 그 '절제되지 못한' 태도에 대해 훈계한다. 이들의 설교에서, '분노'라는 '감정'에 치우쳐 말을 쏟아내는 것으로 묘사된 대중과 신자들은, 개신교가 요구하는, 자기 절제와 중용이라는 (구원의 표징과 밀접한), 윤리적-기술적 자기 운용에 있어 실패한 것으로 이해된다. [본문으로]
  2.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라. 네 자신이 되어라. 네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 진정한 너를 발견하라"는 식의 '진정한 자아 찾기' 내러티브-프로젝트는, 외부의 사회적 형식/규범/역할들에 의해 '아직은' 왜곡되지 않은 진정한 내적 자아가 우리 안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ies) 위에 작동함과 동시에 그러한 상상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물론 '(진정한) 내적 자아/(덜 진정한 혹은 작위적인) 외부 형식들'과 같은 우리의 사회적 상상은 (후기)근대적 조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추동하는 공간-인구의 전지구적 재배치/재영토화는, 지역화된 장소, 공동체, 전통, 친족, 종교 등에 기반해 형성되어 있던 근대 인간들의 안정된 의미체계들을 심각하게 분리/붕괴시켜왔다 (예를 들어, 향수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던 초등학생 때 우리 집 앞마당과 골목이 재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대형 백화점이 서있다든지, 하나님의 절대적 목소리로 들리던 지역 교회 목사님의 말씀이, 다른 지역과 종교, 문화를 오래 경험한 이에겐 이젠 여러 목소리 중 하나로 들리게 되는 경험들은, 이와 같이 공간-인구의 전지구적 재배치/재영통화로 인한 기존 의미체계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다). 즉 후기 근대의 인간들에게 정체성과 자아는 외부로부터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서 발견되어져야할 혹은 개발되어져야할 어떤 프로젝트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사회 체제 속에서 서로에 대한 생존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함으로써, 사회 체제와 외부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남아있는 '내면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개발하려는 열망을 더욱 심화시킴과 동시에 이 욕망들을 영리하게 상품화 한다. 기존 의미체계의 분리/붕괴를 만들어내는 (후기)근대적 조건들, 이러한 조건들을 기반으로 생성된 '진정한 내적자아 찾기'라는 사회적 상상,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상상이 기업 브랜드, 상품 광고의 내러티브로 적극적으로 차용되고 개발되는 상황 속에서,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던 소비자들의 '일상', '사회적 관계', '친밀함', '영적 경험', '감정' 등이 소비의 대상이 된다. 영적 경험만 예를 들면, 한국 불교의 템플스테이나 인도여행과 같은 영성관광(spiritual tourism) 붐은 친밀함(공동체)과 영적 경험, 진정한 자아 찾기에 목말라하는 코스모폴리탄 소비자들의 구조적 결핍-열망과 관련 있다. [본문으로]
  3. Hochschild, A. (1979) Emotion work, feeling rules, and social structure.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85 (3), 551-75. [본문으로]
  4. Hochschild, A. (1983) The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s.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본문으로]
  5. 감정노동 개념에 남아있는 '진정한' 자아와 '덜 진정한' 외부 형식(사회 체제)의 이분법은 이 개념이 마르크스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인간)' 개념을 통해, 사적소유와 분업 시스템으로 인해 인간(의 노동)이 노동생산물로부터, 생산 활동(노동) 자체로부터,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으로부터,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받게 된다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진정하고 본질적인 인간의 존재방식- 인간성-자아가 있음을 상정하고, 그러한 인간 외부로 대상화된 노동물, 노동활동, 분업 시스템 등이 다소간 왜곡되거나 덜 진정한 방식으로 인간의 진정한 자아를 소외시킨다는 이분법 위에 작동한다. [본문으로]
  6. 서구 학계 주류의 종교 이해는 본질(substance)과 의미(meaning)를 형식(form)보다, 신념(belief)을 종교적 실천(practices)이나 대상물(objects)보다, 영혼(spirit)을 물질(matter)보다 특권시하는 서구 기독교 문화 속에서 탈물질화 (dematerialized) 되어왔다(Birgit Meyer).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종교와 매개(mediation), 물질 문화 간의 관계에 관심 가져온 인류학자들(Birgit Meyer, 2008; Webb Keane, 2007)은 종교적 의미/내용과 이를 전달하는 형식/미디어/공간/물질 간의 상호의존성을 밝히고 양자가 서로를 구성하는 방식을 규명해왔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영향 하에 이루어진 종교 연구들 또한 종교의 물질적 측면을 강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미(본질)/형식, 신념/실천(대상물), 영혼/물질의 이분법들 사이에서 전자보다 후자를 특권시하며 주류 종교 이해를 전복시키는데 더욱 관심을 둔 반면, 둘 사이의 상호 구성 방식을 규명하거나 기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종교 이해를 제공하는 데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감정 경험을 포함한) 종교 주체들이 종교 경험에서 느끼는 신성함, 진정성, 능동성들은 다소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는데, 이는 이들이 종교라는 사회적 기관-체제 속에서 형성된 자아의 경험을 어찌됐든 다소 왜곡된 것으로, 혹은 소외의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7. Lupton, D. (1998) The Emotional Self. London: Sage. Merleau-Ponty, M.(1962) Phenomenology of Percepti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본문으로]
  8. “천지간 모두가 저마다 맨 앞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라 세계감(世界感)이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00 [본문으로]
  9. 도덕 심리학을 연구하는 하이트(Jonathan Haidt)는 The Righteous Mind(2012)라는 저서에서 미국 정치-종교 영역에서 진보와 보수가 판이하게 다른 도덕에 대한 감각과 직관의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는데, 이는 보수와 진보가 개발-축적해온 상이한 몸의 감각, 몸 틀이라는 차원에서 숙고될 수 있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직관하는데 있어 진보는 보수보다 돌봄(care)과 공평성(fairness)을 더욱 중시하고, 보수는 진보보다 충성도(loyalty), 권위(authority), 숭고함(sanctity)과 같은 기준을 더욱 중시함을 밝히면서, 인간이 무엇이 옳고 그런가에 대한 도덕적 입장을 가지는데 있어, 도덕적 추론(moral reasoning)보다 타고난 감각이나 혹은 특정 문화 안에 선택적으로 개발된 감각과 직관(intuition)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하이트의 연구결과는 보수와 진보가 외부 세계를 느끼는 일련의 감각-몸 틀을 다르게 타고났을 가능성과 함께 보수와 진보가 다른 사회적 관계와 경험 속에서 도덕에 대한 다른 감각들을 개발시켜왔을 것을 추론케 한다. 역시 도덕 심리학자인 피짜로(David Pizzaro)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타고난 감각 차이와 관련하여, 정치적 보수가 진보에 비해 역겨움의 감정-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느낌을 밝힌바 있다(http://www.ted.com/talks/david_pizarro_the_strange_politics_of_disgust/transcript). [본문으로]
  10.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브루노 라투어(Latour)는 그의 저서 Reassembling the Social(2005)에서, 구조주의자들이 진리와 지식의 구성성을 밝히고 해체하는데 탁월해왔으면서도, 그 진리와 지식이 가지는 물질성(materiality)과 구체성(concreteness)에 정당한 관심을 보이지 않아왔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 물질성과 구체성은 단지 비판적 분석을 통해 해체되지 않기에, 진리와 지식의 구성성에 대한 비판은 그것의 물질적 차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그 비판의 시작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11. 철학자 김영민이나 인류학자 메이어(Birgit Meyer)가 주목하듯이, 개인과 사회, 정신과 육체가 만나는 접점으로서의, 사회 구성원의 구조화된 성향-기질의 형성을 설명하려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이론은 종교인들의 사회적 감정-감각-몸을 관찰, 연구할 수 있는 개념 틀로서 유용할 것이다. [본문으로]
  12. 김영민의 '공부론'(2010, 샘터)과 이원석의 '공부란 무엇인가(2014, 책담)', 도올의 한겨레 칼럼 시리즈 '혁신교육감 시대를 위한 도올의 교육입국론'과 같은 글들을 염두에 둔 이야기이다. [본문으로]
  13.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주류 개신교는, '그리스도인됨'의 핵심을 '몸'이 아닌 '생각'으로, '생활양식(제자도)'이 아닌 '신념(신앙)'으로 치환함으로써, (체제와 세속에 대해 기만적 '정신승리'를 맛보면서도) 도리어 체제와 세속에 의해 구조화된 일상의 재생산에 공모하는 '개신교인들'을 길러낸다(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2012). [본문으로]
  14. 김영민(2010) 공부론. 샘터. [본문으로]
  15.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 앞에서 적극적으로 이들을 옹호하는 보수 개신교인들보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면서도 자신의 사회적 관계 내에서 혹은 SNS 같은 유사 공론장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온건하지만 침묵하는' 보수 개신교인 청년들이 더욱 많은 듯 싶다. 이러한 온건 보수 개신교인들의 삶의 스타일이자 몸의 운용 방식으로서의 '침묵과 자제, 온건함'은, 대체로 이들이 교회 안에서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는 신성한 감각을, '권위에 대한 비판과 적대'에 대해서는 어찌됐든 부정적인 감각을 형성시켜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질서와 권위에 대한 신성화된 감각을 체화해온 이들은, 국가를 견제하고 비판하기 위해, 시민으로서 행동하고 발언해야할 상황에서도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몸이 민주적 공론장에서보단, 권위주의적 관계로 점철된 교회라는 상황과 사회적 관계 내에서 형성되어왔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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