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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복음과 상황에 실린 "기독교 세계관의 논리적 구조와 문제점들(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81)"을 읽고 페이스북에 적은 단상을 이 지면에 맞게 옮겨온 글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 비판 글을 중심으로 한국 복음주의권 내에서 지식/이론과 실천/행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느껴왔던 아쉬움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볼만한 주제로 엮어내고자 합니다.



한국 복음주의권 내에서 (세속으로 상정됐든, 혹은 하나님 나라 통치아래 있는 것으로 상정됐든) 문화/역사/세계를 이해하려는 지적 노력들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경향을 본다:


경향1. 인문사회/자연과학 이론/언어들이 기독신앙의 정당성/우월성 입증을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된다. 지식과 이성의 사용은 기독교 스스로의 인식론적 한계를 의심하는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과학이 신앙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창조과학과 기독교세계관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경향2. (전지구적 혹은 지역적) 문화/역사/세계의 형성을 설명하는 요인으로 '정신적인 것'을 압도적으로 우선시한다. '세계관'이든, '이원론'이든, '사상(가)'이든, 심지어 '열정(열심)'이든.

경향3. 문화/역사/세계 형성 요인으로서의 '정신적인 것'의 우월(우선)성이라는 헤게모니는, 도리어  '실천'이나 '삶' 대한 (이데올로기적) 강조를 통해 유지된다. 즉 둘 사이에는 공모가 있다. 


"기독교 세계관의 논리적 구조와 문제점들"이란 글이 흥미로운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이후로 '기세'로 약칭)의 주요 주장들과 그 논리적 구조들을 각각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적 사유가 앞에서 제시한 복음주의권 내의 일반적 경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적절한 비판이 세련된 기만으로 끝맺음을 한다. 몇 가지를 짚어보겠다. 이 글의 필자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내러티브를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 구조를 가진것으로 분석하고, 각 주장의 내용은 상술한 후, 각 주장들을 반박할수 있는 지점들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I: 세계관은 세계를 형성한다.
II: 기독교는 세계관이다.
III: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를 형성한다.

먼저, 필자는 세계관(정신적인 것)이 세계를 형성한다는 기세의 주장 에 대하여, "세계관이 문화의 논리적 원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역사적인 원인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실제 역사 속에서 세계관과 세계는 단선적인 인과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서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눈치 빠른 독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터이지만, 위 글의 필자는 세계/역사/문화 각각의 개념이 다른 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적절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은채, 세 개념을 혼용하여 쓴다. 이후에 부연하겠지만, 세계/역사 개념을 무의식적으로 문화와 치환하여 사용하는 모습에서도 필자와 필자가 참고하는 사상가들의 관념론적 편향이 드러난다). 이 후 마르크스와 베버의 논쟁 또한 인용하며 "정신이 우선인가, 물질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다음으로 필자는 기독교는 세계관이라는 기세의 주장 II를 검증하는데, 특히 기세가 "신앙의 사유화, 교회의 게토화, 하나님나라의 타계화" 같은 문제들을 "이원론" 탓으로 돌리는 것을 비판하는데 주력한다.[각주:1] 그에 따르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신앙이 사회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 복음과 문화, 영과 육, 성과 속, 사실과 가치 등을 하나의 통합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을 가로 막는 "이원론(dualism)"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다. 기세의 주장에 따르면 "이원론(dualism)"은 "신앙을 사유화하며, 내면화하고, 교회를 게토화하는 주범" 인데, 그가 보기에 이는 "심히 단순한 분석"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교회 자체도 이러한 현상들을 만들어 내는 데 한 몫을 했다"면서 대안적 설명을 제시하는데, 그 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사상(또 다른, 정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G. 로핑크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타계화는 어거스틴이 하나님나라를 로마제국으로부터 분리해 내면서 비롯되었다고 했다(산상설교는 누구에게? 278~80). 어거스틴으로부터 천국은 한편으로 죽음 이후로 멀어졌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심령 속으로 철수해 들어간 것이다."

필자가, 세상과 교회의 타락을 이원론만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기세의 분석은 심히 단순하다고 비판했을 때, 그 비판의 핵심은 '이원(dual)'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론(-ism)'에 있어야하는 것 아니었을까? 필자가 이원론을 비판하기에 앞서, 세계를 형성하는 우선적인 힘이 '정신'인가 '물질'인가하는 질문이 여전히 논쟁적이라고 밝혔기에 이러한 질문이 더 힘을 얻는다. 만약 이원론이 지나치게 세상에 대한 설명을 단순화시킨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세상/문화의 형성을 '정신적인 것'의 작용(이분법적 범주로 세상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원론이 단순한 분석이라며 제시하는 대안적 설명이, 로마제국과 하나님 나라를 분리하여 생각했다는 어거스틴의 '두 도시(Two cities) 사상'-또 다른 '정신적인 것'-이라니.

이후 필자는 "신앙의 사유화, 교회의 게토화, 하나님나라의 타계화"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세속화'현상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며, 이 문제들을 서구 역사 안에 맥락화시키며 몇 몇 요인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만, 그 요인들이 여전히 '관념론'적이라는 혐의를 벗기는 힘들다. 세속화 현상을 언급하며 제시하는 논거 마저도, "‘오직 신앙으로(Sola Fide)’라는 종교개혁적 신앙주의"-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개혁 개신교인들의 새롭고 급진적인 사회적 상상(정신적인 것)-이다(나는, 근본적으로 필자가 계속해서 이런 '관념론'적 설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가 참조하는 사상가들 -하비 콕스, 낸시 피어시-자체가 서구 기독교의 '관념론'적 전통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질과 정신이 어떻게 서로를 상호 구성하며 변증법적으로 역사/세계를 형성해나가는지 설명하려했던 다른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이론들을 참고했다면 어땠을까).

즉,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 글의 비판에서마저, 문화/역사/세상을 설명하는 요인으로서의 '정신적인 것'의 우월성/우선성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세계관이라는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설명을 비판하면서 다른 '정신적인 것(어거스틴의 사상/종교개혁적 신앙주의)'들로 설명을 대신하기 때문이다(경향 2).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인 것'의 우월(우선)성은 역설적으로 삶(행위)과 '실천'에 대한 강조로 환상적으로, 급히 논점을 회피하며 그 헤게모니를 유지한다(경향 3). 이 글의 결론을 보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회피적이다:


"기세는 실패했다. 기세가 실패했다고 단언하는 이유는 위에서 분석한 기세의 문제점들 때문이 아니다. 기세의 실패는 이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의 실패다. 기세는 철학이나 신학이 아니라 삶이고 실천이다. 따라서 기세는 열매와 실천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글의 결론에 이르기 전까지, 기독교 세계관 내러티브의 논리적/이론적 취약함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서는,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며 황급히 끝을 맺는다. 이데올로기적 봉합. 곪은 곳을 발견하지만, 치료를 위해 더 깊이 헤집지지는 않는다. 급히 환부를 닫아버리고는 곪은 곳은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정신적인 것', 그 이론/정신/논리의 취약함을 끝까지 파헤쳐 추궁하지 못하고, 급하게 실천과 행위의 문제(물적인 것)로 옮겨가는 이러한 지적 태도(에토스)는, 비단 이 글의 필자만의 모습이 아니다. 페이스북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하게 되는 '삶'과 '실천/행위'에 대한 다수 복음주의 지도자/신자들의 강조는, 종종 '말하는 것', '깊이 오래 생각하는 것',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것', '공부하는 것'에 대한 은밀한 폄하와 쌍을 이룰 때가 적지 않다. 기독교의 정신적인 것(그 세계관/사상/이론)과 물질적인 것(그 행위와 실천, 의례, 공간, 제도)에 대한 합리적/이성적 비판은 종종 '말'뿐인 것, 즉 '실천하지 않음' 혹은 '삶 없음'으로 격하된다. 위에서 본 필자의 이분법처럼,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상상 속에서, 이론과 실천, 말과 행위, 비판과 삶, 정신과 물질은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수 없는 독립된 개체인 마냥 굳건하게 분리되어 존재한다. 이론은 실천이 아니며, 말은 행위가 될 수 없고, 비판은 (믿음의) 삶과 대척점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본 필자처럼, "기세의 실패는 이론적 차원에서의 실패가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의 실패"라는 허무하도록 화평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혹은 다수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늘상 교회와 세상의 문제를 토로하는 쳇바퀴 도는 대화를 맺음하듯,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며, '비판이 아니라 삶'이라는 통속적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가진 '정신적인 것(사상/이론/세계관 등)'의 취약함은 종종 이렇게 이데올로기적으로 회피된다. 그렇게 갑자기 '삶'을 찾고 '실천'을 찾으며 열심을 다짐하지만, 취약하고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는 그 '정신적인 것'은 구체적으로 점검되지 않으므로, 개선되고 진보될 기회를 잃는다. 정신적인 것의 취약함은 좀처럼 발가벗겨지지 아니하고, 종종 그 민낯을 드러낼지라도, 문제는 삶과 실천이라며 그 '정신적인 것'의 자리를 애써 지켜준다. 그렇게 말과 비판도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삶과 실천도 자기의 자리를 지킨다. 마치 서로를 전혀 모르는 듯. 


'삶'과 '실천/행위'에 대한 복음주의 일반의 강조는, 이렇듯 기독인들에게 스스로가 가진 '정신적인 것'과 '물적인 것'의 상호적 구성을 이해할만한 지적인 노력과 개념이 전무함을 감추는, 그러함으로써 자신들의 삶과 실천을 통솔하는 정신적인 것의 취약함마저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한다(경향 3).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고 논리적으로 취약하다면, 그 정신적인 것의 빈약함과 논리적 취약함이 우리의 실천과 삶을 어떻게 부적절하게 통솔하였는지 밝히는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그 정신적인 것을 적절하게 수정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통솔하는 것이 더 나은 접근이 아닐까. 그러나 정신과 이성은 그 잠재된 힘의 끝까지 추구되지 못한채 '삶'과 '실천'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언어들에 잠식당한다 


이러한 '이성의 미적지근한 사용', 혹은 '도구적 사용'이, 나는 다수 복음주의 기독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생각한다(경향 1). 복음주의 기독인들에게 이성은 항상 조심해서 다루어야할 어떤 것이다. 그 사용이 기독교 스스로의 인식론적 한계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말이다. 세련된 복음주의는 이렇게 기독교 스스로의 정당성이나 해석의 권위를 해체시키지 않는 선에서의 도구적 이성 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이런 경향 아래에서, 인문사회과학 이론/언어들은 기독신앙의 정당성/우월성 입증을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근대)세속화에 대한 복음주의 기독교 나름의 대처일수 있다. 이제 기독 신앙은 '공적 영역'에서 '이성(합리성)'이라는 논리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입증해야하기 때문이다. 인문사회과학 이론/언어들을 통해 기독교 자신과 기독교가 생각하는 세계/문화/역사를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 스스로의 가시성visiblity과 권위authority를 새로(다시) 얻기 위한 노력이다. 공적 영역의 언어가 이성과 과학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공적 위치 회복을 위해 이성은 제한적으로 동시에 적극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다만, 그 이성의 사용이 절대 기독교 스스로의 바운더리와 한계를 끝까지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이성 사용의 목적은, 그것의 사심없는 추구에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잃어버린) 문화적/사회적/공적 권위를 되찾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김현준이 지적하듯, 개신교의 세계관 공부모임이 도리어 '반지성주의'를 낳는 역설적 경우를 만든다(반지성주의를 낳는 개신교의 공부모임 http://cairos.tistory.com/221).


긴 글을 맺으며,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것이다. 경향 1과 관련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거나 혹은 개신교인으로서 '공부함/학문함'에 관심있는 이들이, 그들의 이성을 끝까지 밀어부치는 방식으로, 즉 자신이 서 있는 인식론적 영토의 한계까지 의심하며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공부하지 않는 한, 그 공부는 여전히 '기만적'이거나 '도구적'일 수 있다(이게 실은 세계관이라는 이론틀을 끝까지 밀어붙여 사고하면 도달하는 결론이다).


기독교 내부의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가진 어떤 취약함/오류/부적절함을 깊이 숙고하고 합리적으로 비판하고자 할때 생기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야말로, 기독교라는 경계의 지근한 안팎에서 공부하는 자들 나름의 십자가일 수 있다. 우리는 안전한 이분법으로 도주해서는 안된다. 급진적 이론/말/정신/공부 앞에서는 삶/행위/실천을 강조하고, 급진적인 삶/행위/실천 앞에서는 이론/말/정신/공부를 강조하는 식의 태도는 그 자체로 기만적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안전한 삶이다. 이분법에 눌러앉아 둘 중 하나로 회피함으로써 그 불안함과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자는, 결국 예수가 말한 '자기를 부인하는 삶', '십자가를 지는 삶'에 이르기가 어렵다.

부끄럽지만, 나를 비롯한 공부하는 자들이야말로 '자기 부인'을 회피하는데 능한 부류이다. 자기 몸/목숨(물질적인 이해관계)은 끈질기게 보전하면서도 자신의 정신을 어떻게 하면 세련되게 보일지를 가장 잘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물질과 정신은 그렇게 서로를 모르는 듯 따로 서 있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통합하려는 지난한 노력을 습관적으로 회피하며 지연시키는 자들은, 그렇게 스스로가 속는지 모른채, 살아간다. 진보를 말하지만 기득권의 생활 양식을 습득한 채. 
'전문지식' 쌓는 것을 공부라 생각한 채. '공부'는 자기 삶/죽음의 양식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간다. 그렇게 정신과 물질이 끊임없이 서로를 빗겨나가는 삶의 양식을 유지한 채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지기를 피해가게 된다.


우리가 성육신을 추상의 교리로서만이 아닌, 실제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솔하는 윤리로서, '몸'과 '삶/죽음'의 양식을 만들어가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로서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수의 본 때문이아닐까. 예수는 하늘로부터 내려받은 그 정신을, 그 말(씀)을,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삶의 양식에, 타인과의 관계에, 그리고 죽음의 양식에 기입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화해시킨 자였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예수의 선포를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 도래함이 환상적인 정신의 자기계시가 아닌, 부단히 복종시킨 예수의 몸과 삶의 양식 그리고 타자를 향해/위해 당신을 소실시킨 그 죽음의 양식을 통해 이뤄졌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도리어 예수를 배반하고 있지 않은지 물어야 할지 모른다. 하늘의 정신을 역사 안에 위치지어진 당신의 몸과 삶/죽음의 양식안에 기입했던 예수의 지속적인 '자기부인'과 '몸을 쳐 복종시킴'을, 우리는 '예수 믿음'이라는 언어로 값싸게 치환하고 있지 않은지 물어야 할지 모른다. 자신의 몸과 삶/죽음의 양식, 타인과의 관계에 예수의 본을 기입하지 않는 이는, 신자는 될지언정 제자가 되기 어렵다. 끊임없이 이동시키며 소외시키는 (근대) 세속을 뚫어내고 예수가 보였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는 작업은, 오직, 변덕스럽게 분열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우리 자신의 정신-이를테면, 욕망과 정체성이라는 자기 이해-을 이겨내고, 하늘의 정신을 따라, 말(씀)을 따라, 예수의 본을 따라 계속해서 쳐 복종시킨 그 제자된 이들의 몸과 삶/죽음의 양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일관적이고 파괴적인 물질성 없이 관념만 가지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수 없다. 신자는 그(녀)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확신할지 모르겠으나, 그 믿음-구원은 예수가 선포하고 가져온 하나님 나라의 이 땅으로의 도래와는 하등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예수 믿음'과 '하나님 나라 도래'의 관련없음(혹 부당하다면 관련 적음)이 스멀스멀 현실로 드러나는 이 땅-한국 사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제자의 출현은 복음주의 신앙의 충실한 실천과 살아냄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가능해지지 않는다. '문제는 실천이야'라는 말은 마치 한국 기독교의 정신적인 것-그 신앙/사상/사회적 상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서로로 하여금 한국 기독교가 가진 정신적인 것의 취약함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며, 분석과 논쟁의 대상 또한 되지 못하게 한다. 일부 복음주의자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실천을 아무리 강조한다 한들, 그 실천을 통솔하는 (혹은 그 통솔을 저해하는) 정신적인 것들을 낱낱이 분석하고 논쟁하며 수정해나가는 지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이는 이데올로기적 언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가 가진 정신적인 것의 취약함을 밝히고 수정해 나가려는 말과 공부, 비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실천들이다. 다만 이러한 말-공부-비판이 단순히 자기 정체성을 수식해주는 한낱 악세서리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지근한 안팎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따로 또 같이, 자신이 내뱉은 말, 글, 공부와 비판을 자신의 몸과 삶의 양식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기입시켜나가는, 부단한 자기 부인과 수련을 반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글_ 김승수 (카이로스 회원, 콜로라도 대학 미디어 연구 박사과정, Center for Media, Religion, and Culture 연구원)  

  1. "기독교 세계관의 논리적 구조와 문제점들"의 필자는 기세가 문제틀로 지적하는 '신앙의 사유화, 교회의 게토화, 하나님 나라의 타계화에 대해 상술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가 기세의 이원론 비판을 설명하는 도식을 빌려 다음과 같이 이해해 볼수 있을 듯 하다. '신앙의 사유화'는 서구 세계에 피어난 신과 인간, 시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상상을 실현시키려는 근대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후, 종교가 공적영역으로부터 축출되어 서서히 사적 신념의 문제로 여겨지게 된 것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게토화'는 신앙의 사유화와 함께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시민사회와 국가의 공적 현안에 소리를 내거나 결부되지 못한채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간 모습을 일컫는 듯 하다. 하나님 나라의 타계화는 이렇듯 신앙의 사유화/교회의 게토화와 함께, 성서가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이 땅의 역사에서가 아닌 죽음 이후의 내세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 것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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