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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콘텐츠/편집실 잡담

유물론, 예수, 폭력 [김강기명]

붓다, 예수 서울에 입성하시다_이흥덕, 1998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는 언제나 율법학자들과는 그것과는 달랐다.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마7:28-29) 무엇이 다른 것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내용’에서 쉽게 찾곤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의 ‘내용’과,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의 ‘내용’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학자들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는 ‘율법, 남성중심, 민족주의’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는 ‘가난받는 이들과 여성의 해방, 하느님의 은혜, 탈민족주의’ 등등으로 재현된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말했고, 예수님은 저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수의 가르침의 독특성을 주장한다면 사실상 예수에게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않은 거나 다름이 없다. 오늘날 이런 사유는 이렇게 재연된다. 보수교회의 목사는 보수적인 교회의 설교단에서 율법학자들의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진보교회의 목사는 진보적인 교회의 설교단에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전한다. 양자는 얼마나 똑같은가! 두 사람은 공히 신학대학원을 나와, 전도사-부목사를 거쳐 담임 목사가 되었고, (아마도) 장로들과 갈등을 겪고 있을 것이며, (역시 아마도) 교인들의 권위적인 지도자이다. 이들은 단지 설교의 내용에서만 갈라질 뿐이다. 목사를 ‘신학교 교수’로 바꾸어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똑같은 교실 배치와, 똑같은 선생-학생 관계에서 단지 그들이 쓰는 ‘교과서’만이 다를 뿐이다. “꼰대는 꼰대이다. 단지 설교의 내용에서만 그들은 진보 꼰대가 되고, 보수 꼰대가 된다.”(맑스의 유명한 유물론적 경구 - 흑인은 흑인일뿐.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 는 이렇게 관념론적 경구로 뒤집어진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예수가 설파한 말의 ‘내용’에서 찾는 것은 이토록 빈약하다. 이러한 관념론적 사고방식은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의 ‘의견’으로 취급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은 - 약간의 비약이 발생할지는 모르겠으나 - 고난 받는 이들의 피 묻은 절규 역시 ‘세상 속에 있는 하나의 의견’ 정도로 취급하고 만다. “세상에는 이런 의견도 있고, 저런 의견도 있습니다. 서로들 존중하며 평화롭게 삽시다. 아멘.” 예수는 단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놀랍게도 예수 자신이, 하느님 나라를 ‘내용’에서 찾는 것에 극렬히 저항한 유물론자였다. 그의 실천이 잘 드러나는 성서 이야기를 하나만 검토해보자. 마태복음 11장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묻는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3절)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란 고대 이스라엘의 후기에 생겨난 개념인 ‘메시야’ 혹은 ‘사람’(사람의 아들, 人子)을 말한다. ‘사람’은 고난받는 이스라엘에 나타나 모든 것을 바로잡을 이였다. 이스라엘, 특히 권력자들을 장차 올 메시야 앞에 세우기 위해 주력했던, 그러나 지금 ‘여우’ 헤롯 아켈라오스에게 구속당하여 죽음을 앞둔 이 예언자는 그의 후배에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을 갈릴리 전역에서 벌이고 있는 다음 세대의 예언자에게 ‘바로 당신인가?’를 묻는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즉각적이지 않다. 그는 단지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는 것을 이야기할 뿐이다. 예수가 메시야인가, 아닌가? 예수는 지금 그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있다. 당최 ‘메시야’라는 게 어떤 한 인물인가? 그래서 지금은 단지 준비의 단계고, 그 사람을 기다려야할 때인 건가?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메시야라는 ‘존재’ 대신, ‘지금시간 Jetztzeit’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이야기할 뿐이다.
 
 
더 구체적인 예수의 생각은 이어지는 설교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오클로스(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의 위대함을 외친다. 그는 예언자이며, 예언자보다 더 큰 자이다. 세상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었다! 그런데 듣다보면 그조차도 별 것 아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진정으로 유물론자임이 드러난다.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세례요한은 위대한 예언자였다. 그는 위대한 말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 말이 낳은 결과였다. 혹은 그 말과 결부된 사건이었다. 그것은 하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성서를, 예수를 순진하게 비폭력적으로, 평화주의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나는 세상에 검을 주러 왔노라.”라는 말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해 지난한 투쟁에 참가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은 왜 위대한가! 그것은 요한의 예언 사역을 통해 바로 ‘저들’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폭력적 공세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저들’의 정체는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의 병행본문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이다!(눅 7:30)
 
 
저들의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명쾌했다. 하느님의 율법과 성전에 복종하는 이스라엘 민족국가가 하느님 나라였다. 저들의 하느님 나라는 ‘말’에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말을 가지고 이스라엘인민들을 지도하거나, 그 지도의 틀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 즉 사마리아인, 세리, 성매매 여성, 과부, 고아, 병자, 무토지 농민, 급진분자...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배제해 버렸다. 저들은 완벽히 셋팅된 정결한 이스라엘을 원했다. 그것이 그들의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는 그들의 모습을 장터에서 혼인 잔치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비유한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이 비유는 결코 “목사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해도 회개하지 않는 청중에 대한 비유”가 아니다. 굳이 이런 식으로 오늘날 교회와 연관 짓자면 이 비유는 오히려 목사를 탄핵하는 비유이다. 이 비유 속에서 놀이를 이끌고 있는 아이들은 화가 나 있다. “야, 이 멍청한 것들아, 내가 피리를 불면 춤을 춰야지!” “아이고, 지금 곡소리를 내고 있잖아, 너희도 울어야 놀이가 되지!” 바로 이들이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 나라의 지도자이기에 마땅히 사람들의 그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하느님 나라에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각주:1]
 
 
그러나 자꾸만 그들의 하느님 나라는 침탈당한다. 금식하는 요한에 의해, 죄인들과 잔치를 벌이는 예수에 의해, 그리고 눈을 뜨는 소경과, 일어나는 절름발이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과, 이 복음을 듣고 복종을 거부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그것은 재앙적인 ‘폭력’이다. 율법학자들에게. 그러나 그것은 ‘해방’이다. 민중들에게. 폭행당하는 율법학자들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금식하는 요한더러는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잘 먹고 마시는 예수는 먹보에 술꾼이라 비난한다. 뭐 어쩌라는건가? 예수는 날카롭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말의 무능력’을 꼬집는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 선포는 하나의 ‘의견’이 아니다. 그것이 의견이 아니기 위해서는 언제나 어떤 종류의 폭력이 수반된다. 폭력이란 말에 거부감이 드는가? 그러나 세상에 제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고 태어난 아기가 있을까. 또 율법학자들에게는 나병 환자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이상에 대한 ‘폭력’이 아니었을까. 힘없고 배제된 이들에게 ‘평화로운 세상’만큼 폭력적인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따라서 폭력이라는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순진한 화해의 주장, 혹은 이상으로서의 비폭력주의 따위는 결코 예수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비폭력주의에 대해 썰을 풀지 않았다. 그는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혹은 그 이전 무수한 예언자들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저들의 하느님 나라’를 침공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운명을 함께할 뿐이다. 그 침공의 방법론을 예수는 말하지 않았다. 특히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많았던 당시 예수 무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군사적인 무장행동을 벌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가 무장행동 자체를 명시적으로 거부했다는 증거를 복음서에서 찾기도 쉽지 않다. 예수에게 그런 방법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율법적 잣대 따위는 없었다. ‘지금’ 하느님 나라가 침공당하고 있는 그 사건 자체에 그는 언제나 충실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유물론적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요더(<예수의 정치>)는 틀렸다. 그는 예수를 여전히 어떤 지식인으로, 교사로 만들고 만다. 율법학자들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것처럼, 요더의 예수도 이스라엘을 이끈다. 단, 다른 ‘내용’으로. 그러나 예수 자신이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19절) 그는 유물론자다. 그는 민중의 해방실천을 개념화하지 않았다. 그는 민중들의 하느님 나라 침공사건 속에서 말하고 실천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담화의 대부분은 사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향한 탄핵의 말이며, 심판예언이다. 후대에 편집된 복음서가 그 말들을 아무리 제자들이나 회중을 향해 한 말인 것처럼 맥락화해도, 이 강렬한 저항의 외침은 교회 편집자의 ‘의도’를 넘어 우리에게 들려온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예수 담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의 방향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방향을 결정지은 예수의, 그리고 민중의 ‘행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이야기 속에서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삶의 규범” 따위를 찾으려는 시도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로 “민주화”든, “선진화”든, 그 어떤 역사의 ‘개념’을 폐기해야 할 것이다. 유물론이란 바로 이렇게 이념형으로 변한, 관념으로 변한 어떤 것을 풀어헤치며 도래하는 자연 자체, 혹은 사건에 대한 사유이다. 그런 점에서 유물론은 관념론에 대한 ‘불화’를 생산한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어떤 ‘가르침’으로써 선포되는 순간, 예수의 실천은 그 하느님 나라를 침공한다. “여기 거기에 들어가지 않은/못한 메시야(들)이 있다!” 이 메시야들이 하느님 나라를 침공하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중단시킨다. 이 사건을, 행동을 떠나서 하느님 나라를 말하고,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 일이란 말인가!_김강기명(비평루트 편집장)


  1. 요아킴 예레미아스, 허혁 옮김, <예수의 비유>, 156-157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