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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예수 서울에 입성하시다_이흥덕, 1998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는 언제나 율법학자들과는 그것과는 달랐다.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마7:28-29) 무엇이 다른 것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내용’에서 쉽게 찾곤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의 ‘내용’과,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의 ‘내용’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학자들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는 ‘율법, 남성중심, 민족주의’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는 ‘가난받는 이들과 여성의 해방, 하느님의 은혜, 탈민족주의’ 등등으로 재현된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말했고, 예수님은 저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수의 가르침의 독특성을 주장한다면 사실상 예수에게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않은 거나 다름이 없다. 오늘날 이런 사유는 이렇게 재연된다. 보수교회의 목사는 보수적인 교회의 설교단에서 율법학자들의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진보교회의 목사는 진보적인 교회의 설교단에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전한다. 양자는 얼마나 똑같은가! 두 사람은 공히 신학대학원을 나와, 전도사-부목사를 거쳐 담임 목사가 되었고, (아마도) 장로들과 갈등을 겪고 있을 것이며, (역시 아마도) 교인들의 권위적인 지도자이다. 이들은 단지 설교의 내용에서만 갈라질 뿐이다. 목사를 ‘신학교 교수’로 바꾸어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똑같은 교실 배치와, 똑같은 선생-학생 관계에서 단지 그들이 쓰는 ‘교과서’만이 다를 뿐이다. “꼰대는 꼰대이다. 단지 설교의 내용에서만 그들은 진보 꼰대가 되고, 보수 꼰대가 된다.”(맑스의 유명한 유물론적 경구 - 흑인은 흑인일뿐.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 는 이렇게 관념론적 경구로 뒤집어진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예수가 설파한 말의 ‘내용’에서 찾는 것은 이토록 빈약하다. 이러한 관념론적 사고방식은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의 ‘의견’으로 취급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은 - 약간의 비약이 발생할지는 모르겠으나 - 고난 받는 이들의 피 묻은 절규 역시 ‘세상 속에 있는 하나의 의견’ 정도로 취급하고 만다. “세상에는 이런 의견도 있고, 저런 의견도 있습니다. 서로들 존중하며 평화롭게 삽시다. 아멘.” 예수는 단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놀랍게도 예수 자신이, 하느님 나라를 ‘내용’에서 찾는 것에 극렬히 저항한 유물론자였다. 그의 실천이 잘 드러나는 성서 이야기를 하나만 검토해보자. 마태복음 11장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묻는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3절)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란 고대 이스라엘의 후기에 생겨난 개념인 ‘메시야’ 혹은 ‘사람’(사람의 아들, 人子)을 말한다. ‘사람’은 고난받는 이스라엘에 나타나 모든 것을 바로잡을 이였다. 이스라엘, 특히 권력자들을 장차 올 메시야 앞에 세우기 위해 주력했던, 그러나 지금 ‘여우’ 헤롯 아켈라오스에게 구속당하여 죽음을 앞둔 이 예언자는 그의 후배에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을 갈릴리 전역에서 벌이고 있는 다음 세대의 예언자에게 ‘바로 당신인가?’를 묻는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즉각적이지 않다. 그는 단지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는 것을 이야기할 뿐이다. 예수가 메시야인가, 아닌가? 예수는 지금 그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있다. 당최 ‘메시야’라는 게 어떤 한 인물인가? 그래서 지금은 단지 준비의 단계고, 그 사람을 기다려야할 때인 건가?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메시야라는 ‘존재’ 대신, ‘지금시간 Jetztzeit’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이야기할 뿐이다.
 
 
더 구체적인 예수의 생각은 이어지는 설교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오클로스(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의 위대함을 외친다. 그는 예언자이며, 예언자보다 더 큰 자이다. 세상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었다! 그런데 듣다보면 그조차도 별 것 아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진정으로 유물론자임이 드러난다.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세례요한은 위대한 예언자였다. 그는 위대한 말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 말이 낳은 결과였다. 혹은 그 말과 결부된 사건이었다. 그것은 하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폭력’이다. 성서를, 예수를 순진하게 비폭력적으로, 평화주의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나는 세상에 검을 주러 왔노라.”라는 말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해 지난한 투쟁에 참가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은 왜 위대한가! 그것은 요한의 예언 사역을 통해 바로 ‘저들’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폭력적 공세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저들’의 정체는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의 병행본문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이다!(눅 7:30)
 
 
저들의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명쾌했다. 하느님의 율법과 성전에 복종하는 이스라엘 민족국가가 하느님 나라였다. 저들의 하느님 나라는 ‘말’에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말을 가지고 이스라엘인민들을 지도하거나, 그 지도의 틀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 즉 사마리아인, 세리, 성매매 여성, 과부, 고아, 병자, 무토지 농민, 급진분자...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배제해 버렸다. 저들은 완벽히 셋팅된 정결한 이스라엘을 원했다. 그것이 그들의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는 그들의 모습을 장터에서 혼인 잔치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비유한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이 비유는 결코 “목사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해도 회개하지 않는 청중에 대한 비유”가 아니다. 굳이 이런 식으로 오늘날 교회와 연관 짓자면 이 비유는 오히려 목사를 탄핵하는 비유이다. 이 비유 속에서 놀이를 이끌고 있는 아이들은 화가 나 있다. “야, 이 멍청한 것들아, 내가 피리를 불면 춤을 춰야지!” “아이고, 지금 곡소리를 내고 있잖아, 너희도 울어야 놀이가 되지!” 바로 이들이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 나라의 지도자이기에 마땅히 사람들의 그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하느님 나라에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각주:1]
 
 
그러나 자꾸만 그들의 하느님 나라는 침탈당한다. 금식하는 요한에 의해, 죄인들과 잔치를 벌이는 예수에 의해, 그리고 눈을 뜨는 소경과, 일어나는 절름발이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과, 이 복음을 듣고 복종을 거부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그것은 재앙적인 ‘폭력’이다. 율법학자들에게. 그러나 그것은 ‘해방’이다. 민중들에게. 폭행당하는 율법학자들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금식하는 요한더러는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잘 먹고 마시는 예수는 먹보에 술꾼이라 비난한다. 뭐 어쩌라는건가? 예수는 날카롭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말의 무능력’을 꼬집는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 선포는 하나의 ‘의견’이 아니다. 그것이 의견이 아니기 위해서는 언제나 어떤 종류의 폭력이 수반된다. 폭력이란 말에 거부감이 드는가? 그러나 세상에 제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고 태어난 아기가 있을까. 또 율법학자들에게는 나병 환자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이상에 대한 ‘폭력’이 아니었을까. 힘없고 배제된 이들에게 ‘평화로운 세상’만큼 폭력적인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따라서 폭력이라는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순진한 화해의 주장, 혹은 이상으로서의 비폭력주의 따위는 결코 예수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비폭력주의에 대해 썰을 풀지 않았다. 그는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혹은 그 이전 무수한 예언자들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저들의 하느님 나라’를 침공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운명을 함께할 뿐이다. 그 침공의 방법론을 예수는 말하지 않았다. 특히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많았던 당시 예수 무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군사적인 무장행동을 벌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가 무장행동 자체를 명시적으로 거부했다는 증거를 복음서에서 찾기도 쉽지 않다. 예수에게 그런 방법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율법적 잣대 따위는 없었다. ‘지금’ 하느님 나라가 침공당하고 있는 그 사건 자체에 그는 언제나 충실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유물론적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요더(<예수의 정치>)는 틀렸다. 그는 예수를 여전히 어떤 지식인으로, 교사로 만들고 만다. 율법학자들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것처럼, 요더의 예수도 이스라엘을 이끈다. 단, 다른 ‘내용’으로. 그러나 예수 자신이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19절) 그는 유물론자다. 그는 민중의 해방실천을 개념화하지 않았다. 그는 민중들의 하느님 나라 침공사건 속에서 말하고 실천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담화의 대부분은 사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향한 탄핵의 말이며, 심판예언이다. 후대에 편집된 복음서가 그 말들을 아무리 제자들이나 회중을 향해 한 말인 것처럼 맥락화해도, 이 강렬한 저항의 외침은 교회 편집자의 ‘의도’를 넘어 우리에게 들려온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예수 담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의 방향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방향을 결정지은 예수의, 그리고 민중의 ‘행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이야기 속에서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삶의 규범” 따위를 찾으려는 시도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로 “민주화”든, “선진화”든, 그 어떤 역사의 ‘개념’을 폐기해야 할 것이다. 유물론이란 바로 이렇게 이념형으로 변한, 관념으로 변한 어떤 것을 풀어헤치며 도래하는 자연 자체, 혹은 사건에 대한 사유이다. 그런 점에서 유물론은 관념론에 대한 ‘불화’를 생산한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 하는 어떤 ‘가르침’으로써 선포되는 순간, 예수의 실천은 그 하느님 나라를 침공한다. “여기 거기에 들어가지 않은/못한 메시야(들)이 있다!” 이 메시야들이 하느님 나라를 침공하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중단시킨다. 이 사건을, 행동을 떠나서 하느님 나라를 말하고,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 일이란 말인가!_김강기명(비평루트 편집장)


  1. 요아킴 예레미아스, 허혁 옮김, <예수의 비유>, 156-15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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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icon of http://logosblf.egloos.com BlogIcon 바우로| 2010.06.01 12:04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김강기명님의 글은 과연 그러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명필이다..^^내 블로그에 담아가요. 아는 것은 쥐뿔도 없지만 그래도 코멘트 달아서..
Favicon of http://blog.cyworld.com/mdylab BlogIcon 본질| 2010.06.07 18:29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성경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을 못받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보수신학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고,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왜 비판했는지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400년 이상 이어져 내려오는 정통신학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이단들을 물리치며 지금까지 버텨왔는지, 민중/해방신학이 비주류에 머물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보수신학을 제대로 한번 공부해보시기를 적극 권장합니다(사실 권장 정도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를 통해 신구약을 꿰뚫는 관점이 생기고 난 이후에도 지금과 같은 주장을--하실 수 없겠지만--하신다면 제가 밥한번 사드리죠.^^
Favicon of http://blog.jinbo.net/minjung BlogIcon 김강 | 2010.06.08 16:56 신고 | PERMALINK | EDIT/DEL
안녕하세요. 밥 한 번 사신다니 참 감사드립니다. 저는 10여년 신학을 공부했는데요, 그 중 절반은 총신대에서 정통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공부했었답니다.^^ 검토할만큼 해 보고 아니다 싶어서 나왔어요.^^

그리고 원래 민중신학은 주류를 지향하지 않구요, 주류가 은폐하고 가리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신학입니다. 저는 아주 만족스러워요.

마지막으로 신구약을 꿰뚫는 관점따위는 없구요, 신구약을 꿰뚫는 '구라'만 있겠지요. 제가 진지하게 검토해본 결과 그렇습니다^^

밥은 언제 사시겠어요?
술꾼 | 2010.06.08 17:02 신고 | PERMALINK | EDIT/DEL
저도 끼워주시면 안될까요? 김강님이랑 같은 데 있었는데. 두 분이서 어색할 것 같아서요.ㅋ
Favicon of http://blog.cyworld.com/mdylab BlogIcon 본질| 2010.06.20 00:50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 총신에서 공부를 하셨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구약을 꿰뚫는 관점이 생기지 않으셨다니 우선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밥은 사드릴 수 없겠습니다(관점이 생기고 난 후에 밥을 사드린다고 했으니).^^;; 그만큼 신학을 공부하셨음에도 민중신학에서 만족을 느끼신다면 아무리 말씀드린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말씀하신 신구약을 꿰뚫는 '구라'라는 것은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재밌겠네요.
Favicon of http://cairos.tistory.com BlogIcon 김강기명 | 2010.06.20 19:20 신고 | PERMALINK | EDIT/DEL
보수적인 신학에서 말하는 '신구약을 꿰뚫는 관점', 이를테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 같은 게 사실은 성서 각권의 맥락과 내용을 폭력적으로 삭제하고 소위 '정통교리'에 성서를 끼워맞출 뿐인 '구라'라는 이야기입니다.^^

참 안타깝네요. 그런 비정직하고, 불의한 이론을 여전히 신봉하신다니.^^ 카이로스에서 열리는 '성서학 세미나'에 오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실 거에요. 물론 그 세미나는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건 아니고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세미나입니다.

오셔서 밥 한 번 사세요^^
Favicon of http://blog.cyworld.com/mdylab BlogIcon 본질| 2010.06.22 21:00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상하네요. 저는 그저 성경을 주욱 읽었을 뿐인데 그런 관점이 생겼다면 그것도 교리에 끼워맞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바울서신에서 바울이 가열차게 외치는 복음의 메시지는 다 구라라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가 또 열나도록 인용하는 구약의 구절들에 대해서는 그저 바울의 신학에 끼워맞추기 위해 의도적 편집을 거친 결과이거나 구약 자체가 구라라는 두가지 경우가 나오겠네요. 이런 식이라면 도대체 성경을 믿는 이유가 뭔가요?-_-;;

아무튼 성서학 세미나가 어떤 내용을 다룰 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게 다가오기는 합니다. 기회 되면 뵙고싶네요^^
Favicon of http://cairos.tistory.com BlogIcon 김강기명 | 2010.06.22 22:17 신고 | PERMALINK | EDIT/DEL
어느 누구도 '진공상태'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성경 읽기는 '그저 죽 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그저 죽 읽었다고, '순수하게' 읽었다고 주장할 수록, 그는 사실은 기존의 교리와 관습대로 읽었을 가능성이 큰 거지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여러 입장의 성서 읽기를 검토하고, 상식과 관습에서 벗어난 성서 읽기를 시도해야 하는 거지요.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결과는 다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바울 이야기 잘 하셨습니다.

바울 서신 역시 바울이 당시 교회들에 편지를 쓰던 그 역사적 맥락에서 읽지 않고, 오늘날 우리의 교리적 전제에 끼워맞춰서 읽으면 안 되지요.

성서를 '구라'냐 '진실'이냐라는 잣대로 보시는데, 그 이분법 자체가 사실 무의미합니다. 성서는 매 역사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주장을 담은 책들의 모음집이잖아요? 성서의 각 구술자들, 기록자들, 편집자들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경험한 구원을 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저마다는 진실한 구원을 경험했겠지요.

그리고 저는 '성서'를 믿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저를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구원을 믿을 뿐입니다. '성서'라는 글 자체가 무슨 하느님의 계시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본다면, 그것은 예수님 당시 율법을 그 율법의 수여자인 하느님보다 더 떠받들던 바리새주의적 오류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요?
Favicon of http://blog.cyworld.com/mdylab BlogIcon 본질| 2010.06.23 23:16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와 김강기명님과의 차이는 성경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성경무오'와 같은 문제는 차치하고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대한 생각부터 다르네요. 성경의 일관성에 관한 문제도 달리 보는 것 같습니다. 김강기명님 입장에서 저를 보면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보수교리를 그냥그냥 받아들이는 순진한 신자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런 상황에서 뭔가 이야기를 진행하려면 위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는 길고 긴 씨름을 먼저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좀더 나아간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으로써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 참고로 저같은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역사적 맥락이나 성경 각권의 저자의 개성을 무시하고 읽는다는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어느 시대나 타락한 인간의 속성은 변함이 없고 그 시대마다 저자들을 들어 쓰신 하나님이 동일하시다는 생각을 할 뿐입니다.
Favicon of http://cairos.tistory.com BlogIcon 김강기명 | 2010.06.30 15:20 신고 | PERMALINK | EDIT/DEL
본질 님의 글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담론의 전형을 그야말로 '전형적으로' 보여주시고 계시군요.

"전제가 다르다" 결국에 폭력적으로 논쟁을 종결짓는 보수 신학의 방식이지요. 전제가 다르니까 니랑 내랑은 더 할 말 없다. 너는 나쁘고 나는 옳다. 세상에 이런 나쁜 대화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본질님은 한 가지 사실을 실토하셨습니다. 그것은 '나는 전제에 기반하고 말한다'라는 거지요. 사실 저는 계속해서 나의 공부가 언제나 전제를 흔들 수도 있고, 어떤 주어진 전제보다 공부의 과정을 통해 진리로 다가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질님은 전제는 그냥 주어져 있고,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시나 봅니다. 저도 그 잣대로 평가하시는 것이지요.

게다가 말씀하시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으시네요. 처음에는 저를 무식한 사람으로 몰면서 공격을 하시더니, 이내 방어적으로 돌아서시는군요.(그러게 왜 그렇게 쉽게 사람을 판단하셨요?ㅉㅉ)

게다 성서를 읽기 위해 배경과 맥락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말에 대해서는 "그저 읽었는데도.."라는 식으로 '순수성'을 들이대시더니 이번에는 반대로 "우리도 공부하거든?"이라면서 "보수도 공부한다"는 주장을 하지요.(하지만 그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참 열심히 배워봤지만 언제나 개혁주의 교리에 맞춰진 역사 공부지 정직한 공부는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말씀하신 "어느 시대나 타락한 인간의 속성은 변함이 없고", "그 시대마다 저자들을 들어 쓰신 하느님은 동일"이라는 게 전혀 증명될 수 없는 교리적 진술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말한다면, 그 '성경이 말한다'가 이미 또한 '교리적 전제'에 근거한 읽기로 인해 나온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게다 성서는 과연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구술전승되고, 기록되고, 편집된 책일까요? 성서의 풍부함을 그런 식으로 교리에 맞추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신앙은 정답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언제나 이 불확실한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하는 힘이 아닐까요?
Favicon of http://blog.cyworld.com/mdylab BlogIcon 본질| 2010.07.01 02:37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제가 글을 애매하게 작성하는 건가요? 자꾸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옳고 그름에 대해서 직접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누가 어떻다를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정죄하는 자로 몰리는 것 같아서 당황스럽습니다.

김강기명님이 말씀하시는 전제라는 것은 생각처럼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논리는 그 전제에 기반해서 쌓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논리를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전제를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김강기명님이 동의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부분이 영에 속한 영역이라고 보고, 성령께서 올바른 전제, 즉 올바른 믿음으로 이끌어가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더의상의 사람에 의한 논의가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더 이어가봤자 본래 논의주제는 호도한 채 상대방의 허점만 지적하는 말싸움이 되기 쉽고, 더 나아가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되는 경우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을 찌푸리게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더 말을 이어가기 보다는 기도함으로 성령께서 저희 둘 가운데서 선을 이루어가시기를 원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김강기명님을 무식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첫번째 댓글에서 분명히 '조명을 받고 못받는다'는 관점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조명은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열심히 알려고 하느냐 하는 능동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받는다는 차원에서의 수동적인 의미가 강합니다(눅 24:32 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현상이 바로 그런 것이죠). 따라서 성경을 상대적으로 적게 알아도 조명을 받으면 성경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고, 아무리 많이 공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조명을 받지 못하면 단순한 성경에 관한 지식의 모음 정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입장에서는 누구를 무식하다 탓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역시 기도로 조명하심을 구할 뿐입니다.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물론 그대로 읽어내려갑니다. 하지만 성경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록되었을 때에 정확히 어떤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알기 위해 배경까지 공부해가며 읽습니다. 따라서 충분히 배경에 관해 숙지가 된 경우 그냥 읽어내려간다 하더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즉, 공부를 한다는 입장과 그냥 읽는다는 입장 사이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 그 공부의 내용이 어떻다 말은 못하겠네요.)

역사에 대해서 저보다 더 많이 공부하셨을 줄로 믿습니다. 지식이 얕은 저조차도 인류의 역사를 보다보면 인간이 만들어온 세상은 구제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느 때에 인간이 전쟁이 없고 도덕적 윤리적 타락이 없고 모든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냈습니까? 그 어느 때에 인간이 자신들이 그렇게 좇는 자유와 평등이 완벽하게 조화되며 구현되는 사회를 만들어낸 적이 있습니까? 아니, 그 중 하나라도 제대로 구현해낸 공동체가 이 땅위에 존재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 사회는 우리 인간들이 인정하듯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룰 수 없는 '이상사회'입니다. 허나 인간은 그런 것들을 이루는 것은 커녕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살인, 강도, 침략, 착취, 전쟁, 마약, 음란 등의 범죄가 가득한 사회를 만들어왔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속성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동일하심은 성경을 통해 나타납니다. 물론 현실에서도 그렇게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도 동의하실지 의문이지만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너무 동일하심에 놀랍니다. 그렇게 많은 저자들이 어쩌면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그렇게 동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가끔은 이 책을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과정 역시 성령의 조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 누가 옳다 그르다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김강기명님의 진리관을 살짝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저의 진리관은 이렇습니다. 유일한 진리가 존재한다(요 1:1). 하지만 인간은 당장 진리를 명확히 알 수 없다(고후 3:1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 알게 된 만큼 실천해서 자유에 이르러야 한다(요 8:32, 마 7:24). 저는 정답을 구합니다만 이미 나온 정답이라 통칭하는 것들에 대해 맹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미 고민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존중하기에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모습은 저와 김강기명님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모습일 것 같네요.
먹보에술꾼 | 2010.07.01 10:14 신고 | PERMALINK | EDIT/DEL
성령의 조명을 받은 해석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김강기명 | 2010.07.01 15:02 신고 | PERMALINK | EDIT/DEL
왜 했던 말을 뒤집으실까요?

첫 댓글에서 '조명' 이야기만 하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ㅡㅡ;

" 보수신학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고,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왜 비판했는지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400년 이상 이어져 내려오는 정통신학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이단들을 물리치며 지금까지 버텨왔는지, 민중/해방신학이 비주류에 머물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보수신학을 제대로 한번 공부해보시기를 적극 권장합니다(사실 권장 정도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지 않나요.


그리고 진짜 이상하네요. 조명은 성령님이 해주셔서 수동적으로 되는 것인데 왜 저보고 '보수신학을 공부해야' 그런 조명을 받는 것처럼 쓰셨나요?

님이 무슨 주장을 하시든지 그건 별로 상관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논리가 필요한 지점에서 눙치면서 신앙적인 언술로 도피하는 건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아무래도 눈에 밟혀서요.

그리고 분명하게 공격해놓고 아니라는 식으로 적당한 신앙의 언어로 피하시는 것, 이것도 보수신학의 전형적인 병폐중에 하나를 본질님이 답습하고 계신 것으로 보이네요. 정죄하시는 거 맞으시잖아요. 님을 맞고 다른 '전제'를 갖고 있는 저는 틀린 거잖아요.(근데 저는 무슨 전제 위에서만 사유가 이뤄진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에 반대하거든요?) 저는 성령의 조명을 못 받고 있는 안타까운 사람이라고 쓰신 거 맞잖아요. 하신 말을 안 하셨다고 해서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뇨. 사람이 기억ㅋ못해도 하느님은 다 기억하실텐데요. 어쩌실려구..

그냥 끝까지 충실하게 논리적으로 논쟁을 하는 게 훨씬 더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Favicon of http://blog.cyworld.com/mdylab BlogIcon 본질| 2010.07.01 11:31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먹보에술꾼님,
그 부분은 제가 누구한테 설명을 드릴만큼 연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한테 이야기를 들으시기보다는 다른 자료를 찾아보시는 편이 빠르고 정확할 것 같습니다.
Favicon of http://blog.cyworld.com/mdylab BlogIcon 본질| 2010.07.01 17:08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김강기명님,
지금 제가 우려했던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말을 바꾼 것처럼 보이실 것입니다. 저는 김강기명님께서 총신에서 공부한 사실을 모르고 보수신학을 공부해보시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명하심은 아무런 인풋도 없는 사람한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알고자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 뚝 떼어서 인용한다고 뭐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로마서 10:17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이것도 일반적 인용이 가능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제가 조명하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상대적으로 적게 알아도'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이는 지식이 전무할 때는 조명하심도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김강기명님에 대한 정보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입장을 바꾼 이유 빼고는 말을 뒤집은 적이 없습니다.

논리학을 공부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논리라는 것은 논리에 앞서 정의한 전제의 틀을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논리를 발전시키다가 전제와 모순되는 결론이 나왔을 시 그 전제를 폐기할 수는 있지만 그 논리 자체가 전제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은 반대한다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해서 정죄한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네요.

생각날 때마다 김강기명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술꾼 | 2010.07.01 23:35 신고 | PERMALINK | EDIT/DEL
괜한 참견질일 수도 있겠지만,
김강님을 위해 뭐라고 기도하시려구요?^^
Favicon of http://blog.cyworld.com/mdylab BlogIcon 본질| 2010.07.02 12:27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술꾼님,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정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게 김강기명님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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