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자연권
<정치론>에서 가장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는 ‘자연권’ 개념이다. 이것은 ‘코나투스’와 ‘능력’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힘’은 ‘권리’와 동의어라고 주장한다.
여러 자연물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힘은 바로 신의 힘이라고 볼 때 자연권이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은 만물에 대해서 권리를 가지고 있고 신의 권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자연물은 존재 및 활동에 대하여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의 권리를 자연권으로 가지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정치론> 2장 3절)
II장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여러 자연물이 활동하고 실존하는 능력은 곧 신의 능력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 안에 존재하는 만물들은 신의 권리와 자유 안에서 변용되며/하면서 각각 존재하고 활동할 권리를 갖는다. 자연 안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힘이 미치는 곳까지 존재하고 활동할 권리를 갖게 되며, 따라서 각 인간 역시도 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권리를 자연에 대하여 가지고 있다.1)
이러한 스피노자의 자연권 개념은 그 당시 대중화되어 있던 홉스의 자연권 개념과는 매우 달랐다. 홉스는 자연권을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본성 즉 그 자신의 생명의 보존을 위해 스스로 원하는 대로 그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갖는 자유”라고 정의한다.2) 홉스의 정의에서 능력과 의지(“원하는 대로”)는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코나투스의 개념 역시 스피노자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만인은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자기의 이득을 추구하며 자신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자유의지와 코나투스의 노력을 모두가 기울인다는 점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그러나 각 개인은 자신에 대해서는 알아도 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므로 항구적인 불신에 시달리며, 따라서 모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이 자신을 해하기 전에 남을 먼저 해하려 한다.3) 결국 이러한 상황이 그 유명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를 낳는다. 따라서 홉스의 해결책은 절대적인 권력자에게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스피노자의 자연권 개념은 이와 달랐다. 스피노자는 능력과 의지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다중들은 관계 속에서 발휘되는 각자의 능력만큼 그 관계 속에서 권리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 각 개인이 힘은 불균등하기 때문에 누구도 완전한 평화와 안전을 누릴 수 없다. 개인은 자신의 자연권을 온전히 행사하기 어렵고, 안전과 평화에 대한 위협과 공포는 개인들의 능력과 자유를 좀먹어 개인의 자연권은 결국 유명무실해진다. 자연 상태의 개인이 다른 누군가의 힘을 두려워하거나 그에게 공격을 받을 때, 그는 상대방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며 그만큼의 자유와 힘[자연권]을 상실하게 된다. 즉 공포의 대상이 많을수록, 자유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그만큼 능동적인 인간이 되는 길은 요원해진다.
결과적 상황만 놓고 보면 이러한 모습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자연권이 단지 개개인만의 것으로, 그리고 개개인의 힘으로 결정되는 동안은 없는 것과 같고,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공상 속에 존재한다.”라고 말한다.4) 즉, 그는 오히려 홉스처럼 각 개인이 독립된 개체로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실존한다는 다중의 부적합한 인식[공상]을 품는데서 이러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가 도래한다고 보았던 것이다.5)
때문에 스피노자와 홉스의 해답은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 홉스는 자연권을 군주에게 양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스피노자에게서 양도될 수 있는 권리란 없다. 모든 개체들이 관계 속에서 실존하는 한, 그 개체는 실존하고 있는 모습만큼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상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군주에게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을 통해 가능한 일이 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두 사람이 서로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합친다면 그들이 혼자인 경우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친밀관계를 이룰수록 더 많은 권리를 모든 사람이 갖게 된다.”6) 따라서 인간은 ‘이성’에 따라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즉 정치체의 구성을 통해 평화와 안전을 공동으로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정치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다중multitudo”이라 명명한다.
사람들이 공동의 권리를 갖고 그들 모두가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 다중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이 권리를 일반적으로 통치권이라 부른다. (<정치론> 2부 16-17절, 강조는 필자)
그런데 다중이 정치체를 구성함으로써 생겨난 이 통치권은 ‘자연권’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최고 권력의 권리는 단순한 자연권 외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으로 인도되는 다중의 힘에 의해서 제한된다. (<정치론> 3부 2절)
즉 스피노자에게 자연상태와 사회상태(혹은 국가상태)의 구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자연상태와 나쁜 자연상태가 있을 뿐이고, 이것이 곧 좋은 사회상태와 나쁜 사회상태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상태=사회상태가 여러 가지 모습, 즉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7) 즉 홉스처럼 어떤 군주에게 권리를 양도하는 것(정확히는 그렇게 한다고 ‘상상’하는 것)을 통해 다중이 하나의 ‘정치체’를 세우는 것도 다중의 합력의 한 방법이며, 다른 방법들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에게 있어 ‘구성constituent’은 근본적으로 열려 있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규정된 ‘체제’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이론을 분석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정치론>은 이러한 세 가지 정체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며 다중의 능력이 상승하거나 하락하는지를 논하고 있다.
(2) 내란과 폭정의 악순환
그러나 인간의 오랜 경험은 정치체를 구성하는 과정이 결코 이렇게 이성을 통해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다중들은 자연 상태에서 욕망과 정념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경험은, 인간이 행동하는 한 악덕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정치가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정치가들은 인간의 악덕을 방지하는 것을 연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된 실제적 경험으로부터 배워왔던 방법, 즉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이유에서보다 두려움 때문에 사용하는 간교한 방법으로 연구를 했던 것이다. (<정치론> 1장 2절)
따라서 이들이 그저 이성의 규제에만 따라서 생활하도록 지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시인들이 노래한 황금시대라든지 허구적인 이야기를 꿈꾸고 있는 것과 같다.8)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노여움과 질투,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가며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욕망은 다 다르다. 각자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무엇이 더 선하고 무엇이 더 악한지를 자신의 정서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은 정서에서와 마찬가지로 판단에서도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9)
스피노자는 다중의 적나라한 모습들, 개개인의 충동과 욕망을 분석하며, 인간의 정념에 의거한 자연권의 실현태에 대해서 설명한다. <신학정치론>의 신정 분석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다중은 이성을 통해 정치체를 구성하기보다는, 정념과 상상에 의해서 하나의 정치체를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자연권이 사회상태에서도 지속된다는 것은 사회상태가 갈등과 분열, 반목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지속적인 갈등과 분열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다중의 모습은 스피노자가 분석하는 세 가지 정치체를 위협으로 몰고 간다.
만약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욕망하도록 인간 본성이 이루어져 있다면, 화합과 신의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술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성향들은 전혀 다르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에, 국가는 통치자들만이 아니라 피통치자들도 포함되는 모든 사람이 공공의 복리를 위해 중요한 것을 할 수 있도록 규제되어야 한다. 곧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든 아니면 힘이나 강요에 의해서든 간에, 이성의 계율에 따라 살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정치론> 6장 3절)
우리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본성상 적대적이며, 그들을 통합하고 연결시키는 법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본성을 보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귀족정으로 변화하고 다시 이는 군주정으로 변화한다고 믿는다. 사실 나는 귀족제 국가들 중 다수는 민주제 국가로 출발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믿는다. (<정치론> 8장 12절)
이 인용구들에서, 스피노자는 다중의 삶이 정념에 기반하여 펼쳐질 때 발생하는 갈등과 내란의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에서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두려움이 나타난다. 이 두려움 속에서 다중은 “공포와 증오, 공동으로 피하려고 하는 나쁜 일에 대한, 또는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다른 선을 추구하는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나쁜 일에 대한 것”10)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되며 결국 차악으로서 (독재를 포함한) 국가의 지배를 승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홉스가 말하는 사회계약의 진실이다.)
결국 다중의 정념은 국가의 강제나 규범에 의해서 진압된다. 정념에 의한 사회상태의 구성은 내란과 폭정, 혼란과 독재의 악순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소요의 원인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는 사회상태, 즉 전쟁이 두려움의 영원한 대상이 되며, 결국 심심할 때마다 법이 파기되는 상태는 단순한 자연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11) 또한 다중이 내란을 일으킬 때 그것을 공포로 밖에는 막을 수 없는 국가, 다중을 맹종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국가 역시 국가라기보다는 황무지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1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피노자에게서 다중의 무능력은 다중이 수동적 정념에 휩싸여 힘의 합력으로 나아가는 공통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또 그로 인해 목적론적 상상과 미신, 공포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며, 그리하여 내란과 폭정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것이 다중의 모습의 전부는 아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시민권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13) 이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다중이 수동적 변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폭정에의 예속이나, 내란을 통한 무능력한 힘의 분출 말고, 다중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악순환을 넘어서 자유로운 다중들의 합력을 통한 민주주의로 나갈 수 있을까? IV장에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대안을 탐구하여 볼 것이다._김강기명(CAIROS 연구원)
1) TP 2장4절, “그러므로 내가 이해하는바 자연권은, 모든 일이 발생하는 것에 따른 자연의 법칙과 규칙, 말하자면 자연 자체의 힘이다. 그리고 전체 자연의 자연권과 그에 따른 모든 개개의 자연권은 그것의 힘이 미치는 한까지 확장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본성의 법칙들에 따라서 행동한다면, 그는 최고의 자연권을 행사하는 것이며 그가 갖고 있는 힘만큼 자연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2)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진석용 옮김(서울: 나남, 2008), 176쪽
3) 토마스 홉스, 앞의 책, 170쪽, “이와 같이 상호간에 불신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예상되는 위협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 조치를 강구하게 된다. 그것은 곧 폭력이나 계략을 써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오랫동안 지배하여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무력화하는 일이다.”
4) TP 2장15절
5) “인간들은 권리상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재한다”는 식의 정식은 여기서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인간들은 실제로는, 그들을 평등하게 해 줄 어떤 역량 관계(어떤 유형의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한 불평등한 역량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그들을 보호하면서 그들에게 권리들을 부여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 일반화해서 말하면, 인정되고 행사될 수 있는, 또는 반대로 그렇지 못할 수 있는 행위능력으로서의 “이론상의” 권리라는 관념은 부조리나 신비화에 불과하다.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93쪽
6) TP 2장13절
7) TP 2장17절
8) TP 1장5절
9) E III정리51
10) 에티엔 발리바르, 앞의 책, 131쪽
11) TP 5장2절
12) TP 5장4절
13) TP 5장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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